초라함과 성찰 사이
투고를 마치고 출판사 웹사이트를 둘러보았다.
끝없이 올라오는 신간 목록들, 화려한 표지와 ‘신인 작가 탄생’이라는 문구.
그 순간 내 글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보낸 원고를 다시 열어보니,
왜 이제야 눈에 띄는 오타들이 그렇게 신랄하게 보이는 걸까.
워드 속 빨간 줄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들려오는 피드백이 더 잔인했다.
그들에게는 출판사의 선택을 받은 멋진 책이 있었고,
나에게는 아직 워드 파일 속 일기 같은 글뿐이었다.
그 초라함은 단숨에 나를 3만 5천 피트 상공에서 지하로 떨어뜨렸다.
물론 몇몇 출판사에서는 “검토 후 연락드리겠다”는 답장이 왔다.
감사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진짜 가능성을 의미하기보다
예의 섞인 응원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인터넷에서는 “투고를 했더니 바로 다음 날 연락이 왔다”는
후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만약 내 글이 꼭 잡고 싶은 글이었다면,
그들도 곧장 연락을 했겠지.
그런데 내 메일함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다 한 작가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좋은 일은 얼마든지 저질러도 된다. 아니, 저질러야 한다.
일단 저질러 놓으면 어떻게든 수습하게 되어 있고,
그 에너지가 그 방향으로 나를 밀어준다.”
그래, 맞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저지른 덕이었다.
초라함에 눌리기보다는,
그 에너지를 다시 나를 앞으로 밀어주는 힘으로 삼아야 했다.
잘 되든 안 되든, 못 먹어도 Go!
가슴을 펴자. 작가가 이렇게 쭈그려 있으면, 글도 기를 못 편다.
아직 시작 단계인데, 왜 벌써부터 50미터 전력질주를 하려 했을까.
천천히, 꾸준히. 지금은 그게 더 중요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난 후,
비로소 진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기다림도 경험이다.”
스스로 다짐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메일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비행을 마치고 공항 와이파이에 연결하면,
가족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보다 먼저 메일함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건 언제나 기다릴 필요조차 없는 광고 메일 뿐이었다.
이번 투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친구는 물론, 가족에게조차.
그래서 이 기다림은 철저히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별별 이유를 붙였다.
“월요일이라 바쁘겠지.”
“화요일은 월요일 일을 처리하느라 그렇겠지.”
“주말은 원래 답장이 늦지.”
친절하게 ‘2~3주쯤 걸린다’고 했지만,
일주일이 지날 때마다 내 조급함은 더 커졌다.
혹시 메일이 아예 전달되지 않은 건 아닐까?
아니면 읽었지만, 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넘겨버린 걸까.
처음 며칠은 설렘이었다.
“오늘은 올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 설렘은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때 한 글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기다림조차 작가의 작품이다.”
맞다.
기다림은 내가 투고를 결심했을 때 이미 함께 감수해야 할 과정이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지나온 길 위에서
나도 같은 속도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존 케이지의 실험적 오케스트라 곡 <4분 33초>가 떠올랐다.
연주자가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음을 내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관객은 호흡, 기침, 바람 소리 같은
‘공간의 소리’를 음악으로 듣는다.
어쩌면 이 기다림도 그렇다.
답장이 오지 않는 적막 속에서,
나는 글을 더 쓰고, 더 다듬고, 스스로 단단해지고 있었다.
기다림은 속을 태운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 새로운 글감을 안겨준다.
불안을 잊기 위해 쓴 글은 또 다른 기록이 되고,
그 기록이 쌓여 언젠가 내 자존감의 기둥이 될 것이다.
그 초라함과 기다림은, 결국 나를 단련시키는 과정이었다.
투고는 이미 지나갔지만,
나는 여전히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기다림의 온도를 견딘 나에게
하나의 문장이 속삭일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