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비행을 하다 보면, 10년이라는 시간이 손끝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다.
내가 그토록 꿈꾸던 유니폼을 입고 첫 비행에 나섰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두 자릿수 경력이 되었다.
그 누구도 그토록 오래 이 하늘 위에 머무르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저 잠깐 머물다, 다른 길로 나설 줄만 알았다.
조인 초창기, 나와 함께했던 동기들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다.
그사이 나는 같은 하늘, 좌석, 안내방송을 수백 번도 넘게 반복하며 오늘까지 왔다.
가끔 후배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문득 놀란다.
"2000년생이 입사했다고?"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누구요?"
한 번은 ‘데이비드 게타(David Guetta)’가 프리미엄 캐빈에 탑승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히트곡을 들으며 자라온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지만,
마지막에 스케줄이 바뀌며 탑승이 취소되었다.
아쉬워하는 우리를 보며, 이제 막 입사한 한 후배가 물었다.
"데이비드 게타? 그 사람이 유명해요?"
그 순간, 세월이 말없이 내 어깨 위에 앉았다.
그토록 찬란했던 유명함도, 시간 속에서는 모르는 이름이 된다.
시간은 신기하다.
시간은 나에게 준 것도, 가져가는 것들도 많다.
가져간 것은 나의 체력.
예전엔 16시간 비행 후에도 곧장 샤워만 하고 나가서 도시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쇼핑몰도, 디즈니 랜드도 랜딩 후에 곧 잘 하던 일이였다.
요즘은 비행 후, 기내에서 내리자마자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고 나만의 시간을 보낼수 있는 곳을 찾는다. 혹은 비행을 시간하기 전에 '침대' 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렇게 점점, 낯선 설렘보단 조용한 관찰이 늘어난다.
어제는 한 후배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와서 크루들과 신나게 사진 찍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나와 나이가 비슷한 선배가
"나 어렸을 적에 많이 가지고 찍었던 사진기네!" 라고 했더니, 후배가 웃으면서
"홍콩 빈티지 샵에 갔는데 팔길래 사왔어요" 라고 대답했다.
이제는 디지털 카메라도 빈티지 시장에 파는 건가 하고 웃었다.
예전엔 별 것 아닌 일에 쉽게 감탄하고, 자주 흥분하고, 때론 분노했다.
모든 것에 반응을 너무 잘 해서, 매번이 '사춘기' 인게 아닌가 할 정도로.
한번은 말도 안되는 승객의 무리한 요구에 자주 흥분을 한 적이 있어서,
주니어 시절에 한 선배에게 그럴꺼면 그만두라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같은 상황을 맞아도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한다.
비상상황에도, 불합리한 요구에도
조금 더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이건 무뎌진 것이 아니라, 아끼는 법을 배운 것이다.
감정도, 말 한마디도 아끼는 법을 배웠다.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예전에는 동료의 작은 실수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며 조급했지만,
지금은 한 발짝 물러서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조용히 물 한 컵을 건네주는
내가 되었다.
어쩌면 ‘나이 들어감’이란
새로운 감정에 놀라는 일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래된 감정들과 더 오래 머무를 줄 아는 능력이 생기는 것일지도.
이제 나는 낯선 것보다 익숙한 것에 마음을 둔다.
가보지 못한 목적지보다, 함께 비행하는 사람의 표정을 더 챙기게 된다.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흐른다.
하지만 나는 내 속도대로,느릿하게 걷기로 했다.
아직도 나는 하늘을 난다.
다만, 더 천천히, 그리고 더 따뜻하게.
그건 나이 들어감이 아니라, 나로 더 성숙하게 익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