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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한테 학생이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by 플로리오 Mar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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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사례를 참고하여 재구성하였습니다. 등장인물과 사건은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는 데 혹시 전화 통화 가능할까요?”

갑작스러운 카톡 메시지에 잠시 망설였다.

여름이라는 학생이었다. 

'네'라고 답하자마자 전화가 왔고, 나는 순간 당황했다.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20년 넘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지만, 이런 부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얼마 전 취업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던 터라 더 의외였다.

집을 구해야 하는데 계약금이 부족하고, 부모님께 손 벌리기는 싫다는 것이었다.

6개월 안에 꼭 갚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부모님께 먼저 말하는 게 순서 아닌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 탓에 지금까지 빌려주고 받지 못했던 경험들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엄청 큰돈은 아니었지만, 한 번씩 생각이 나면 마음이 쓰리곤 했다. 마음은 이미 거절하고 있었지만, 입에서는 "안됩니다"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남편의 조언이 떠올랐다. 

"빌려준다고 결정했다면 그냥 준다고 생각해요. 받으면 감사하고, 못 받아도 괜찮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기도 해요." 받지 못하더라도 ’ 괜찮다 ‘는 안될 것 같았지만, ’ 여름이는 갚을 것이다’라고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여름이는 학교생활에서도 늘 긍정적이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학생이었다. 팀 프로젝트나 과제를 할 때 맡은 일은 끝까지 완벽하게 해내려 노력했고, 때로는 시간적 손해를 감수하며 친구들을 기꺼이 도와주었다. 3시간 연강을 할 때면 교탁 위에 따뜻한 음료를 올려놓기도 하고, 가끔 연구실로 찾아와 진로나 학업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학생이라 해도, 돈을 빌려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닌가?    


막상 내 입은 알겠다고 계좌번호를 보내라고 하고 있었지만 내 손은 보내주기 싫은 것처럼 떨면서 계좌이체를 했다. 여름이를 도운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기로 했지만, 과연 여름이가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되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여름이의 성실함과 책임감을 믿기로 했다.     


얼마 후, 여름이가 직접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의 눈에는 진심 어린 고마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교수님 덕분에 집 계약을 무사히 마쳤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꼭 갚겠습니다.”     


그 후로도 여름이는 종종 소식을 전해왔다. 직장 생활 전 공부도 하고,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꾸려나가고 있었다. 몇 달 후에는 타지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알려왔다.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여름이는 약속대로 돈을 모두 갚았다. 오히려 나는 괜히 미안해졌다. 힘들 때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순간이라도 망설였던 나 자신이. 동시에 약속을 지킨 여름이가 많이 고마웠다.   

         



그다음 해 겨울, 크리스마스 즈음에 여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시간을 내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곧바로 학교 근처 식당을 예약했다.   

  

함께 온 여자친구는 여름이만큼 성실하고 밝아 보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여름이는 이미 여자친구의 부모님께 인사드렸고, 자신의 부모님께도 인사드린 후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했다. 그들은 정말 잘 어울렸다. 그들을 보며 그들의 밝은 미래를 확신할 수 있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꿈을 응원해 주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식사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름이는 직장에서의 성과와 고충을 솔직하게 얘기하며 때로는 힘들지만, 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교수님의 믿음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제게 큰 힘이 되었어요.”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 여름이와 그의 여자친구는 나에게 작은 선물을 건넸다. 

몹시 찬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봄날처럼 한없이 따뜻했다.  

셋이서 함께한 따스하고 행복한 식사였다.     

    

돌아오는 길,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작은 등불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믿음의 빛으로 인해 우리 모두 조금씩 더 밝아질 수 있다는 것을. 

가끔은 약간의 망설임 속에서 내민 손이 누군가에게는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작은 믿음의 등불이 서로에게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때때로 예기치 못한 기쁨을 선물해 준다. 

그것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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