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겐팅 하이랜즈(Genting Highlands)에 다녀오다
여행 준비 - 나는 왜 이 무모한 여행에 진심이었나
내가 왜 이 무모한 여행에 진심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7년 전쯤 남편과 내가 라스베이거스를 갔을 때 사막과 카지노 외 아무것도 없는 이 황량한 도시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말레이시아 산 꼭대기에 위치한 겐팅 하이랜즈와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막연한 예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근본 없이 조악한 콘크리트로 난립해 있는 라스베이거스가 우리에게 편안하게 쉴 자리, 놀거리,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었듯 말이다.
겐팅 하이랜즈에 대해 처음 들어보았던 것도 라스베이거스를 다녀온 그즈음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라스베이거스가 의외로 무척 좋았다는 이야기를 지인에게 하자 자신이 지금까지 다녀본 카지노 중 가장 인상적인 카지노는 말레이시아 구름 위 카지노였다고 했다. 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그곳에 동화 같은 나라가 펼쳐진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는 참 세상에는 신기한 곳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미얀마로 오게 되었고, 미얀마에서 오랜 기간 정착하여 살고 있는 한인을 한분 만나게 되었다. 주로 휴가는 어디로 가냐는 나의 의례적인 질문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태국을 많이들 가지만 본인은 때때로 겐팅 하이랜즈에 간다고 했다. 카지노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산 꼭대기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놀고, 쉬고, 먹고 하기에는 최적화된 곳이라고.
그때 갑자기 7년 전 대화가 떠올랐다. 구름 위 카지노라는 곳이 겐팅 하이랜즈라는 곳이구나.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빛바랜 놀이동산이 산 위에 펼쳐져 있는 것이 어쩐지 쓸쓸하기도 하고, 정이 가기도 했다. 한번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징검다리 휴일이 있는 2월에 하루 휴가를 내고 3박 4일 일정으로 말레이시아를 향하는 항공권을 끊었다.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확신은 흐려졌다. 왜 겐팅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인지 스스로에게 드는 의문을 외면한 채 여행 준비를 했다. 세계 최대의 호텔이라며 7천 개 이상의 객실을 자랑하는 First World Hotel을 예약하려 보니 2박 중 1박만 예약이 가능하다는 안내문이 떴다. 그 많은 객실이 만실인 것이다. 일정이 임박한 것도 아니었고, 한 달 전쯤 예약을 시도했는데도 숙박부터 만만치 않다니. 산 꼭대기에 있는 호텔 중 가장 저렴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어 예약 가능한 1박만 먼저 예약하고, 나머지는 차차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출발 5일 전. 더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에 다시 First World Hotel을 검색해 보았는데 역시나 숙박이 가능한 객실이 없었다. 그런데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가 보았던 숙박 사이트에서 First World Hotel을 보았다. 예약이 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처음 예약했던 객실의 3배 가격으로 올라있었다. 약 170불 정도였다. 여행 날짜가 임박해 오고, 어디에서도 First World Hotel 예약이 가능한 사이트가 없었던지라 눈물을 머금고 예약버튼을 눌렀다. 내친김에 쿠알라룸푸르에서 묵게 될 마지막날 밤 숙소는 30불대 아주 저렴한 호텔로 예약했다.
첫째 날 - 겐팅으로 가는 길은 멀다
새벽 4시 50분. 아이를 깨웠다. 비행기가 아침 7시 반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피곤함보다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는 법. 무언가 즐거운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직감이 있었던지 눈을 번쩍 뜨고는 준비를 척척 한다. 이제 놀러 가는 새벽에 아이를 깨우는 일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다.
양곤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는 2시간 45분, 약 3시간이 걸렸다. 빨리도 일어났는데 1시간 반을 앞서 가는 시차까지 고려하니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 시간이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겐팅 하이랜드로 갈 버스를 탈 계획이었기 때문에 공항에서 중앙역으로 가야 했다.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그냥 택시를 탔으면 되었을 것을. 택시, 버스 타는 곳 안내와 함께 있던 공항철도 안내판으로 보니 공항에서 중앙역으로 곧장 간다는 안내가 되어있다. 비교적 합리적 가격에 빠르고 손쉽게 도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큰 고민 없이 공항철도 표를 끊었다. 아이는 나이가 어려 표값을 내지 않았고, 어른 둘에 110 링깃이었다. 링깃 단위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기차표를 사고도 정확히 얼마인지도 계산해보지 않았다. 아이와 기차에서 깜빡 졸았더니 어느새 중앙역에 도착해 있었다. 기차는 빠르고 쾌적했다. 40분 정도 걸린 듯했다. 나중에 이 공항철도 가격이 택시비의(어른 2명 기준) 1.5배 이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원통해했지만 그 기차 안에서 세상모르고 빠져들었던 단잠은 지금 생각해도 참 기분 좋은 것이었다.
대중교통에 오르고 내릴 일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여 미리 짐을 최소화하여 가져왔지만 아이와의 이동은 쉽지 않았다. 유모차와 작은 캐리어도 더운 동남아 지방에서는 더욱 크게 느껴지는 법. 공항 철도에서 내려 안내센터 직원의 안내에 따라 찾아가니 겐팅 가는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정류장은 지하에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버스들이 기다리고 있어 찾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표를 끊으러 가보니 3시 차가 가장 빠른 차라고 한다. 1시간 반 가량 시간이 남아 다행히 여유 있게 점심을 먹었다. 우리가 탔던 버스는 Resorts World Genting 고속버스. 한 열에 3석이 있는 고급버스였고, 성인 10링깃, 아이 7링깃으로 아주 쾌적했다. 하지만 4석 버스도 빈번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고, 조금 더 저렴해 보이긴 했지만 매표소가 분리되어 있어 별다른 고민 없이 버스표를 예약했다.
점심은 가까운 곳에 보이는 어설픈 한식당에 들어갔는데 다행히 아이가 좋아하는 고등어 구이가 있었다. 내가 시킨 비빔밥은 소스가 너무 많이 들어가 탓에 달고 짰지만 아이가 고등어구이를 잘 먹었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남편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복통과 감기몸살 기운을 호소하고 있었다. 놀러 갈 때 아프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남편이 가엾었지만 또 놀러 갈 때면 심심치 않게 아픈 남편에게 살짝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조금 아플 때의 얘기다. 버스를 타고, 1시간 만에 겐팅에 도착하였고, 블로그에서 일러준 대로 익스프레스로 케이블카를 끊어 기다리지 않고 20여분을 케이블카로 이동하여 드디어 First World Hotel 앞에 도착했을 때 남편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남편은 이미 설사로 화장실에 여러 번 다녀온 후였다. 길고 긴 케이블카로 부지런히 올라온 산꼭대기에 올라선 신기함도 느낄 새 없이 급하게 체크인 데스크를 찾았다.
빨리 호텔 체크인을 하고, 객실에서 쉬어야겠다는 남편의 말에 서둘러 self check-in 키오스크에 가서 체크인을 하는데 기계에서 자꾸 오류가 난다. 그 사이 아이는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고, 체크인 데스크 근처에 있는 작은 장난감 차를 타겠다고 떼를 썼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고는 남편에게 체크인을 맡기고 10여 분간 놀다 왔는데 웬걸 남편은 더 침울한 얼굴로 체크인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멀찍이 서 있는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참을 시도해 보더니 에러코드를 적은 작은 종이를 내밀고는 체크인 카운터를 가리키며 저기 가서 줄을 서란다. 줄은 이미 길었다. 여태 기다렸는데 또 줄을 서야 되냐고 따지듯 물었더니 그렇단다. 가서 보니 키오스크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줄을 서 있는 곳이었다. 서너 명의 직원들이 있었는데 대응이 느렸다. 다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니 감수해야 되는 것이었을까? 기다리는 시간이 30분이 넘어가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남편은 호텔 리뷰를 찾아보고는 체크인에 2시간 반 걸린 사람도 있다면서 껄껄 웃었다. 다행히(?) 한 시간을 기다려 체크인을 마쳤다. 무엇이 문제였냐고 물어보니 준비된 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헛웃음만 났다. 최악의 호텔이었다. 체크인만 했는데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었다.
기대도 없었지만 호텔에 들어서니 방이 휑했다. 최소한의 공간으로 만든 화장실과 침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더구나 단열이 안 되는 얇은 창으로는 찬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한이 있었던 남편은 추위에 이불을 감고 누웠는데 그래도 추워 보였다. 이불을 하나 추가해 달라고 카운터에 전화를 했더니 이불은 없고, 침대 깔개만 있다며 가져다주었다. 카운터에 전화가 안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깔개를 받은 것을 기대 이상이라고 해야 하나. First World Hotel 방을 생각하면 춥고 어두웠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샤워헤드는 부착형이어서 그날 아이 샤워는 시키지 않았다. 대충 짐정리를 하고 나니 어느새 7시 반이 지나고 있었고, 남편은 도저히 저녁을 먹으러 갈 컨디션이 아니라며 나와 아들만 저녁을 먹고 오랜다. 이 산꼭대기에 올라오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린 이 여행을 나는 왜 자신 있게 계획했던 걸까.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남편이 더 심해지면 산을 내려가는 게 나을까 그런 걱정을 하면서 식당가로 내려왔다.
First World Hotel은 겐팅 하이랜즈 안에 있는 곳이라 어딜 가나 접근성이 좋다. 엘리베이터만 타고 내려오면 실내 놀이공원, 식당가가 모두 연결된다. 큰 호텔이지만 호텔 구조가 복잡하지 않아 쉽게 객실을 찾을 수 있었다. 객실이 많이 불편하지만 또 이 특화된 접근성을 생각하면 왜 연일 매진인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식당을 전전하다 맘 편히 먹을 수 있는 푸드코트형 식당에 들어갔다. 별 기대 없이 시킨 숙주나물, 해초국, 닭구이 모두 맛있었다. 오렌지 주스를 시켰는데 너무 맛있어서 남편을 위해 하나 포장했다. 예상대로 남편은 오렌지 주스를 맛있게 먹었고, 그 대가로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했다. 아들과 나도 호텔에 바로 붙어 있는 실내 놀이기구 주변을 맴돌다가 남편과 함께 일찍 잠이 들었다. 방이 추워 여러 번 깨었는데 다행히 아이는 피곤했는지 세상모르고 잠을 잤다. 겐팅에 도착해서 체크인만 했는데 하루가 다 가버렸고, 남편까지 아프니 머릿속이 복잡한 밤이었다.
겐팅 하이랜즈의 대략적인 구조
겐팅 하이랜드는 규모가 어마어마했지만 생각보다는 구조가 복잡하지는 않았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버스를 타면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며, 케이블카 타는 곳과 아웃렛이 연결되어 있다. 케이블카가 딱 한번 서는데 친스윗 사원 정류장이다. 중간 기착지로 문을 잠깐 열어주는데 얼른 내리면 되는 시스템이다. 하이랜즈로 올라서면 모든 공간과 이어져 있어 안내를 따라 이동하면 된다. 이 지역 주변으로 크고 작은 카지노가 운영되고 있는 듯한데 메인 카지노는 SkyCasino와 Genting Casino 두 곳이다. 호텔은 우리가 묵은 First World Hotel 외 Genting Sky Worlds Hotel, Highlands Hotel, Resort Hotel 등이 있다. 모두 도보로 10분~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로 쇼핑몰을 통해 이동하면 된다.
둘째 날 - 아쉬움만 가득 안고
둘째 날도 남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호텔 조식을 애정해 마지않는 남편을 호텔에 남겨두고 느릿느릿 조식당으로 내려와 밥을 먹었다. 그 전날 최악의 체크인을 경험했던지라 이 호텔에 기대가 없었던 탓일까. 수천 명의 손님들을 수용하는 조식당 치고는 음식이 나쁘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먹을 죽, 계란 프라이, 약간의 반찬 등은 그럭저럭 잘 갖춰져 있었다. 밥을 먹고, 11시에 맞춰 체크아웃을 한 다음, 남편과 함께 미리 찾아두었던 호텔 옆 병원에 들렀다. 병원이라기보다는 동네 의원에 가까웠지만 중국계로 추정되는 여의사 선생님께서 남편의 상태를 꼼꼼하게 체크해 주셨다. 지금도 남편과 헛헛하게 웃으며 겐팅 하이랜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의사 선생님이라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진료비는 4만 원 정도. 한국에 비한다면야 정말 비싸지만 미얀마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병원에 한번 다녀오면 10만 원 이상이 드는데 익숙했던지라 의료보험도 없는 외국인을 위한 병원이 이 정도인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다행히 진료 결과, 가벼운 장염이었다.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일까. 남편은 병원에 다녀온 후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지긋지긋한 호텔이기는 하지만 체크인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체크인을 시도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다시 선 First World Hotel의 키오스크. 그런데 도와주던 직원이 의외의 말을 했다. 예약된 호텔이 이 호텔이 아니라는 말. 등골이 서늘했다. 나는 분명히 이 호텔에 이틀간 예약을 했는데 그렇다면 내가 예약한 호텔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자세히 보니 Genting Sky Worlds 호텔이었다. First World Hotel 매진이 떠서 여러 군데 찾아 헤맨 결과, 딱 한 군데에서 예약가능하여 서둘러 예약을 했었는데 이 호텔이 아니라 다른 호텔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새 호텔까지는 도보로 이동가능했고, 물어 물어 도착한 호텔은 딴 세상이었다. 일단 규모가 작고, 직원들이 친절했으며, 쾌적했다.
체크인을 하려고 Kiosk에 섰더니 직원이 데스크에서 우리를 불렀다. 도와주겠단다. 어느새 직원들의 친절이 어색했다. 예약은 잘 되어 있고, 아직 시간이 일러 방이 준비되지 않았으니 방이 준비되는 대로 문자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호텔에 짐을 맡기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어제 어기적 거리면서 보아 둔 대게집이 있었는데 다양한 죽이 있어 들어갔다. 음식값은 결코 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른, 아이, 환자가 먹기에 손색이 없었다. 알고 보니 말레이시아 내 꽤 유명한 체인점인 '時代 (Seafood Restaurant)'였다. 이후 쿠알라룸푸르를 돌아다니면서도 여러 번 보았으니 꽤 많은 체인점을 보유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점심을 먹고, 약도 챙겨 먹은 남편은 이제야 조금 원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체크인을 했더니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튼튼한 이층 침대에 최대 6명은 숙박이 가능할 것 같은 넓고 쾌적한 방이었다. 아이는 이미 신나 있었다. 이층 침대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즐겁게 놀던 아이는 어느새 잠이 오는 모양인지 계속 눈을 비벼댔다. 자의 반 타의 반 우리 가족은 어제 설쳤던 잠을 낮잠으로 대신했다. 한숨 잘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다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겐팅에서 한 일이라고는 체크인을 두 번 하고, 병원을 다녀왔으며, 끼니를 몇 번 해결했을 뿐인데 이미 이틀째 오후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채비를 하고, 실외 테마파크에 가보기로 했다. 큰 마음을 먹고 입장권을 끊으려 했는데 웬걸. 저녁 6시가 마감이라 이미 매표소는 문을 닫았다. 테마파크를 가 본들 아픈 남편과 몇 분을 걸어 다닐 수 있었겠냐만은 그래도 이 먼 곳까지 와서 본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힘이 쭉 빠졌다.
아쉬운 데로 실내 테마파크로 옮겨와 아들이 보고 싶어 하던 미니언즈 전시관을 구경했다. 입장료가 상당했다. 프로모션 기간이라 30% 정도 할인받아 약 4만 원 정도를 지불했다. 미니언즈를 배경으로 한 소소한 전시품들과 스케치들, 볼풀 게임 등이 잘 갖춰져 있었다. 다행히 어린 아들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잘 즐기고 놀았고, 급기야 나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2시간가량을 이곳에서 보내었다.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유아용 기차를 한번 타고는 기분이 좋아진 아이와 오락실에서 노닥거리다 호텔로 돌아왔다. 10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가운을 차린 남편은 그제야 아쉬움이 남았는지 슬쩍 카지노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12시 반 정도가 되자 남편이 돌아왔다. 나름 재미있었는데 모든 슬롯머신이 중국 스타일이라며 불평 아닌 불평을 했다. 그래도 3만 원 정도를 딴 모양이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쉬운 둘째 날도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셋째 날 - 다시 도심으로!
무슨 차이였을까. 냉난방 시설이 없는 것은 First World Hotel이나 Genting Sky Worlds Hotel이나 별 차이가 없었을 텐데 둘째 날 밤은 정말 따뜻하게 잘 잤다. 전날밤 사둔 볶음밥으로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쿠알라룸푸르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에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식당과 술집이 즐비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많이들 오는구나. 쿠알라룸푸르에 살면서 가볍게 놀러 오기 참 좋은 곳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케이블카를 탔다. 내려가는 케이블카에서 보는 광경도 장관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마지막까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산 능선이 완만한 것이 노령기인듯한 아름다운 산이었는데 케이블카가 다니는 경로를 중심으로 곳곳이 난개발 흔적이었다. 짓고 있는 것인지 짓다 만 것인지 모를 을씨년스러운 초고층 건물부터 직원들의 숙소로 추정되는 닭장보다 더 빽빽한 아파트, 수도관 공사가 한창이라 여기저기 파헤쳐진 공사 현장 등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 산꼭대기에 하나의 도시를 건설한다는 야심 찬 계획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대가 또한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을 하나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수만 명의 관광객 중 하나인 내 발자국을 빨리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셔틀버스는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7분 정도 늦었는데 그 시간을 만회하겠다는 생각이었는지 버스 기사는 버스를 거칠게 몰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쿠알라룸푸르에 도착. 간단히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먹고, 미리 예약해 둔 2층 관광버스를 탔다. 아이가 2층 버스를 타보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해서 야심 차게 기획한 계획이었다. 2층이 있는 버스를 좋아했지만 정작 2층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여 오랜 기간 1층에 머물렀다. 버스를 타고 새 공원을 들렀다가 도심에 있는 모스크에서도 내려 한 번씩 둘러볼 예정이었지만 언제나 계획은 계획일 뿐. 새 공원에 내려 자유롭게 공원을 돌아다니는 공작과 황새를 실컷 본 후 다시 버스를 기다렸으나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린 후 버스에 올랐을 때는 이미 앉을자리 없이 버스가 가득 차 있는 상황. 왜 버스가 이렇게 안 왔나 했더니 도심이 너무 막혀 엉금엉금 걸어가는 것을 보고 납득이 갔다. 모스크를 지나고 있었지만 이 버스를 타지 못하면 또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은 관광버스를 타고 막히는 구간을 빠져나갔다. 도심만 지나왔을 뿐인데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결국 새 공원을 오늘 첫 일정이자 마지막 일정으로 마무리하고, 숙소에 가서 체크인을 했다.
30불짜리 숙소. 30불 치고는 나쁘지 않았고, 그렇다고 30불 이상의 호텔은 아니었다. 쿠알라룸푸르 북쪽에 위치한 호텔이었는데 저가상품 딜이 떠서 얼른 예약을 하여 예약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름만 scholar's inn이 아니라 정말 학자들의 숙소였다. 말레이시아 기술대학교(UTMKL) 안에 있는 호텔이었고, 실제로 학생들로 추정되는 투숙객들이 많이 보였다. 직원들 또한 친절했고, 대학 캠퍼스의 안정되고, 활기찬 분위기가 전해와 나쁘지 않은 하룻밤이었다.
이번 말레이시아 여행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여행이었는데 여행 기간 내내 아팠던 남편은 더 억울했던 모양이다. 다행히 겐팅에서 처방받은 약이 잘 들어 마지막날 컨디션을 완연히 회복한 남편은 말레이시아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위한 식당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심 끝에 고른 "망치 식당" Gavel Coffee Kitchen Craft Beers. 결국 브루어리라고 검색해서 찾은 식당이란다. 여러모로 괜찮아 보여서 그랩 택시를 잡아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식당에는 서양 손님들이 곳곳에서 맥주와 안주를 시켜놓고 수다를 즐기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이라 거리 모습도 잘 보였는데 번화가는 아니었지만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이 보였다. 고즈넉하고 분위기 있는 거리였다. 스테이크와 그릭 샐러드를 시켰는데 음식이 훌륭했다. 특히, 그릭 샐러드가 그렇게 맛있을 일인가! 특별할 것 없는 재료들이 상큼한 소스와 함께 잘 어우러져 있었다. 맥주집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예상외로 맥주는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훌륭한 분위기와 음식 덕에 말레이시아에서의 아쉬운 시간을 그럭저럭 다독일 수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식당이 위치한 Medan Tuanku 역 근처가 쿠알라룸푸르의 상수동 같은 곳이란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여행 마지막날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그랩 택시
아침밥을 먹고 공항으로 향하는 길. 그랩 택시를 잡았다. 그동안 말레이시아에서 탔던 몇 번의 그랩 택시가 너무 속도를 내어 불안했지만 이번에는 여성 운전자로 낙찰. 남편은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물론 이 생각이 얼마나 뿌리 깊은 편견이었는지 머지않아 절실히 깨닫게 되었지만. 예쁜 미소를 가진 친절한 기사는 캐리어와 아이의 유모차를 조심스레 차에 실었다. 그리고는 속도를 점점 높여 갔다. 도심을 빠져나올 때는 차들이 많아 긴가민가했는데 공항으로 가는 뻥 뚫린 도로가 나오자 거침없는 질주가 시작되었다. 남편말로는 최고속도 90km/h인 도로에서 140을 밟고 있었다고 한다. 앞의 차가 없다면야 여기 운전 문화가 그러려니 생각했겠지만 앞에 차가 나타나면 바싹 붙어 위협 운전을 했다. 무서웠다.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데 이걸 지적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택시 승객이 되면 약자가 된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남편을 쳐다보았는데 남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단은 숨을 죽이고 레이스를 지켜보기로 했다. 히잡을 쓰고, 편안한 모습으로 운전하고 있는 기사를 보니 말을 붙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30여 분간의 레이스가 끝나고 다행히 차들이 막혔다. 교통체증이 이렇게 고마워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공항에 도착하고, 남편은 정중하게 (하지만 나에게 단호하게도 들렸는데) 속도가 너무 빨랐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것을 칭찬으로 이해했는지 활짝 웃으며 "Thank you"로 받는 이 천진한 아가씨를 어찌하면 좋을까. 어쨌든 목숨을 건 공항길을 거쳐 말레이시아 여행을 마무리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가득한 여행이었지만 겐팅이라는 곳에 가 보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련다. 아마 두 번은 가지 않을 것 같은 곳이라 작은 에피소드라도 깊이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쓴 별것 없는 여행기는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