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 도전, 상상
가을이 깊어간다. 알록달록한 풍경이 마음을 설레게 하고 발길을 옮기게 한다. 빨갛게 익어가는 나무를 보면서 자연의 오묘한 조화에 넋을 잃는다. 그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꿀을 찾아 모여드는 벌꿀 같다. 가을이면 전국 곳곳에 넘치는 단풍관람객들은 그 움직임 자체만으로 삶의 희망을 이어간다. 그만큼 자연을 가까이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 신비로움에 감탄하고 때로는 그 거대한 힘에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낀다.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하던 찰나의 감정이지만, 그 경험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각인되어 새로운 사유와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자연을 보면서 때로는 신비의 대상으로, 때로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또 이상낙원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겪은 삶의 경험 위에 상상을 더해왔다. 이렇듯 자연은 예술가들에게 가장 친근하면서도 깊은 사색의 주제가 되었고, 관람자는 그 그림을 통해 또 다른 시선으로 자연을 마주하게 된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터너, 앙리 루소 — 세 화가는 모두 자연을 주제로 삼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인간의 감정과 태도는 서로 다르다. 그들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자연의 압도적 아름다움과 두려움, 그리고 숭고함을 표현한 인간 내면의 기록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함부르크 미술관>는 화면 중앙에 인물을 놓고 자연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을 통해 거대하고 장엄한 자연의 변화를 드러낸다. 등을 돌린 채 서있는 인물은 안개 낀 산맥을 바라보고 있다. 관람자의 시선도 그와 함께 미지의 세계로 향한다. 발아래 놓인 구름과 산봉우리, 그리고 저 멀리 솟아오른 산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현실과 닮아 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지극히 작은 존재이고, 자연은 거대하게 보인다. 작가에게 자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인 공간이자 신성함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으로 그 앞에서 고요히 서 있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자연에 대한 예찬이다.
반면 터너의 <눈보라: 항구로 들어가는 증기선, 1842, 테이트 브리튼> 은 폭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긴박한 순간을 그렸다. 거센 눈보라가 배를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지만, 그 강렬한 빛과 색의 대비 속에는 희망의 기운이 숨어 있다. 증기선은 문명의 상징이지만,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에 불과해 보인다. 터너의 격렬한 붓터치는 자연의 파괴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이 그 속에서 도전하고 맞서려는 의지를 암시한다. 프리드리히가 자연을 경배의 대상으로 보았다면, 터너는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인간의지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앙리 루소의 <꿈, 1910, MoMA>을 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밀림 속에 전라의 여인이 소파에 누워 있고, 그 주변에는 코끼리·사자·새 등 이국적인 동물들이 가득하다. 그림 한쪽에는 피리를 부는 어두운 인물이 등장하며, 전체적으로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이 나신의 여인은 현실 속의 자아, 피리를 부는 인물은 꿈속의 자아로 보인다. 루소에게 자연은 위협이나 초월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상상의 무대였다. 그의 자연은 따뜻하고 평화롭고, 마치 꿈처럼 부드럽다.
세 작품을 함께 보면, 예술가들이 자연을 통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프리드리히의 자연은 경외의 대상으로 터너의 자연은 도전해야 할 힘으로 보았으며 루소의 자연은 마음속 평화로운 풍경이다. 즉,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경배하지만 맞서 싸워서 이겨낼 수 있는 존재로 그리고 인간 내면을 드러내는 존재로 인식했다. 세 화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은 더 이상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 안의 감정과 사유를 비추는 거울임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현실 속에 대입해 보자. 자연은 평화롭고 안정적인듯하지만 그 내면은 파괴되고 오염되고 있다. 자연을 신비의 대상으로 보며 한편으로는 착취와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 결과 우리는 매번 태풍과 폭설, 가뭄 등 자연의 힘에 굴복하는 회한을 남긴다. 정복과 경외심이 어우러질 때 우리의 삶도 자연과 함께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