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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혜 Feb 14. 2016

괴테를 아세요?

하나 빼고 다 가진 남자, 요한 볼프강 괴테 -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살면서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은 괴테하우스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일이었기에 성수기에는 매일 갔다. 처음에는 '너무 남아있는 게 없는 게 아닌가, 볼게 없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 게 사실. 하지만 괴테의 책을 읽고 괴테 삶을 알아갈수록 그의 매력에 마구 빠지게 됐고, 작가의 흔적이 남은 집에 매일 들낙거리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설레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하우스 전경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년). 괴테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다. 어쩌면 이름과 작품명이 친숙하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작품을 직접 읽어보진 않았어도 파우스트나 베르터, 괴테라는 이름은 대부분 알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괴테를 극찬했다. "이제껏 괴테만큼 높은 경지에 다다른 인간이 있었던가? 괴테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다." 괴테를 사랑한 사람은 니체만이 아니다. 헤겔, 쇼펜하우어, 토마스 만 등도 자신의 저서에서 괴테의 글을 인용했고, 모차르트, 슈만,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바그너, 말러도 괴테의 작품을 이용하거나 영감을 얻어 작곡했다.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 대문호라는 칭호가 따라다니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는 1749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태어나 26살 바이마르로 가기 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다. 대학을 다니느라 잠시 집을 떠났지만 그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집이 바로 프랑크푸르트의 괴테하우스다. 

괴테하우스 입구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을 보면 이 집과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재미있게, 마치 소설처럼 그려놨다. 태어나서부터 이십 대 후반까지의 생애를 60세에 썼다. 괴테도 서두에 소설적인 요소가 가미됐다고 써놓았으니 그려려니 하고 읽는 편이 좋겠다. 


괴테 하우스는 2차 세계대전 때 손상을 입어 1947~1951년에 복원했다. 1944년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에 가장 먼저 집의 치수를 모두 재고 가구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당시 괴테가 살던 모습과 흡사하게 복원을 마쳤지만 잘 살펴보면 다른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화장실이 없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관광객을 위해 화장실은 안 만들었어."라는 말도 안 되는 너스레를 떤다. 두 번째로는 침대가 없다.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하우스에는 침대까지 배치를 시켜놓았지만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는 그렇지 않았다. 공간이 협소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그대로 정말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전쟁에도 무너지지 않은 계단이다. 0층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처음 계단 4개는 그대로다. 괴테가 앉았던 자리가 있는 카페는 자릿세가 비싸다던데, 별도로 돈이 들지 않는 이 계단이 낫지 않을까. 


괴테하우스가 보관하는 인형극 무대


괴테의 할머니는 괴테가 4살 때 괴테와 그의 여동생 코르넬리아에게 크리스마스 저녁, 인형극을 보여주며 무대도 함께 선물했다. 예상하다시피 괴테의 친가는 잘 사는 집이었다. 외식업과 호텔업을 하며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유력한 자산가였다. 지금까지 보존되는 괴테의 집을 구매한 사람도 괴테의 할머니다. 괴테의 외가도 만만치 않았다. 괴테의 외할아버지는 프랑크푸르트의 시장으로, 시민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계층에 속하는 가문이었다. 


괴테의 집 곳곳에는 괴테가 어린 시절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티가 나는 물건들이 많다. 방문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살림살이는 빨래 압착기다. 이불보와 침대보를 착착 넣어 한꺼번에 주름을 펴는 데 사용됐다. 이불보와 침대보가 144벌이나 됐으니 괴테 집에서 일했던 3명의 하인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 같다. 이불보의 수는 당시에 재력을 나타냈고 괴테 집은 일 년에 3번 몰아서 이불 빨래를 했다.


빨래압착기
베이징룸

이불보만 많았던 건 아니다. 괴테 아버지는 서재에 약 2,000권의 값진 책을 소장했다. 괴테 하우스 도서관에 따로 보관돼있다. 법률 서적과 신학 서적 외에도 고대에서 괴테가 살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서적이 있다. 로마 시대 미술에 관한 책과 이탈리아 서적들도 빠지지 않았고 여행기도 있다. 괴테도 이에 지지 않고 이후 바이마르에서 생활할 때 자신의 서재에 6,000권의 책을 두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5년 전 광화문 한 빌딩 글판에 괴테의 말이 각색돼 붙었다.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서재


가족의 든든한 지원 속에 자란 그이지만 그가 늘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14살, 그에게도 아픈 시련이 찾아오니 다름 아닌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은 그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프랑크푸르트의 한 식당에서 만난 첫사랑 그레트헨을 시작으로, 72세 노장이 되어 만난 울리케까지 나이와 상관없이 사랑을 놓지 않았다. 만났던 사람 수가 많긴 하지만 그보다는 사랑할 때나 사랑 때문에 괴로울 때나 그 감정과 상황을 작품으로 남겼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더 주목받는다. 

괴테 하우스에서도 사랑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가 글을 썼던 방문 옆에는 하나의 실루엣이 걸려있다. 실루엣의 주인공은 샤를 로테 부프다. 괴테가 이 방에 살 때도 같은 자리에 걸려 있었다.


샤를 로테 부프의 실루엣


샤를 로테 부프는 그가 베츨라에서 법관 시보로 일할 때 알게 된 여인이다. 그녀의 자상함에 반했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로테를 향한 사랑에 괴테는 힘들어하며 프랑크푸르트 부모님 집으로 돌아온다. 고백도 해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괴테에게 때마침 들려온 소식은 친구의 아내를 사랑했던 예루살렘이란 사람의 자살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괴테는 꿈에서 깬 듯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친구의 방문까지 끊고 소설을 위한 정보들을 수집한다. 본인의 생활과 마음도 다시 한 번 돌이켜보며 소설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펜을 든 지 4주 만에 소설은 완성된다. 다른 구상 없이, 어떤 한 부분 미리 써놓지 않은 채 그렇게 써 내려간 소설이 젊은 베르터의 슬픔이다. 


그는 "나는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체험한 것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 속에는 그가 살았던  배경뿐 아니라 만났던 인물들, 보았던  자연환경, 들었던 이야기들, 세세한 경험과 생각이 모두 녹아있다. 소설 젊은 베르터의 슬픔 속 베르터가 사랑한 여인의 이름도 샤를 로테이다. 그래서인지 젊은 베르터의 슬픔을 쓴 방에 걸려 있는 샤를 로테의 실루엣은 괜히 아련하게 느껴진다. 비록 그는 힘들었던 사랑을 소설로써 모두 털어냈다고 했지만 말이다. 그는 사랑으로 힘들었지만 이 소설은 괴테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1772년 23살 젊은 베르터의 슬픔으로 무명작가였던 괴테는 단숨에 유럽 전역에서 유명해진다. 이후 4년 뒤 바이마르 공국의 공작이 추밀고문관으로 그를 임명하며 정치에도 참여한다. 독자들은 소설에 감동했으며 사람들은 베르터의 옷차림과 행동을 따라 했다.


시인의 방 (프랑크푸르트 괴테 하우스에 있는 시인의 방이다.  희곡 괴츠 폰 베링힝엔(1771년)과 60년에 걸친 대작, 파우스트의 집필을 시작(1773년)했다.


괴테는 자신의 삶을 세 단어로 표현한다. '사랑했노라 괴로워했노라 배웠노라.' 

그는 7년 전쟁,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의 점령기와 몰락을 겪었다.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로맨티시스트로 끊임없이 사랑하고 시를 쓰고 편지를 보냈다. 사랑을 통해 아파하고 배움을 갈구하며 고민했던 괴테. 

아직 그의 글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자꾸 정이 가는 건, 사랑으로 상처받고 아름다운 것에는 끝도 없이 감탄하던 그의 인간적인 모습 때문 아닐까 싶다. 


캄파냐에 있는 괴테 (요한 하인리히 티쉬바인이 1787년 그린 괴테의 초상화. 현재 프랑크푸르트 슈테델미술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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