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부두애 Mar 19. 2021

오늘도 잘 버텼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

내일의 괴로움은 내일이 해주겠지!

'아, 이런 일까지... 하여튼 간!'

갑작스럽게 날아온 카톡.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업무가 주어집니다. 답장 끝에 늘 붙이던 '~!' 같은 미사여구 없이 '네'라고 짤막하게 대답합니다. 나고 짜증 나지만 싫은 내색조차 쉽지 않은 게 직장인의 생리인지라 소심하게 반항해봅니다. 이어진 회의 자리에서도 그냥 말없이 듣기만 하고 있습니다. 평소였으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습니다'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저같이 미천한 일개 직원이 모든 것을 본인 위주로 세팅하는 폭풍 같은 상사에게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물론 그는 제가 이렇게 보이콧하고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할 겁니다.


최근 <유퀴즈>에 나온 배우 진기주 씨가 화제입니다. 삼성에 공채로 입사한 것도 대단하지만 한 점 미련 없이 멋지게 퇴사한 그녀의 용기에, 또 그렇게 본인의 길을 걷다 자신만의 시간을 만나고 있는 그녀의 삶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나온 작품을 보지 않아서 어떤 연기력을 갖추고 있는지, 어떤 배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녀가 갖고 있는 인생의 깊이 어느 누구 못지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진기주 씨가 더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진기주 씨의 팬이 되어버렸네요.


진기주 씨는 말미에 이런 말을 던집니다.
"거쳐온 그 어떤 직업보다 가장 불안하고 상처도 많이 받고 그렇긴 한데요. 그냥... 흥미로워서 좋아요"

와... 그 멘트에 살짝 눈물이 핑 돌 뻔했습니다. 안정적이지도 않고 자존감도 많이 깎이는데 행복하다니, 그녀가 무척 멋있었고 부러웠습니다. 이 역설적인 이야기를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침대에서 좀만 더 누워있자는 마음의 속삭임을 겨우 뿌리치고 비몽사몽 집을 나왔습니다. 지하철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사람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겠는데 사람에 치여 더 죽겠습니다.


아니 사실 알고 보면 치이고 있는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하고 싶은 일들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들을 쳐내기 위해 뻗는 발걸음들.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야만 하는 일들만 하기에는 회칠한 시멘트 같이 너무 딱딱하고 무미건조해 보입니다.


왜 나는 진기주 씨처럼 살 수 없을까.

그런 용기가 없는 건지.

그만큼 내 삶의 무게가 무거운 건지.

어째서 누군가의 그림자로만 살아가야 하는 건지. 그렇다고 현실을 내팽개칠 수도 없으니 그림자라도 다행인 건가. 

진기주 씨도 무작정 꿈을 좇으라는 그런 어쭙잖은 이야기를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여러 생각이 돌고 돌아 지구 한 바퀴를 돌았을 쯤. '오늘의 퇴근'에 생각이 머물렀고,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래, 내일의 괴로움은 내일 하자'


퇴근길, 노점에 꽃을 팝니다.

아내 생각에 하나 살까 하다가 집놓을 곳 없으면 사 오지 말라는 얘기가 생각나서 도로 내려놓습니다.

그 꽃내음 하나는 무척 마음에 듭니다.

촉촉한 감성과 말랑한 마음을 놓고 싶지 않아 부단히 애쓰고 있는 제게

오늘도 하루의 무게를 지고 갈 생각에 몇 겹의 두꺼운 껍데기를 감싸고 있는 제게 

바람을 타고 오는 꽃내음의 달콤함이 머리를 상쾌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 오늘도 잘 버텼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쉽게 하지 않는, 가볍지만 또 무게감 있는 그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건넵니다.

이내 발걸음을 지하철로 옮기자 코 끝에는 꽃 내음이 사라져 가지만 마음은 훨씬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비록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마지못해 따라가야 하는 그런 그림자 같은 삶이지만, 이렇게 오늘도 잘 버텼다는 기분이 드는 지금,


저도 지금 이 순간이 좋습니다. 진기주 씨의 '행복하다'는 그 말처럼 말이죠.

작가의 이전글 "많이 느끼고 적게 생각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