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단 지옥을 탈출하자!
우리 엄마의 유일한 손녀는 내 딸이다. 손자 세 명에 손녀 하나. 손자들에게 볼 수 없는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에 항상 기대에 차서 물어보신다. "오늘은 학교에서 무슨 일 없었대?"
요즘 구구단 외우기와 받아쓰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알려드렸다. 2, 3, 4, 5, 6단까지 배우고 외우는 과정이 아이 속도에 비해 빠르고, 항상 허덕이는 것이 느껴져서 안타까울 지경이라고. 어느 집들은 넘버블럭스를 많이 봐서 그런 것쯤이야 그냥 된다고들 하던데 우리집에서는 아무 효과가 없다. 2씩 더하고, 3씩 더해서 순서대로 숫자를 잘 쓰는 수준에 이르렀긴 했지만 마구잡이로 물어봤을 때 답이 탁탁 나오게 연습시켜달라고 하시는 선생님 수준에는 못 미친다.
나 : 삼육?
딸 : 구!!!
당당한 9, 뱃속부터 힘을 끌어올려 시원하게 내뱉는 9, 칭찬을 기대하며 웃음 가득 머금은 9. 하아.... 369369 게임과 헷갈리는 중이다...
외할머니의 손이 바빠진다. 추석이고 뭐고, 음식 따윈 관심조차 없다. 손녀딸의 구구단 탈출을 위해 종이를 내놓으라 한다. 달력 큰~~~거 어디 있냐고. 손녀는 왠지 불안하다. 할머니가 어쩐지 수상하다. 할머니가 찾는 것은 왠지 없어야 할 것 같아서 크게 외친다. "우리집엔 달력 큰 거 없어요!!!"
외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달력이 없으면 흰 종이를 가져오라 하고 펜을 달라고 한다. "할머니 뭐 하시게요?" 큰 아이가 할머니 의중을 떠본다. "크게 구구단을 써줄려고!" 큰 아이는 프린트하면 안 되겠냐고 하지만 할머니는 크!게! 써야 한다고 했다. 써붙여야 한다고 했다. 둘째는 계속 눈웃음을 지으며 "에이 할머니이이이이~~~ 안 써도 돼요오오오오~~~!" 애교를 섞어보지만 슬픈 예감은 맞아 들고야 만다. 할머니가 구구단을 쓰신다. 열심히 쓰신다.
순식간에 2단부터 9단까지 써 내려간 할머니, 종이가 빼곡해질수록 둘째의 몸이 배배 꼬인다. 한숨이 깊어진다. 나는 할머니를 좋아하는데, 우리 할머니가 왜 이러시지... 선생님은 6단까지 연습해 오라고 하셨는데 9단까지 쓰셨네...
"봐봐, 비둘기가 뭐라그래? 구구 구구 그러지? 구구는 팔십일이야! 비둘기를 생각해!" 할머니의 비둘기 구구단에 둘째는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잘 가르치는 사람인지 나는 여태 몰랐다. 나는 어렸을 때 혼자 재능수학을 풀었던 것 같은데... 내가 사회 잘 외웠나 좀 물어봐달라 하면 "공부는 혼자 하는 거야." 하며 책을 밀어내더니 손녀딸의 구구단은 기필코 해내야 할 목표가 되었나 보다. 구구단은 손녀의 자신감, 자존감, 이 모든 걸 끌어올리는데 한몫할 테니, 미국 다녀와서 어리버리한 한국 학교 생활 청산하려면 구구단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할머니는 흔들림이 없다! 6단까지 복습한다고? 안돼, 9단까지 가자!!!
둘째는 종이를 받아 들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짝이 어쩐지 슬퍼 보인다. 왼쪽으로 삐끗 기운 고개, 구구단이 들어가서 무거워졌니?
이 아이 마음속에서는 어떤 말들이 용솟음치고 있을까? '에잇, 식탁 다리에 붙여버려? 그러다 잘못 뜯었다고 하면서 찢어버려? 으 숫자 싫은데!!! 비둘기는 좀 웃기긴 하네. 구구팔십일. 우리 할머니가 수상하다... 이러지 않으셨는데... 이놈의 구구단... 싫다 싫어!'
그래도 구구 팔십일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다. 다시 한번 아주 당당하게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나 9단도 알아! 제일 어려운 거! 구구 팔 씹 일! 맞지? 나 잘하지?" 힘주어 말하는 딸내미의 팔 씹 일! 그래 맞아, 딩동댕! 잘했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선생님이 놀래시겠네! 구구팔십일을 벌써 알아버려서!!! 그나저나 삼육에 십팔이야, 구가 아니고 응? 딸아? 제발? 응? 삼육구랑 다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