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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쓰기] 13. 쓰고 싶지만 참기

2025.9.27

by 엄마다람쥐

어제 쓰고 싶은 이야기가 두 가지 있었다. 아니 세 가지. 하지만 쓰지 않고 참았다. 오늘 아침에 쓰려고! 하하하 나의 계획은 야심 찼다. 야심까지 말할 것 뭐 있나 싶지만 그래도 쓰고 싶은데 메모도 안 하고,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건 굉장하다. 왜냐하면 깜빡거리는 나의 뇌가 그 이야기를 밤새 기억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고, 믿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그 글이 머릿속에 있느냐? 있다! 브라보!

글쓰기를 참아볼 만하다. 글자들이 나를 깨웠다. 토요일 아침인데 7시 전에 일어나다니 기적 같은 일이다. 알람도 안 맞췄고, 토요일이니 늦잠 10시까지 자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일어나다니! 애들도 엄마 자면 안 깨우고 더 자라고 두는 나이가 되었는데 스스로 일어나 책상에 앉는 새 나라의 아줌마가 되었다. 자고 있는데 기어이 나를 깨우는 상황이 되면 그렇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났었다. 잠 좀 자자고. 나를 냅 둬! 정말! 하며 미간이 찌푸려지는 일이 잦았었다. 내 의지에 의해 일어나도 더 자고 싶어서 기분이 맹하고, 또 아침이니, 날은 왜 이렇게 빨리 새는 거니 하며 가슴이 답답했었다. 저번 주는 눈 뜨자마자 써야 하는 글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고, 이번 주는 그 증상이 사라졌다. 약간 기분 좋게 일어났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 중 어떤 것부터 쓸까 생각하면서 잠이 깼다. 꿈도 분명 꿨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겼다. 꿈 생각이 전혀 나질 않는다. 내 기억력이 이겼다! 나의 뇌가 살아있구나! 유후! 멍텅구리가 된 게 아니었어! 애 둘 낳고 바보 된 거 아니냐 하는 뉘앙스로 "예전만큼 아니네?" 하던 나의 지도 교수님. 저기요, 말을 마세요. 그냥 엄마가 되고 있고, 챙길 게 많구나. 논문 생각할 시간이 없구나 하거나 아니면 속으로만 생각하고 참으셨더라면 이 글에 등장하지 않으셨을 텐데 오늘 뇌 이야기하다가 당첨되셨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들이 해외 대학을 갔다고 하셨다. 한 번 더. 말을 마세요. 그런 건 엄마가 다 챙겼을 거예요. 엄마가. 엄마라는 사람들이 왜 정신이 없는지 여태 모르시네요.

정말이지 오늘 아침 내가 좀 총명해진 느낌이다. 수험생들 총명탕을 먹인다고 하던데 어제 필라테스 마치고 섞어 마신 써머스비와 매실이 나의 총명탕인가? 사과 주스 맛이 나는 술을 좋아하는데 한 번에 다 마실 수 없어서 물병에 담고 꼭 잠가두었더니 탄산이 거의 빠지지 않았다. 한 컵도 채 되지 않아서 매실액을 넣고 얼음을 듬뿍 담아서 천천히 마셨다. 인문학 향기 줌 강의를 들으면서. 죄송해요 작가님들, 음주 청강을 하였습니다. 얼굴 벌게지면 안 되니까 한 모금씩 마시다가 2부 될 쯤에는 마구 마셨다. 아 시원해. 다행히 줌 화면 속 내 얼굴은 색이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말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참았는가 하면 시 필사집을 샀다는 말이다. 하하하 책 한 권 산 이야기로 30분을 쓰려고 했단 말인가? 그렇다. 나는 용감해지기도 했다. 글감 뭐라도 있으면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이렇게 쓰고도 자신감이라는 둥 용감하다는 둥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지경이다. 둘째 딸이 "육사" 하면 "삼십팔!" 하며 근처에도 없는 숫자를 아주 당당하게, 눈을 똥그랗게 뜨고, 쩌렁쩌렁 귀가 울리는 소리로 말하는데 어쩔 수 없다. 나를 닮았나 보다. 내가 딱 딸내미의 모습이다. 그래 내가 낳은 내 딸이다.

<시로 채우는 내 마음 필사노트>를 서점에서 봤다. 시가 고픈 나에게 시를 채워줄 것 같아서 단박에 눈길이 갔는데 '황인찬 외 지음' 황인찬 이름 세 글자가 들어왔다. 이우성 시인의 시집을 필사하면서 아 이우성 시인, 무슨 말을 하냐고요, 당신 누구세요 하며 시인이 너무 궁금해졌었다. 나의 하찮은 시 이해력 때문인데 또 내 딸처럼 당당하게 "이 사람 누구야?" 하며 뒷조사를 시작했었다. 뒷조사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가 선 보라고 했을 때 이름과 이력을 바탕으로 남편 뒷조사를 먼저 시작했고 얼굴을 미리 찾아낼 만큼 나의 수사력은 뛰어나다. 큰일이네, 나의 자뻑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아무튼 뒷조사 덕분에 이우성 시인의 여러 작품을 알게 되었고, 나 혼자 시인과 굉장히 친해졌다. 미남의 나라에서 왔다며 자신을 미남으로 칭하는 시인. 나보다 자뻑이 더 심하다. 이우성 시인 덕분에 알게 된 시인이 황인찬 시인이다. 인찬이가 쓴 시를 보면 아 어떻게 저런 글을 쓰지 하며 부러웠다고 했다. 그리고 잘 나가는 시인이 되었다고. 약간 이우성 팬심이 생긴 터라 "황인찬? 그게 누군데? 한 번 읽어보지!" 하며 황인찬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책을 빌리고, 상호대차 신청해서 읽었다. 시인들은 일부러 이렇게 어렵게 쓰나? 잘 나가는 시인이라며, 더 어렵다. 와닿는 게 없다. 전혀 모르겠다.

황인찬이라는 이름은 여기저기서 보였다. ㅎ으로 시작하는 이름이니 시집을 엮을 때 맨 뒤에 실려야 하는데 맨 앞 장에 실려있다. 공저 책에도 '황인찬 외'로 반짝이는 그 이름으로 시작한다. 역시 시인도 잘 나가고 볼 일이다. 서점에서 집어 들고 얼른 시인 이름을 훑어봤다. 최근에 읽은 정끝별 시인도 보인다. 김용택 시인도 보이고. 자 이응으로 가자. 이응 이응 이우성 있냐 없냐. 없네... 쩝. 이시영과 이장욱 사이에 딱 있어야지 없네. 내려 두고 왔다. 서점 주인도 밥 하러 서점 저 뒤편으로 가서 한참 나오질 않아서 그냥 두고 왔다. 벨을 눌러달라는 표시를 올려두고 뒤로 갔는데 그 벨을 누르고 싶지 않았다. 밥 할 때는 밥에 집중해야 하고, 밥 먹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건드리는 거 아니다.

그래도 자꾸 책이 떠올랐다. 황인찬 외라는 글씨와 함께. 매일 내 노트에 필사하고 있지만 그 책이 갖고 싶었다. 그래 한 권 사자! 적어두고 다시 보고, 예쁜 책에 필사하며 글씨도 더 예쁘게 쓰겠지? 다시 봐도 예쁘겠지? 마침 사려고 했던 호프맨 작가님 책도 있으니 같이 사자. 공저 시집을 시작으로 인문학 향기 충전소에서 하는 나는 누구인가 글쓰기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시와 글쓰기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재밌고, 더 쓰고 싶고, 더 읽고 싶다. 정말이다. 내가 똑똑해지고 있는 게 확실하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아이큐 검사를 했었다. 100. 그 점수를 보고 내 옆에 있던 친구들이 그랬다. "어머, 쟤는 좀 바보인가 봐. 나는 113인데.", "100 밖에 아니래? 나는 120인데." 응??? 바보라고? 그때 그 말이 적잖이 충격이었나 보다. 많이 충격이었나 보다. 그걸 여태껏 기억하고 있다. 그 장면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부터 내가 바보인 줄 알고, 남들보다 더 많이 애쓰며 노력해야 남들만큼이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진장 나를 괴롭히며 잘하려고 애썼다.

그때도 글쓰기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런저런 걱정과 놀라움, 충격을 다 글로 표현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나 자신을 단 한 번도 똑똑하다 느낀 적 없었고, 이 모든 건 나의 노력의 결실이라고 하며 살았는데, 그냥 처음부터 "나 똑똑해. 근데 노력도 하거든. 그래서 나는 잘할 수밖에 없어!"라고 생각했더라면 어땠을까? 혹시 내가 정말 바보인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을 떨칠 수 있지 않았을까? 글을 쓰다 보면 자기 성찰이 된다고 하던데 지금이 그 순간인 것 같다. 어린 나를 토닥여주고 싶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큐 검사 그거? 그거 뭐! 종이 떼기야. 종이 떼기가 너 바보래? 친구들이 바보래? 됐다 그래. 누가 바보야? 너 바보 아니야! 너는 바보가 아니라고! 스말트 하다고 스말트! 스마트보다 더 똑똑한 거! 스마알트! 영어 발음도 잘하는 똑똑이라고!!!

글쓰기가 참 좋다. 한 알 먹어도 안 먹어도 효과 전혀 모르겠는 비타민보다 글 쓰는 게 훨씬 효과가 좋다. 어머니들, 총명탕 찾지 마시고 애들 글 쓰라고 해보세요. 이거 너무 좋네요. 40도 넘은 아줌마가 총명해지고 있어요. 머리만 좋아지는 게 아니에요. 기분이 좋아지고요, 아침에 누가 안 깨워도 일어나요. 어머니들도 써보세요. 이 노무 자식이 오늘도 안 일어난다로 시작해서 써보세요. 마지막엔 그래도 내 새끼인데 보듬어줘야지 하며 사랑이 솟아날 거예요. 내일도 쓰고, 모레도 쓰세요. 저도 쓸 거예요. 씁시다. 새마을 글쓰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정말로 내일도 쓴다. 참은 이야기 한 가지밖에 못했으니 아직 할 이야기가 두 개나 남았으니 써야 한다.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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