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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Jun 07. 2023

[편지]모나코에서 죽어버린 연인

너에게 쓰는 편지

너 말이야, 혹시 섹스 앤 더시티란 미드 알아? 워낙 유명하니 본 적은 없어도 이름은 들어봤겠지?  

그 시절 내 또래들이 그러하듯 나도 제법 열심히 봤지. 인생드라마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닌데, 꽤나 진심으로 설레었던 에피소드가 있어.

시즌4의 '아이러브뉴욕'이라는 제목의 에피소드야. 여름이 멀어지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선선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의 밤에 괜스레 잠들지 못한 캐리가 빅에게 전화를 걸어. 아! 캐리는 여주인공이고 빅은 썸남 정도랄까?

"지금 뭐 해?"라고 캐리가 말해.
"오, 내가 생각하는 사람 맞아?" 빅이 대답하지.

"누굴 생각했는데?"
"모나코 왕비"
"그 여잔 죽었어."
"그래서 놀랬다는 거지."


이것 봐. 너무 멋지지 않아?

이 대화가 너무 좋아서 재방송은 물론 재방의 재방까지 모조리 챙겨보며 베개를 꼭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굴렸던 기억이 있어. 저렇게 설레면서 능청스러운 티카타카가 왜 요즘 드라마엔 없는 걸까.

한동안  에피소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온도를 지닌 계절이 되어 그에 어울리는 바람이 부는 밤이면  또한 모나코에 두고  연인을 떠올리듯 누군가를 한없이 그리워하곤 했어. 그렇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런 감정들이 가당키나 했겠어, 그때의 나한테?

난 꽤 오랫동안 백수였어. 동생들이 먼저 시집 장가를 가 버린 채 30살이 되었을 땐 그야말로 집안의 골칫덩어리가 되고 말았지. 어딜 가든 잔뜩 주눅 들어 있었어. 소금에 절여진 채 한대 쥐어 박힌 표정으로 쭈굴쭈굴하기만 했다고, 그땐, 내가.

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도를 아십니까?"를 묻던 청년이라든지, 도서관 책상에 자리 많이 잡아두지 말라는 경고를(아는 언니가 늘 늦잠을 잤기에 내가 미리 자리를 잡아뒀거든) 하던 열람실의 누군가 정도뿐이었어.

있잖아. 그래서 말이지. 그땐, 난 정말로 네가 한 300년쯤 전에 모나코에서 죽어버렸고 그게 끝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 무렵 내 여름은 온통 고추장아찌 같기만 했어. 모나코에서 죽어버린 연인을 다시 만나려고 태어난 건데 온통 맵고 짜고 쭈글쭈글 눈물이 나기만 해서 맙소사! 이번 생은 텄구나, 완전히 체념한 채 살고 있었다고.


그러다가 33살의 여름이 되었고 너를 만났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라? 넌 300년 전에 모나코에서 본 앤데? 느낌이 빡! 왔지. 고추장아찌 같기만 했던 여름이 진짜 여름이 되는 순간이었어.  

물론, 뭐, 너도 꽤 만만치 않은 상대긴 했기에 조금쯤은 여전히 고추장아찌 같긴 했지만 모나코에서 죽어버린 후 300년을 기다려 겨우 만나게 된 연인이니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맘으로 버텼지. 아무렴. 어쨌든 네 덕분에 더 이상 고추장아찌 같기만 한 여름은 아니게 되었어. 넌 300년 동안 뭘 하다가 이제서야 나타난 걸까. 그 여름 내내 너를 궁금해했지. 


요즘 여름 이야기 많이 하지? 실은, 어제 에어컨 청소를 예약하려다가 생각이 여기까지 와버렸네. 올여름은 무지 더울 거래. 근데 그건 매년 여름만 되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 같아. 올여름은 역대급 더위라는 으름장 같은 거 말이야.

올해도 여전히 역대급 폭염이 예상된다고 하고 난 그저 그 더위 속에 녹아내린 채 멍하니 300년 전 모나코에 있던 너를 상상해 볼까 해. 300년 전에도 더위는 여전히 역대급 더위였을까. 아이스아메리카노도, 맥주도 없이 넌 그 여름을 뭘로 버텨내고 있었을까. 이런 생각들이나 하며 가만히 300년 전 더위 속으로 잠겨볼까 해. 그러다 너무 더워지면 잠시 후다닥 튀어나와 네 손을 잡고선 300년 전엔 먹지 못 했던 팥빙수나 먹으러 가지 뭐. 냠냠.

 

추신. 아! 너 며칠 전에 내가 유튜브로 전생체험 하고 있는데 괜히 들어와서 방해했지? 우씨... 또 그러기만 해 봐. 나 이번엔 진짜로 거의 전생 들판까지 갔었다고. 그 들판이 아마도 모나코였던 것 같단 말이야.


추신 2. 어쨌든 난 다음 생엔 모나코 왕족으로 태어날 계획이야. 그레이스 켈리의 후손이 되는 거지. 너는 나를 보자마자 아마 한눈에 반할걸?! 네가 이번 생에 나를 10번도 넘게 찼으니까 다음 생엔 내가 너를 20번쯤 차버릴 거야. 후훗! 너 이제 어쩔래? 어디 한번 최선을 다 해봐. 혹시 아니? 너 하는 거 봐서 내가 좀 줄여줄지.


 추신 3. 만약에 또 이번 생에서처럼 굴면...... 왕족들만 쓰는 지하 감옥(..... 그런 거 있지 않을까?)에 가둬버릴 거야.


#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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