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 여행은 총 8박 9일의 일정이었다.
부산-마닐라-카티클란의 여정으로 마닐라에서 아주 짧은 1박을 보냈고 마지막 날은 눈을 뜨자마자 공항으로 가야 했기에 실제로 보라카이에 있었던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나름 긴 시간들이라 생각했기에 출발 전에 액티비티를 꽤나 예약하고 갔었다. 스스투어, 두 번의 호핑, 씨워킹, 제트스키, 패러세일링, 스쿠버다이빙
이건 뭐지? 안 해 봤으니 해볼까? 어머, 후기가 엄청 좋네? 지금 아니면 언제 해 보겠어?
이런 식으로 하나둘씩 추가된 것이다. 나름 일정이 기니까 충분히 여유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일주일 중 이틀을 아들의 컨디션 난조로 숙소에만 있었기에 호핑 프로그램 한 가지는 끝내 참여하지 못했고 나머지 일정들도 제법 빡빡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현지에서 직접 흥정하여 체험했던 선셋세일링이 너무나도 좋았기에 그걸 두 번이나 했었고 이런저런 이유들로 생각했던 것보다 여유로운 일정은 아니었다.
"이번에 다 해봤으니 다음에 가면 호핑이랑 선셋세일링만 하자. 아! 말룸파티는 한번 해 볼까? 호핑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그건 꼭 하라고 했어. 엄청 신난대. 나머지 시간은 그냥 해변이랑 수영장에서 놀아야지."
"나도 이제는 어떻게 놀아야 할지 알 것 같아.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바다에만 들어가도 충분해. 다시 가면 숙소 수영장에서 산미구엘 애플이랑 망고쉐이크를 잔뜩 먹으면서 놀다가 낮잠 잘 거야. 자다 깨면 책 좀 읽다가 다시 산미구엘 마실 거고 술 깨면 해질 무렵에 바다에 들어갈 거야. 아, 선셋세일링은 할 수 있으면 매일 할까?"
집에 돌아온 후 남편과 내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제는 좀 알 것 같으니 다시 가자고. 우리는 그냥 그곳에 있기만 해도 충분했다고.
보라카이에는 현지 한인들이 운영하는 투어업체가 아주 많다. 호핑을 검색한 후 주로 등장하는 업체 몇 개를 골라 후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업체를 고르는 나만의 기준이 있었는데 우선 남편과 나는 파워 I이니 너무 요란하지 않아야 했다. 배 위에서 다 같이 춤을 춘다거나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과한 흥이 넘친다거나 한 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은 곤란했다. 그리고 사진을 잘 찍어줘야 했다. 이번 기회에 그럴듯한 가족사진을 남기고 싶었는데 내가 원하는 느낌의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투어 업체들은 모두 사진에 진심이다. 늘씬하고 길어 보이는 것은 기본이며(비율 자체가 아예 달라진다. 정말이지 비결이 뭘까? 보라카이에서만큼은 나도 오등신이 아니었다.) 하늘과 바다를 다 담아낼 수 있는 구도를 잡아주는 등 사진을 지~인짜~아 깜! 짝! 놀랄 정도로 잘 찍어주는데, 나는 거기다가 햇살을 품은 투명한 느낌이 더해졌으면 해서 온갖 후기를 샅샅이 뒤졌다. 남편이 옆에서 '그건 그냥 햇빛이 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너무 깊은 바다에만 안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라며 뭘 그런 걸 찾고 있냐는 반응이었지만, 나중에 남편이, 접시물 정도의 깊이에서 코 박듯 잠수하고 있는 나를 찍은 사진을 확인하면서 그 투명함의 이유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다.
내적 흥을 추구하는 프로그램과 바다와 하늘과 햇살의 투명함을 담은 사진을 찾아 나름 치열하게 헤맨 끝에 선택한 업체는 땡큐보라카이라는 곳이었다. 그걸 고르고 나니 진이 빠져버려 스스호핑 빼고는 모두 그곳의 프로그램으로 예약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업체 선택은 아주 만족스러웠으나 길지 않은 일정동안 소화하기엔 너무 많은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싶다.
페어웨이즈에 머무르는 동안 셔틀버스 안에서 혹은 식당에서 자주 마주쳤던 독일인 가족이 있었다. 보라카이에 얼마나 머무느냐, 우린 일주일이라고 했더니 자기들은 한 달이라며 뭐라 뭐라 이야기하길래(그 '뭐라 뭐라'부터 못 알아들었다.) 와우~ 하며 무지하게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영어가 짧아서... ㅠㅠ 보라카이에서 나는 상당히 풍부한 표정으로 자주 감탄했으나 말수는 급속도로 줄게 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투어 업체와 약속한 장소로 급하게 이동할 때면 남편은 그 독일인의 휴가를 아주 많이 부러워했다.
"이 일정을 소화하려면 그 정도로 길게 와야 했어."
"아니야, 후기 보면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다 이 정도 일정이야. 우린 오히려 꽤 여유로운 편이라고. 3박 5일 이랬다면 우리 그냥 바다 찍고 망고 먹다가 산미구엘에 취한 채 술 깨기도 전에 집에 가는 거야."
보라카이에서 바쁜 사람들은 정말로 우리나라 사람뿐인 것인지 비치타월을 어깨에 두르고 투어업체 직원의 뒤를 따라 우르르 이동하는 무리의 대부분은 한국인들이었다. "마사지 졸라 잘해.", "누나, 돛단배?", "낙하산 톼알래?" 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호객행위를 하던 필리핀 사람들 다음으로 바쁜 사람들이 우리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채 타월을 깔고 해변에 드러누워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그러다 지겨우면 수영도 했다가 다시 낮잠을 자곤 했다.
'나는 왜 여기서도 바쁘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들의 느긋함과 여유를 지켜보았던 거 같다.
물론, 내가 예약했던 프로그램들은 모두 즐거웠다. 커다란 어항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바다 아래로 내려갔을 땐 너무 신기하고 예뻐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곳이 바다 안이라는 사실도 신기했고 눈앞에 몰려든 물고기들도 너무 신기했다. 바다 안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인지 이전까진 진짜 몰랐었다. 애니메이션 속 세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세상이 존재했구나. 눈앞에 보이고 손 끝에 와닿는 모든 것들이 신기해서 자꾸만 으흐흐흐 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남편의 표정을 슬쩍 보니 역시나 얼굴 근육이 다 풀려선 동네 바보처럼 으흐흐흐~하고 있던데 너도 나랑 같은 기분이구나, 했다. 헬멧에 연결된 호수의 길이만큼이 움직임의 범위였고 헬멧이 기울어지면 물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 각도를 유지하라는 주의를 받았던 터라 움직임은 제한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조금만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다. 역시... 다이빙을 배워서 나의 호흡과 움직임으로 다시 들어와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체험이었다.
씨워킹을 시작으로 예약해 둔 프로그램을 도장 깨기 하듯 하나 하나 했다. 패러세일링, 제트스키, 스쿠버다이빙, 호핑을 하면서 남편과 내가 다시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늘 남편의 어린 시절은 어떤 표정이었을까를 상상하곤 했는데 보라카이에 있는 동안 내가 모르던 시간 속의 남편을 살짝 훔쳐본 기분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알았고 그 신비로움에 깜짝 놀랐고 잔뜩 신이 났었다.
너랑 어렸을 때 만났다면 우리는 이런 표정으로 동네를 뛰어다니며 놀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잔뜩 못생겨진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노클링 마스크를 쓸 때면 얼굴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졌는데 지금 내 얼굴도 딱 저렇게 못 생겨져 있겠구나를 깨닫게 되니 그게 또 너무 웃겨서 계속 낄낄거렸던 기억이 난다.
바다는 너무 예쁜데 우리 얼굴은 진짜 무지하게 못생겼었다.
호핑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아들과 했던 스노클링이었다. 보라카이에 온 첫날 바다에 들어갔다가 엄청난 썬번을 겪곤 4일 만에 다시 물에 들어온 아들이었다. 아들한테도 산호 사이를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 봐, 이 안에 이런 세상이 있어."
"엄마, 저기에도 니모가 있어."
손에 빵을 쥐고 있으면 고기들이 모여들었는데 호핑 중에 비가 내려 시야가 좋지 않았고(핑계 1) 유프로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아(핑계 2) 동영상도, 사진도 제대로 못 찍었다. 아들과 물고기를 참 많이 봤는데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 아쉽다.
"호핑 진짜 좋았어. 그치?"
"나 물고기 엄청 많이 봤어, 엄마."
"여기 또 올까? 우리 또 오자. "
"저어~기 말이야. 이 쪽에서 이렇게 보니까 꼭 모아나가 사는 섬 같지 않아?"
그런 대화를 나누며 돌아왔던 기억의 힘으로 이 후의 일상 속을 열심히 걷고 있다.
"바다 안이 이렇게나 예뻤어?"
보라카이에 있는 동안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이 아름다운 곳에 사람이 이렇게 막 들어와도 되나. 내가 생각 없이 훔쳐보는 동안 산호가 어떻게 되면 어쩌지? 엄청 조심스러웠지만 실제로는 산호를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다이빙 실력이 되지 않아 물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물미역 같은 머리채를 흔들며 다시 떠오르곤 했다. 내가 이 바다를 즐기고 싶은 방법은 잔뜩 느려진 시선으로 출렁이는 빛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가 가진 힘으로 그 물살을 가르며 들어간 후 내가 가진 호흡만큼 마주하는 것임을, 이것저것 바쁘게 해 보니 알 수 있었다.
다음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가끔씩 다이빙을 해야지.
깊은 들숨을 온 몸 가득 채워 넣고 바다 안으로 들어가야지.
그날의 사진들을 보며 이런 저런 장면을 떠올리다가 이런 저런 새로운 결심들을 하면서 그 곳을 많이 그리워하는 요즘이다.
#사진 출처 땡큐보라카이, 우리 가족 휴대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