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한 창작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관람했다. 빅터가 죽은 사람을 되살려서 창조해낸 괴물이 복수를 한다는 구성은 비슷했지만, 인물이 처한 상황과 구도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줄거리는 원작과 많이 달랐다. 소설에서는 모자랄 것 없이 자란 빅터가 생명체를 만들면서 발생한 사건과 괴물의 고난에 초점을 두었다면 공연에서는 어떤 이유로 빅터가 생명 창조에 매달리는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더 담고 있었다. 그래서 소설을 읽었을 때는 괴물의 역경과 빅터의 심리 변화가 기억에 남은 반면에 공연을 통해서는 생명 창조라는 흔치 않은 실험을 할 수밖에 없게 된 빅터의 삶이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빅터가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극중에서나 관람객들 사이에서 오만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오만'이란 두 글자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빅터의 서사가 있다. 그는 어릴 적 흑사병으로 사망한 엄마를 되살리고 싶다는 생각에 불에 타다만 시신을 찾아와서 연구를 시작한다. 물론 보통 아이들과는 상당히 다른 발상이기 때문에 뮤지컬 넘버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남자아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연구한 내용은 소꿉친구였던 줄리아의 강아지를 되살리는 것으로 실습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복선이 있었다. 다시 태어난 강아지는 줄리아를 무는 사나운 동물이 되었고 이는 곧 나중에 빅터가 창조해내는 괴물이 죽기 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생명체가 될 거라는 암시였다. 하지만 빅터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채, 혹은 알면서도 계속해서 연구의 가속도를 높인다.
사람들은 빅터의 괴이한 행동에 집중할 뿐 아이의 상처를 돌보지 않았다. 시신을 가져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마음이었지만 별종으로 취급한 나머지 빅터는 외로운 사람으로 자라서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되었다. 누구나 소중한 것을 잃으면 되찾고 싶어할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은, 보통 사람들은 상상에서 그칠 테지만 빅터에게는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비극적인 결말을 만들어낸 중요한 장면 중 하나가 사람들이 빅터를 마녀 혹은 유령으로 매도하는 부분이었다. 만일 사람들이 빅터의 감정을 이해하고 때로는 내려놓아야 하는 것도 있다는 걸 알려줬더라면 평범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연구에 필요한 시신을 구하는 과정에서 빅터는 장의사를 살해하게 되고, 빅터의 친구였던 앙리는 그 누명을 스스로 뒤집어쓴 채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 공연 특성상 빅터와 앙리가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 길지 않아서 처음 관람할 때에는 앙리가 그토록 희생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부분은 원작에서처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로 설정하거나 과거에 앙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빅터가 구해주는 내용을 극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공감 형성에 더 도움되지 않을까 싶다. 빅터가 자수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그의 누나인 엘렌이 '혹시 너의 연구에 앙리의 시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서지 않는 것이냐'라고 묻는 장면은 조금 잔인했다. 누구보다 그를 이해해주던 사람도 결국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처럼 빅터를 여겨왔던 것이 아닐까 싶어서다. 그러다 문득, 빅터의 깊은 마음 한 켠에는 정말 그런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들었다. 이를 불식시키듯 빅터는 자수를 하였으나 줄리아의 아버지가 손을 써서 결국 앙리가 희생된다.
빅터는 앙리의 목을 가져와 되살리는 데 성공하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생명체로 재탄생하고, 괴물이 되어 빅터의 공격을 피해 달아난다. 여기서 빅터가 괴물을 창조할 때 부르는 '위대한 생명창조의 역사가 시작된다'라는 넘버가 은근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둡고 웅장하게 시작해서 중간에 잠시 약간은 서정적으로 느껴지는 멜로디가 있는데 그 부분이 왠지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치 호러영화에서 범인이 부드러운 클래식을 틀어놓고 자신만의 작업을 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저음으로 시작해서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터지는 것이 인상적인 데다가 오묘한 느낌이 드는 곡이어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 중 하나다.
괴물이 도망간 후의 여정이 펼쳐지는데, 재미있게도 여기서부터 배우들의 1인 2역이 시작된다. 빅터와 엘렌은 격투장을 운영하며 괴물을 이용하는 자크와 에바로, 줄리아는 그들의 노예인 까뜨린느로 변신한다. 빅터의 집사 룽게는 자크의 하인 이고르로, 줄리아의 아버지는 격투장의 투자자 페르난도로 바뀐다. 캐릭터 차이가 꽤 커서 배우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보면 1인 2역인 걸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고, 실제로 그런 관객들도 있다고 한다. 자칫하면 늘어질 수 있는 부분임에도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다른 캐릭터가 흥미로워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
까뜨린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괴물에게 정을 느끼고 같이 북극에 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자크와 에바를 내쫓고 싶던 페르난도가 까뜨린느를 사주해서 괴물에게 약을 먹이게 되고, 힘을 잃은 괴물은 싸움판에서 지게 된다. 페르난도가 자유를 준다는 말에 갈등하던 까뜨린느가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는 장면이 줄거리의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녀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괴물이 빅터를 찾아가 복수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페르난도를 어떻게 믿고 그러한 결정을 했나 싶어 답답하면서도, 까뜨린느가 부르는 넘버 '산다는 거'의 가사를 들으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만 다시 생각해서 괴물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함께 북극으로 도망가는 방법도 있었건만'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평소 공연을 보면서 안타까움에 마음이 쓰이는 캐릭터들이 여럿 있었는데 거기에 까뜨린느도 포함되었다.
"나와 함께 있으면 나처럼 너 저주받아"
상처를 입은 괴물은 자신을 창조한 빅터를 원망하게 되고, 빅터의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빅터의 누나인 엘렌도 괴물의 복수에서 피해 갈 수 없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슬픈 장면을 꼽는다면 엘렌의 처형대 아래에서 빅터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괴물은 자신이 느낀 외로움과 고독을 빅터도 겪게 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이미 빅터는 어릴 때부터 그러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별난 연구와 재능으로 인해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주변에게까지 피해가 갈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죽어가는 괴물에게서 친구 앙리를 느끼고 다시 한번 살려보겠다고 외치는 빅터가 너무 안타까웠다.
“밤하늘 빛나는 저 별처럼 위대한 하늘을 꿈꾸었네”
사람들마다 빅터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를 것이다. 그의 행동과 감정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자아도취에 빠진 오만한 인간이 될 수도, 감정에 휘둘리는 나약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범위가 넓은 캐릭터이기 때문에 각자 해석하는 관점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프랑켄슈타인'이 마니아를 생성하는 뮤지컬로서 꾸준히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독특한 분위기와 전체적인 무대 연출이 인상적이어서 여운이 길게 남았다. 동명 소설을 소재로 제작하였지만 조금은 다른 줄거리와 구성으로 인물들의 서사를 넣음으로써 새로운 재미를 준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