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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Sep 06. 2020

대한항공 경력직 승무원 면접에서는 떨어졌지만

                                                                                                                                                    

 몇 개월 전, 별안간 국내 메이저 항공사에서 경력직 승무원 채용이 났다. 내가 '별안간'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약 4년 만에 난 경력직 채용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메이저 항공사라 일컬으면 으레 두 항공사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두 항공사 모두 요 몇 년 간 경력직 승무원을 일절 채용하지 않았다. 경력직인 우리 입장에서는 이미 비행이라는 환경에 익숙한 경력직을 신입과 함께 고용하는 게 회사에도 이득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회사 입장은 또 다른지 하여간 경력직 채용 자체가 나지를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경력직 승무원 채용이 실로 오랜만에 났고, 많은 전직 승무원과 외항사 출신 승무원은 이게 웬일이냐며 모두 한달음에 지원했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전직 승무원이야 막상 그만두니 비행이 그리워져서 다시 지원했다고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반면 현직 외항사 승무원에게는 왜 굳이 지금 회사에서도 비행 잘 하고 있는데 어렵게 이직을 하려고 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나도 이번 경력직 채용 이후 이 물음에 시달리며 비행을 이어왔다.


 먼저, 외항사 승무원을 크게 한국 베이스와 외국 베이스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한국 베이스인 경우에는 비행이 있을 때만 해외로 나가고 비행이 끝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에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 항공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반면, 외국 베이스 승무원은 아예 다른 국가, 다른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 비행이 끝나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물론 쉬는 날에 자비로 짧게 며칠씩이라도 한국에 들어왔다 나갈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패턴 역시 아예 한국에서 사는 것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를 것이다. 때문에 외항사 중에서도 외국 베이스 승무원은 향수병으로 고생하며 한국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나처럼 한국 베이스인 외항사 승무원은 어떤가. 한국에서 지내기에 가족, 친구, 애인과도 떨어져 있지 않다. 일단 그 점이 가장 좋긴 하다. 기나긴 비행이 끝나고 돌아오면 나를 기다리는 사람과의 만남과 한국에서 갖는 소소한 일상이 다음 비행을 나갈 때까지 비행에 지친 심신을 다독여준다. 그렇다고 우리만의 고충이 없는 것은 또 아니다. 다른 외항사의 한국 베이스인 경우는 제쳐두고 ANA 항공을 예로 들어 말하겠다. 우리 회사의 한국인 승무원은 한 달에 장거리 비행을 2~3번 정도 소화하는데, 모든 장거리 비행에 한국인으로는 홀로 탑승한다. 나를 제외한 열댓 명의 승무원이 모두 일본인이다. 딱히 일본에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승무원이 일본인이고, 승객 대부분이 일본인이란 사실은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외로움과 답답함을 안겨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 한국인들과 모국어로 소통하며, 한국인의 '정'이 살아있는 따뜻한 비행을 하고 싶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막상 국내 항공사에 다니는 친구들은 이런 내 이야기를 들으면 한껏 비아냥거리며 핀잔을 주기 바쁘지만.


 "야, 네가 안 당해봐서 하는 소리야. 한국인 승객들이 비행기에서 하는 갑질이 얼마나 심한지 네가 당해봐야지. 그리고 진짜 말도 안 통하는 사무장이나 선배랑 같이 장거리 비행이라도 하면... 게다가 그런 사람이랑 일 년 내내 팀 비행이라도 하게 되면...!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알지? 한국인의 정이 살아있는 비행? 정이 어딨냐 정이. 한국인의 한만 서린다."


 그들 말마따나 아직 내가 호되게 안 당해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항공사에서 6년간 비행을 하며 마음속에는 내심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한국항공사에서 한국인 선후배들과, 한국인 승객들과 한국어로 소통하며 더 활기차고 즐거운 비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 말이다. 그러던 차에 국내 대형 항공사의 경력직 승무원 채용이 났으니 의욕적인 마음으로 지원한 것은 당연했다.


 나는 생각했다. '아, 내가 이렇게 돌고 돌아서 대한항공의 승무원이 되려고 했던 거구나. 일본항공사에서 일하며 영어와 일본어 능력을 키웠으니, 대한항공에 들어가서 고가 성적도 좋게 받을 수 있게 말이지. 처음에 비행할 때에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시차와 기압차에 적응하지 못해, 6개월간 매 비행마다 토를 몇 번씩이나 하며 누구보다도 고생하고, 힘들게 힘들게 비행이라는 환경에 맞는 몸을 다져왔지 않은가! 이게 다 하늘이 나보고 ANA 항공에서 승무원으로써의 체력과 자질을 갖춘 이후에 대한항공에서 승승장구하라는 뜻이었구나.'


 그리고 나는 최종 면접에서 똑, 떨어졌다. 우리 회사에서 총 20명 정도가 지원을 했고, 10명이 최종 면접까지 붙었다. 나는 떨어진 절반인 10명 중 하나로, 나를 받아주었던 감사한 회사인 이곳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비행을 이어나가고 있다. 천성이 긍정적인 터라 나는 재빨리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래. 이곳에서 일본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할 수 있을 때까지는 있어야지. 한국인이 혼자라 조금 외롭긴 하지만, 외국인이라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일하는 부분도 분명 있잖아? 아직 일러, 일렀어. 내 때가 아닌 거야.'


 나를 비롯해 이번 채용에서 떨어진 우리 회사 사람들은 마음을 다잡으며 비행을 이어나갔고, 붙은 10명은 퇴사 절차와 입사 준비로 바빠만 보였다.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는 심심한 위로와 축하의 말이 오갔다. 이제는 다른 항공사로 이직을 하게 된 10명이 우리 회사에 돌려줘야 할 회사 물품들과 유니폼을 마지막으로 반납하고 돌아가는 날, 그날 비행 승무원이 바로 나였다. 10명의 동료들은 더 이상 우리 회사 신분의 승무원이 아니었기에 승객으로 탑승했다. 한일 노선이기에 한국인 승무원이 한 명 더 탑승했는데, 그마저도 육아를 위해 다음 주에 퇴사하는 선배님이었다. 요컨대, 나만 빼고 모두 그만두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김포공항 입국장에는 우리 회사 선후배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꽃과 초를 꽂은 케이크와 작은 팻말을 들고. 팻말에는 지금까지 비행하느라 수고했다는 격려의 메시지도 적혀있었고, 이제 새로운 출발을 축하한다는 응원의 메시지도 쓰여있었다. 우리가 입국장으로 나오자 선후배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케이크와 꽃을 들이밀었고,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댔다. 나도 축하해 주러 온 선후배 무리에 슬며시 끼어, 이직하는 사람들을 축하해 주며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탈락의 고배를 마신 나는 속으로는 은근히 울적했지만, 그렇다고 티를 낼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 손을 낚아채더니 다짜고짜 끌었다. 내가 평소 좋아하고 따르는 선배님이었다. 선배님은 공항 군데군데 세워진 기둥 뒤로 나를 끌듯이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뒤를 확 돌아보면서 내 가슴팍에 큰 꽃다발을 퍽! 하니 안겨주었다. 순간 나는 선배님이 나를 최종 합격한 무리 중 하나로 잘못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님? 저 합격한 걸로 알고 계시는 거예요? 저 떨어졌어요. 에고, 모르셨구나."

 "알아. 이번에, 지금 떨어진 거잖아. 너는 분명 너에게 더 잘 맞는 회사에, 더 좋은 때에 이직할 수 있을 거야. 꼭 이직이 아니더라도 너에게는 더욱더 멋진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 알아. 그래서 주는 거야. 미리 축하하고 축복해 주는 의미에서."

 이런 씨, 코끝이 찡했다.

 "왜 울려 그래? 아무튼 그래서 내가 네 꽃다발은 제일 큰 거로 샀다?"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선배님은 그런 내가 못 말린다는 듯이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공항 입국장의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무리는 축하파티를 하며 연신 기념사진을 찍어댔고, 나와 선배님은 기둥 뒤에서 조용히 울고, 웃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책상 옆 책장에는 선배님이 가슴팍에 안겨주었던 꽃다발이 잘 말린 채로 놓여있다. 그날 공항 입국장을 돌이켜 생각하면, 내게는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스포트라이트를 선배님이 조심스레 끌고 와 내 머리 위까지 살살 밝혀주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날 기둥 뒤에서 나는 분명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로 인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그런 기분.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누군가는 나를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로 바라봐 주고 있다는, 그리고 그런 생각만으로도 내가 더 근사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던 그런 기분.


 예전에 아부지가 해주신 말이 생각난다. 아부지가 은행에 입사해 최연소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을 때의 일이다.

 "다들 한턱 쏘라고 성화였지. 그래서 매일 저녁 바쁘게 쫓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저녁도 사고, 술도 사고 그랬어. 그러다 하루는 한 선배랑 저녁을 먹게 됐거든? 아빠는 당연히 아빠가 살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 선배가 그러는 거야. 지금까지 수고했다고, 그간 고생 많았으니까 오늘은 선배가 한턱 크게 내겠다고. 다들 아빠한테 한턱내라고 할 때였는데 말이지. 그래서 아빠 그날 진짜로 그 선배한테 한턱 크게 얻어먹었다?


 너도 나중에 친구가 잘 되거나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한턱 쏘라고 하는 친구가 아니라 한턱 사주는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다른게 아니라 그게 성공한 인생이지 않겠니?"


 축하받는 사람이 있으면 축하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아부지의 승진을 진정으로 축하해주었던 그 선배라는 사람의 마음과, 나를 기둥 뒤로 끌고 가 나만의 스포트라이트를 만들어 비춰주며 내 앞길을 미리 축복해 주었던 우리 선배님의 마음이 눈물겨워, 축하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누가 그랬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위로해 주는 사람은 많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기쁜 일이 생기자 축하해 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할 수 있는 다정한 마음을 가지는 일. 승진하고, 이직하고, 성공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승무원&신혼 웹툰 인스타그램 @flyingwoopig) 빨로빨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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