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가장 나다운 나로 살기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당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적이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누군가에 의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정의 내려진 적 말이다. 학교나 직장에서도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지만, 사람에게 가장 큰 생채기를 내는 경험은 어릴 적 믿었던 이에게 평가 절하당하고 속된 말을 듣는 때다. 특히 나라는 존재를 만든 사람에게 존재를 부정당하는 경험은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한다. 부모님이 나를 향해 악평을 쏟아 내면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하고 의심을 키우게 되는 건 당연하다. 부모님은 나를 만들고 키워 준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나를 잘 알 거라고 내심 믿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단단히 신뢰하기 어려운 어릴 때일수록 그 믿음의 배신은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벌새〉(2018) 속 은희(박지후 분)의 부모는 오빠에게 가정폭력을 당한 은희를 향해 폭언을 퍼붓는다. 너는 못된 애야, 제멋대로에 이기적인 계집애, 어디 오빠한테 감히 대들어,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의 은희는 이에 굴하지 않는다. 자신은 부모의 부정적 판단과 다르다며, 발을 구르고 소리친다. 오빠가 잘못했는데도 은희의 탓만 하는 부모님이 미워 억울함을 항변하는 장면이지만, ‘나 그런 애 아니야.’라는 내용의 외침은 어쩌면 은희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그런 애가 아니야, 나는 알고 있어, 내가 아무것도 못 하는 애가 아니라는 걸, 내가 못되고 이기적인 애가 아니라는 걸. 진짜 나의 본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부모도, 형제도, 절친도 아닌 나 자신이니까.
삶이 나를 계속 속이고 ‘너는 해낼 수 없어. 너는 그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무너지는 게 어때?’라고 시련을 줘도, 우리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한다. 나를 쉽게 예단한 사람들을 향해, 사회를 향해, 심지어 한껏 잔혹해지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치닫는 나의 운명을 향해.
미국 사진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낸 골딘(Nan Goldin)의 일생과 그의 작품을 담은 다큐멘터리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2022)에서 골딘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부정하는 부모에게서 자란 사람은 어떻게 스스로를 믿어요? 어떻게 세상에 증명하죠?” 골딘이 살아온 과정은 이를 증명하는 투쟁이자 역사의 한 페이지다. 영화는 골딘이 ‘증명’을 위해 쏟아 낸 작품과 그가 주력하는 사회운동을 보여 준다.
우리는 죽고 싶지 않다
영화의 시작에서 낸 골딘은 자신의 사진이 전시될 수도 있는 미국 뉴욕의 대형 박물관을 친구들과 방문한다. 미술품 관람이나 전시 기획, 또는 영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위하기 위해서다. 골딘이 “새클러의 이름을 지우라”고 크게 외치기 시작하자 P.A.I.N(처방전중재조직, 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의 일원들은 약통을 분수에 던진다. 이들은 “우리는 죽고 싶지 않다!”라고 외치며 죽음을 은유하는 시체처럼 전시관 바닥에 드러눕는다. 미술관 직원들과 경비가 출동하지만, 이들을 말리기엔 역부족이다.
골딘은 손목 수술 후 의사의 처방으로 오피오이드 계열의 진통제 ‘옥시콘틴’을 복용했다. 현재 미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마약중독의 원흉으로 거론되는 옥시콘틴은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의사들이 안전하다며 광고에 나와 떠들 정도로 흔한 진통제였다. 하지만 골딘과 함께 피켓시위를 펼치는 사람 가운데 대부분은 옥시콘틴 때문에 죽음 직전까지 갔거나, 옥시콘틴 중독으로 가족을 잃었다. 고통을 줄여 주는 진통제라 알려진 옥시콘틴 탓에 심각한 약물중독에 빠진 이들이 펜타닐과 헤로인 등 더 강한 약물을 투약하다 죽음까지 이른 것이다. 펜타닐은 최근 미국 청장년층의 사망원인 1위로도 꼽히며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 마약성진통제다. 미국 내에서 펜타닐 과복용으로 사망자가 증가하면서 ‘좀비 마약’이라고도 이름 붙여지며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일고 있다.
1995년에 옥시콘틴을 개발·출시한 제약회사 퍼듀파마(Purdue Pharma)는 이 약이 안전하다는 공격적 마케팅으로 큰돈을 벌었다. 퍼듀파마를 소유한 새클러(Sackler) 가문은 약을 팔아 번 돈으로 박물관과 대학 등에 거액을 기증하며 문화 사업을 펼쳤다. 영화 속에서 골딘이 시위하는 장소인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등에도 새클러 가문의 이름과 인장이 새겨져 있다. 골딘은 ‘새클러 가문의 이름을 내리라’며 미술관에 공문을 보내고 시위를 이어 나간다. 골딘과 그의 동료들이 미술관에서 기습적으로 행하는 시위들은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옥시콘틴의 위험성을 알리는 기폭제가 된다.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예술가는 많다. 특히 사진작가는 주로 시위 현장 속 활동가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한다. 하지만 낸 골딘은 시위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그 자신이 옥시콘틴에 중독되어 죽음 직전까지 갔던 ‘생존자’이기에 직접 미술관에 드러눕고 피켓을 들며 거리를 활보한다. 사람들의 이목이 몰리는 미술관을 중점으로, 대형 제약회사의 마약성 약품 판촉이 미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음을 약통 던지기 등의 행위로써 고발하고 폭로하는 것이 골딘의 활동 방식이다.
영화는 골딘이 세계적인 사진작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 펼치는 활동과 함께 그의 탄생과 성장과정, 사진을 찍게 된 이유 등을 교차하여 보여 준다. 골딘은 1950년대 미국 워싱턴의 보수적인 집에서 태어나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골딘의 가정형편은 여유 있었지만, 그의 언니 바바라가 자살한 뒤 부모는 골딘이 언니처럼 가족에게 악명을 더할까 두려워 골딘을 이곳저곳에 떠맡긴다. 골딘은 보호받지 못한 어린아이였으며, 바바라는 부모에게 학대당한 끝에 자살했다. 골딘은 왜 언니가 사라졌는지 부모에게 끊임없이 물었지만, 부모는 바바라의 존재조차도 지워 버리려 했다.
훗날 바바라의 진료기록을 찾아본 골딘은 그제야 진실에 가까워진다. 부모의 증언과 달리 언니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부모는 바바라의 자유로움과 퀴어적 면모를 정신병으로 해석해 그를 부정한 것이다. 골딘은 언니의 기록을 통해 자신이 왜 가족과 불화했는지, 왜 일찌감치 부모를 떠나 사진을 찍으며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는지 재확인한다.
골딘은 “나의 가족은 나의 친구들”이라고 단언한다. 골딘이라는 인간을 단순히 세상에 탄생시킨 이들이 아니라 골딘에게 카메라를 잡게 하고, 그의 모델이 되어 주고, 방을 함께 나누어 쓰고 전시회를 열도록 도와준 친구들이 평생의 가족인 셈이다. 골딘의 사진 작업엔 포스트 펑크·뉴웨이브 경향의 아티스트들이 주로 등장한다. 오랜 공동체 생활을 하며 그들과 가까워진 골딘이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찍은 것이다. 골딘의 카메라 앞에서 그의 친구들은 가감 없이 자신의 몸과 더러운 방, 정돈되지 않은 드래그퀸의 대기실과 파티 중의 취한 모습 등을 내보인다.
골딘의 작업물 전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성적 의존의 발라드〉(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다. 여기서 그는 연인 사이의 권력을 사진으로 표현했다. 이 사진집 속 여자들은 자기 몸과 눈물, 이별의 흔적, 연인 사이의 미묘한 눈빛, 진력난 관계의 뒷모습, 메이크업을 지운 피로한 모습까지 그대로 보여 준다. 주로 인물을 촬영한 골딘의 작품에는 펑크족과 퀴어, 드래그퀸, 약물 중독자, 사랑에 빠진 연인의 일상이 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아니, 표현이라기보다는 기록일 테다. 친구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사진 수백 장을 슬라이드쇼로 모은 전시는 사진작가로서의 골딘을 세상에 알렸다.
골딘은 자신이 교제하던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하고 죽을 뻔했을 때조차 치료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멍이 서서히 빠지고 눈동자에 피가 맺힌 모습 등이다. 그러니 그의 사진은 곧 친구들이었고, ‘자신’의 표현이었으며 삶을 향한 투쟁이었다. 골딘은 기록하는 것이 곧 기억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불행하게 자랐지만,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일찍이 깨우쳤고 열일곱 살 때부터 카메라를 들어 온갖 것을 찍었다.
“자신을 부정당하며 자란 사람은 어떻게 스스로를 믿어요? 어떻게 세상에 증명하죠?”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그의 사진이고 사회운동임을 골딘의 작업물과 내레이션, 시위 현장을 병치하여 드러낸다. 어찌 보면 지나치다 느껴질 정도로 투쟁적인 생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 작품이 단순히 골딘이라는 예술가이자 사회운동가의 전기영화라서만은 아니다. 과거의 사진 작업, 현재의 사회운동, 주인공의 내레이션이라는 여러 겹의 장치를 통해 관객에게 반드시 강조하고픈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가장 나답게 살기
삶이 곧 투쟁이고, 생존이 곧 자기 증명인 사람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고통과 슬픔을 지고 생을 살아 낸다. 때로 운명은 고약할 정도로 가혹하며 그 어떤 것도 쉽게 손에 쥐여 주지 않는다. 살아남는 일만으로도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살아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을 때도 있다.
낸 골딘의 삶은 계속 무언가와 싸우는 일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소개한 제약회사와의 싸움이다. 마약중독자들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마약중독이 거대한 사회문제임을 이 위대한 예술가는 세상에 알렸다. 골딘과 활동가들은 ‘우리는 살고 싶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시스템을 공격하며, 살고 싶다고 외친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 가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한다. 예술가 공동체 안에서 친구들을 기록하고 자신의 치부까지도 수치심 없이 내보인 이 예술가의 삶은 경이롭고 용감하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어떻게 내가 나임을 증명할 것인가. 반드시 골딘처럼 훌륭한 예술작품을 남기거나 격렬한 사회운동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가장 나답게 우리의 생을 살아 내면 된다. 나의 본질을 숨기지 않고, 타인의 평가에 휩쓸리지 않으며, 가장 나다운 나로.
*고교독서평설 6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