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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임산부, 그 변화와 공존

『걷고싶은도시』2024년 겨울호 : 임산부와 도시

by 오지의

“아줌마, 좀비지?”


임산부와 좀비 사태를 소재로 삼은 블랙 코미디, 『산부인과로 가는 길』이란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날, 주인공은 하필이면 진통이 시작되어 출산을 위해 산부인과로 향한다. 병원으로 가는 길은 이미 좀비 떼로 뒤덮여 있지만, 아기가 곧 나오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쓴다. 다행히 이 드라마 속에서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들은 움직임이 매우 느려진다. 기민하게 행동하면, 임산부마저도 어느 정도 좀비를 피하고 방어할 수 있다. 다만, 좀비보다 더 큰 위협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유난히 행동이 굼뜬 만삭의 산모는 다른 시민들에게 연거푸 좀비로 오해받는다. 급기야 사태 진압에 나선 군인이 그녀를 좀비로 여기고 총을 겨눈다. 자신은 감염된 적 없다고,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가는 길이라고 해명해도 군인은 그녀에게서 총구를 거두지 않는다.


오지의1.png 이미지 출처 : tvN 드라마 스테이지 2021 <산부인과로 가는 길>


도시의 리듬은 빠르다. 좀비쯤 되지 않고서야, 그렇게 천천히 걸을 리가 없다. 번화가의 군중은 시계추처럼 정확하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임산부의 걸음은 필연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다. 속도와 효율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굼뜨고 느린 임산부는 어떤 면에서 좀비와 다를 바가 없다. 가상의 재난을 가정한 창작물이긴 하지만, 임신으로 유발되는 각종 변화와 우리 사회가 이를 대하는 방식에 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있다.


임산부는 다양하고 극적인 신체 변화를 경험한다. 모든 측면을 다루자면 지나치게 방대해지기에, 도시 이동과 관련된 몇 가지 요소만 살펴보도록 하자. 일단 임산부의 느린 속도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관여한다. 임신 초기부터 혈액량이 서서히 증가한다. 이는 태아에게 양분을 공급하고 출산을 대비하기 위함이지만, 임산부의 심장에는 부담이 증가하는 일이다. 또한 산소 요구량은 늘어나는데, 자궁의 부피가 엄청나게 늘어나다 보니 폐가 호흡할 공간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그러니 가벼운 활동에도 쉽게 헐떡이게 된다. 임산부에게 달리거나 계단을 오르는 일은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불어나는 체중도 신속한 이동을 어렵게 만든다. 임신 기간 동안 적어도 10kg, 많게는 20kg 이상 체중이 급격히 증가하니 기동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무게 중심과 자세도 변한다. 복부에 아기집이 커다랗게 부풀면서 배가 나오니 무게 중심은 앞으로 쏠리고, 덩달아 골반의 각도도 변형된다. 이런 체형으로는 뒤뚱거리게 되기 마련이다. 관절과 인대를 느슨하게 만드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보행 시 관절이 불안정해진다. 호르몬 덕분에 출산할 때 골반 관절이 유연해지지만, 한편으로는 발목을 삐끗하기도 쉬운 것이다. 이렇듯, 균형을 잡기 어렵게 만드는 몸의 변화 때문에 임산부의 속도는 한층 더 느려진다. 임산부는 장시간 서 있는 것도 무리가 된다. 특히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 출퇴근 대중교통 환경이 위협적이다. 직립 자세에서는 무거운 자궁이 정맥을 압박하기 쉽다. 정맥이 짓눌리면 순환이 잘되지 않아 임산부는 현기증을 느낄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장시간 중력의 영향으로 혈액이 하체에 정체되면 다리의 울혈과 부종이 발생하게 된다. 드물게는 혈전 같은 질병까지도 일으킬 수 있다. 많아진 혈액과 늘어난 체중으로 인해 허리, 무릎, 발의 부하가 가중된다. 앞서 지적했듯, 허리와 골반은 임신으로 인해 척추를 이루는 각도 자체가 변화하기 때문에 통증마저 흔히 생긴다.


이렇듯 임신에 수반되는 각종 신체적 변화를 배려하기 위해 대중교통에 임산부 좌석이 생겨났다. 그런데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논쟁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둬야만 하는가?’이다. 임산부 배려석은 보통 비워두는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일부는 자리 비워두기에 반대하며, 더 나아가 임산부 배려석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만약 꼭 배려가 필요하다면, 임산부 본인이 알아서 부탁하면 될 일이지 자리를 미리 비워두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어떤가? 얼핏 합리적으로 들린다. 부탁은 아쉬운 사람이 해야 한다. 배려는 얼마든지 거절도 가능하다. 임산부가 앉을 자리가 필요하다고 요청하기 전까지는, 누구나 자리를 점유할 수 있다.


몇 년 전, 나는 임신 중에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산모였다. 옳다구나! 산부인과 의사로서 관심을 가지던 주제인 임산부의 도시 이동에 대해 연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임산부의 대중교통 이용은 어떤 종류의 경험일까? 내가 나름대로 관찰한 결과, 임산부 배려석은 비워져 있는 날이 많이 있지만, 아닌 때도 있었다. 편도 70분, 왕복 140분의 지하철 여정 동안 별별 일을 다 겪었다. 물론 여러 시민에게 감사한 배려를 받은 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지러워서 승강장에서 주저앉은 적도 적지 않고, 환기가 잘 안되는 지하철 냄새에 유난히 민감해져 구역질한 적도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제가 임신 중이라 죄송하지만 자리가 필요합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다른 승객에게 부탁한 적은 없다. 아득하게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팅팅 부어도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임신 전에는 아무 문제 없이 부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사실 임산부 배려석에 누군가 앉아있어도, 나의 임산부 배지를 보고 흔쾌히 양보해 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배지를 뻔히 보고서도 무심하게 임산부 좌석에 앉아있는 승객에게 양보를 요청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임신한 나는 평소의 나보다 취약하고, 나의 태아는 심지어 그보다도 훨씬 더 취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나서서 낯선 이와의 갈등 상황에 뛰어드는 것은 절대로 감당하고 싶지 않은 위험이다. ‘만에 하나라도 상대가 기분이 나쁘다고 해코지를 하거나 나를 괴롭히면 어떻게 감당하지? 임산부 자리라고 저렇게 눈에 잘 띄게 표시되어 있는데, 대놓고 무시하는 것을 보면 혹시 임산부를 싫어하는 사람일지도 몰라. 만약에 나를 쫓아오면, 지금의 내가 도망갈 수라도 있을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일은 지나친 상상의 영역이고, 현실적으로 일어날 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 전의 나와는 달리 이상하리만큼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변한 것일까? 심리적 민감성도 호르몬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임산부의 상당수는 불안도가 높아지며 때로는 일상적인 상황도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다. 특히 혼잡하고 낯선 이로 가득한 출퇴근길 대중교통은 상당한 스트레스 거리이다. 물론 민감한 반응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태아의 안전에 대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보호 본능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많은 문헌에서 임신 중에는 안전을 추구하는 행동이 증가하고, 낯선 이에 대한 사회적 경계심이 상승하는 것이 보고되고 있다. 일리가 있다. 위협을 민감하게 감지해내야, 연약한 태아를 지켜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이런 정신적 변화를 겪는 임산부에게 타인과의 잠재적 갈등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요구는 무리라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임산부를 위한 편의 마련에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그 양보와 배려를 개개인이 일일이 쟁취해내야만 하는 것으로 미뤄두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임산부의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살펴보니, 아무래도 배 부른 이들이 도시에서 이동하는 건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느리게 걷는 임산부에게 횡단보도 신호는 너무 짧다. 계단이 버거운 임산부에게 엘리베이터가 언제나 찾기 쉬운 것만은 아니다. 낯선 사람들과 빽빽이 부대끼는 대중교통은 임산부를 괜스레 예민하게 만들고, 때로는 부른 배 때문에 남들의 이목을 끄는 것마저 부담스럽다. 실제로 많은 임산부가 여러 이유로 외출을 회피한다. 그렇다면 임산부들은 집에만 있어야 하는 걸까? 괜히 번잡한 도시의 생활 공간에 나타나서 민폐를 끼치지 말고, 위험과 불편이 없는 집에서 오롯이 머무는 것이 정답일까?


답은 정확히 정반대이다. 특수한 의학적 상황을 제외하면, 몸을 활발히 움직여야 건강한 임신기를 보낼 수 있다. 의사들은 임산부에게 원하는 만큼 생활 공간을 누비고, 자주 산책하기를 권한다. 적당히 걷고 움직이는 것은 임산부의 체중 관리와 심혈관 질환 예방에 도움이 된다. 실외 활동은 임신 기간 동안 근력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고, 임신성 당뇨, 혈전증과 같은 임신 합병증의 위험을 감소시킨다. 또한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가장 기초적인 자조 활동이다. 활발한 자립 활동을 하는 임산부는, 정서적으로도 건강해진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렵고, 자유로운 이동이 불편한 도시는 임신 중 사회적 고립과 우울감을 유발하기에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걷기에 나쁜 도시는, 건강에도 나쁘다.


임신을 했다고 해서 갈 수 없거나, 가선 안 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임산부 자신이 기존에 해왔고, 하고 싶으며, 해낼 수 있는 활동을 하면 된다. 출퇴근, 가벼운 여행, 즐거운 외식, 친구와 가족들과 만남, 적당한 운동 등등. 건강한 임산부는 임신 전의 일상적인 활동을 충분히 지속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임신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유발하는 수많은 신체적, 정신적 변화가 실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만약 애초에 우리의 이동 수단에 시간과 공간의 여유가 충분하다면, 움직임이 느리거나 배가 잔뜩 나온 것, 심리적 안정과 간헐적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출퇴근길이 악명높은 ‘지옥철’이 아니라면, 길을 걷다가도 얼마든지 벤치에 앉아서 쉴 수 있다면, 대중교통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필요할 때 엘리베이터와 같은 보조 시설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면... 임산부 역시 자유롭게 일상을 누릴 수 있고, 그렇게 할 권리가 있는 이들이다.


결국 임산부를 교통 약자로 만드는 것은 지나치게 과밀하고 속도와 효율만을 중시하는 현대적 도시의 이동 환경이다. 임산부를 포함한 교통 약자에게 배려가 필요한 것은 그들의 능력이 전무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과도하게 다급하고 빽빽한 환경이, 취약자에게는 얼마든지 가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산부의 이동 경험을 개선하는 것은 복잡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요인들이 얽힌 문제이다. 이것은 단순히 가련하고 딱한 임산부에게 적당한 시혜를 베풀어 주는 것 이상의 차원이다. 사회의 속도와 효율 추구 수준을 어느 정도에 맞출 것인지 숙고를 거쳐야 하는 문제이다. 그런 성숙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어느 블랙 코미디의 은유처럼 임산부는 그저 ‘좀비’처럼 이질적인 소수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종종 생활 공간의 발전을 속도와 효율로 측정한다. 이동 수단이란 가능한 빠르게, 최대한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살기 좋은 도시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다양한 이들이 이동과 같은 필수적인 활동을 무리 없이 영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임산부는 새 생명의 시작점이자 도시의 소중한 구성원이다. 임산부도 불편 없이 이동할 수 있는 도시는, 결국 모든 이에게 살기 좋은 도시가 된다.




* 본 칼럼은 계간지 『걷고싶은도시』2024년 겨울호에 수록되었습니다.

* 전체 글 보기 https://blog.naver.com/dosi1994/223704055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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