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강좌와 또 한 번의 세미나를 거치면서
그러니까 출신 성분으로 되돌아가 보자면... 나는 작가이기 전에 강연자이다. 2020년 과학창의재단 경연을 통해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되었다. (이 영역에서 가장 유명해진 사람이 현재 과학 유튜버인 궤도 님이다.)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된 직후 가장 많이 한 것은 중고교 과학 강연이었다. 과학 커뮤니케이터 활동이 즐거웠던 이유의 상당 부분은 동료 그룹 특유의 유쾌함이 좋아서였다. 대중과 적극 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과학 종사자들 가운데서도 유독 특이하거나, 외향적이거나, 아니면 둘 다인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이미 일상이 노잼인 30대 기혼 직장인. 젊은 이공대 학생들과 모여서 강연 연구를 하고 과학 문화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이, 일상에 찌든 월급쟁이 아줌마에게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하지만 코로나가 길어지고 내가 임신을 하면서, 도서 산간의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찾아가 강연을 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나는 조리원이 딸린 분만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염에 극도로 민감했고 운신이 썩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집에서도, 임신 중에도 멈추지 않고 할 수 있는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으로 글쓰기를 떠올렸다. 입으로 떠드는 것도 좋아하지만, 과학책 읽는 것도 나의 중요한 취미였다. 내 이름으로 과학 교양서를 쓸 수 있다면 그것 참 멋진 일이리라 싶었다. 게다가 강연도 엄연히 구조화된 논지가 있어야 해낼 수 있는 일이기에, 강연 대신 글을 쓴다는 발상은 무척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글쓰기는 어쩐지 더 막막한 일이었다. 나는 글을 쓰도록 훈련된 사람이 아니었다. (전문 강연자도 아니면서 수십 수백 앞에서 강연을 한 것은 괜찮고...?) '과학을 쉽고 즐겁게 설명해 드립니다!'는 젊은이들의 발랄한 캐치프레이즈에 어물쩍 묻어서 활발한 대중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작문'의 세계는 더 점잖고 체계가 잡힌 배움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과학저술가 양성과정에 무려 재수 끝에 합격해서 글쓰기를 배울 기회를 얻었다. 멘토 하리하라 님을 비롯해서 이명현 박사님, 장대익 교수님 등등 유우명한신 분들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백승권 작가처럼 작문에 특화된 강사도 있었지만, 강의 내용 중 일정 부분은 과학 그 자체였다. 이토록 철저하게 '과학자의 글쓰기'로 기획된 강좌는 그 이전에도, 앞으로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교육 과정은 안타깝게도 현재는 운영하지 않고 있다.)
조별로 진행하는 과제와 수업도 있었다. 내가 속한 조에는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을 비롯해서 생명공학 종사자인 브런치 작가 캬닥이님, 의공학 연구자 선생님이 속해 있었다. 멘토인 이은희 작가님도 생물학 전공이니 굉장히 균질성이 높은 집단이었다. 나를 포함한 참여자들은 사고방식과 논리를 구성하는 기조가 매우 유사했다. 한 마디로 같은 언어를 쓰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과학 커뮤니케이터 사이에선 고령인 내가 여기선 막내 그룹에 들어왔고, 무려 글쓰기 공부를 하는 중이라는 부담감에 언행도 더 점잖은 척 해야만 했다.) 덕분에 나는 초보였지만 수업에 편안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결과도 자랑할 만했다. 최종 과제로 대상을 탔다. 이후에는 출간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2025년. 글은 계속 쓰기는 하지만 여전히 고민이 많고 발전은 더디다. 첫 책으로 받은 과분한 언론사 서평들은 황홀했지만 정작 판매는 시원치 않았고, 브런치는 갈팡질팡하는 나를 조회수 사냥꾼이 되도록 유혹했다. 그때 브런치의 또 다른 아웃사이더(?) 배대웅 작가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배 작가님이 스스로를 '과학 커뮤니케이터'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분은 높은 경지에 오른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틀림없었다. 과학자가 쓰는 과학 글은 장점도 확실하지만 한계도 있다. 한편 배대웅 작가님의 책을 읽어보니 문과 전공자로서 접근하는 신선한 시각이 매력적이었다. 팬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감사하게도 작가님이 열어주신 온라인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무심코 이 세미나가 예전 참여했던 과학저술가 양성과정과 유사하게 흘러가리라고 생각했다. 작가님이 논픽션을 다룰 것이라고 예고했기 때문이다. (배작가님->과학책 쓴 분->과학 저술 세미나?) 하지만 차이가 많았고,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더 좋은 일이었다. 세미나는 글쓰기의 일반론에 가까웠으며, 예문은 풍부한 문학적 저장소에서 길어 올려졌다. 사실 처음엔 무척 낯설었다. 비문학 세미나니까, 참고 문헌도 비문학일 것이라고 - 혹은 그래야 한다고 -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발제문을 읽고 의견을 나누며 느끼게 된 것은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 작가가 고민해야 마땅한 지점은 문학이건 비문학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참여하신 브런치 작가님들은 글 자체에 대한 소양과 깊이가 풍부하셨다. (그래서 나만큼 낯설어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일례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용하는 발제문을 놓고 이런 질문이 오갔다. "하루키의 책 중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이 무엇인가요?" 아아... 나는 차마 하루키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고백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유익한 시간이었다. 내가 가장 모르는 분야가 문학과 인문학이니까. 세미나 시간이 아니었다면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의 그람시의 "이성으로는 비관하더라도, 의지로는 낙관하라"와 같은 멋진 문장을 만나지 못했으리라. (다음 책에 인용하고 싶다.)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글을 접할 기회를 가진 것은 나의 고질병인 읽기 편식에 도움이 되었다. 세미나에 참석한 모든 작가님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은 이유다. 글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는 분들에게 배운 점이 많다. 다만 세미나는 서로 어우러지는 직접적 소통이고, 책은 명확한 독자층에게 수신되는 미디어다. 배대웅 작가님이 글쓰기에 대한 책을 내신다면, 본인만의 특장점을 더 뾰족하게 가다듬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문헌에 대해 아주 깊이 파고들고,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함의를 모두 고려하고, 구조적 완결성을 갖추면서, 박진감 있게 읽히는 논픽션을 작성하는 법. 왜냐하면 내가 그 노하우가 궁금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