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동아리 후배 L의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원래 조부상은 애매해서 연락 자체를 돌리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고, 조문을 직접 가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시국도 시국인지라 부모님께서도 뭐 하러 가냐는 눈치셨지만, 별생각 없이 다녀왔다. 돌아가신 친할아버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마침 L의 할아버님을 모신 장례식장도 친할아버님의 장례식을 치렀던 같은 병원이었다.
나는 조부모님들과의 추억이 많은 편이다. 어렸을 적에는 외할아버지의 약국에서 거의 자라다시피 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등에 업힌 기억보다 외할아버지의 등에 업힌 기억이 더 선명할 정도다. 외할머니께서도 나를 정말 예뻐해 주셨고. 친할머니는 아버지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셔서 얼굴조차 뵌 적 없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친할아버지한테 장기와 화투를 배웠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워낙 많다 보니 조부상, 조모상이라는 말만 들어도 괜히 마음이 울컥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굳이 갈 필요 없다고 하는 장례식장도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빠지지 않고 다녀오곤 했다.
특히, 모시고 살던 친할아버지께서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다음부터는 정말 남일 같지 않았다. 친할아버지께서는 1924년생이신데 여든 중반이 넘어가시면서부터 새벽 2시에 돌아가신 형님이나 고향 사람들이 찾아왔다며 집 밖에 나가려고 하시는 이상 행동이 잦아지셨다. 급기야는 곧잘 다니시던 동네에서 길을 잃고 버스로 3,40분 거리까지 걸어가셔서 한참을 찾으러 다닌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새벽에 담뱃불을 붙이신 채 소파에 앉아 계신 것을 발견해 황급히 방으로 모셔야 했다. 치매가 시작된 것이다.
점차 빈도수가 심해지면서 온 가족이 밤새 잠을 못 자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친할아버지께서는 치매의 영향과 더불어 잠 자체가 많아지셔서 완전히 불규칙한 수면 패턴을 보이셨다. 자연스럽게 밤에도 ‘형님이 찾아왔다.’라며 밖에 나가시려고 했다. 낮에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어두운 밤에 잘못 나가셨다가 사고라도 당하실 가능성이 있으니 못 나가시게 말릴 수밖에 없었는데 나나 부모님을 알아보지 못한 친할아버지와 대판 싸우기도 했다. 결국 2011년 요양병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내년은, 그렇게 매년 좋아지셨다, 악화되셨다를 반복하던 친할아버지께서는 마침내 2017년 영면에 드셨다. 놀랍게도 내 자신이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쓰레기인가 싶을 정도로 돌아가셨다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입관할 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화장장의 화로로 모셨을 때는 꽤나 눈물을 흘리긴 했는데, 진짜 순수하게 슬퍼서라기보단, 서럽게 우는 아버지나 고모님들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물론, 정말 아무 감정이 없었다는 얘긴 아니다. 그저 내가 15년 이상 모시고 살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만큼 많이 슬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는 얘기다. 돌아가셔서 슬프다는 생각보다는 살아계실 때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본 적이 없다는 죄책감이 오히려 더 컸다.
시간이 지나 J와의 이별 사귄 적도 없고, 헤어지잔 말도 한 적이 없으니 이별이라는 말이 좀 웃기지만을 겪고 나서야 친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왜 그렇게까지 슬프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J와는 오피셜로 사귄 적은 없지만, 당장 친구들에게 ‘나 J와 결혼한다.’라고 말해도 ‘그래 니들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고등학생 때 만나 10년 이상을 소울 메이트로 지내왔으니까. 2018년 내가 퇴사할 무렵 J와도 연락을 끊게 되었는데, 그동안 J와 함께 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힘들었어야 정상이었다. 10년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마지막 통화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서 J가 없다는 상상을 해본 적조차 없었는데 그게 현실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정식으로 사귀자고 말한 적이 없어서였는지는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자 친구가 없던 나에게 J는 1순위 이성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J가 없는 일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 J와의 이별은 큰 충격으로 남았어야 했다. 실제로 A라는 친구에게 고백했다가 차였을 때조차 제법 긴 시간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J 때는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별 감흥이 없었다.
단순히 J보다 A를 더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J와의 관계가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아침에 문자로 시작해서 전화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시절을 지나, 일주일에 1,2번이 한 달에 한두 번이 되고, 또 분기에 한두 번으로 연락 빈도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헤어지기 직전에는 J가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농담 반, 진담 반 내가 J에게 ‘강아지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라고 물은 적도 있었다. 이별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헤어질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친할아버지를 요양병원으로 모신 후 명절이면 할아버지의 건강이 늘 화두에 올랐다. 솔직히 맨 처음 돌아가신 형님이 찾아왔다’ 같은 말을 하셨을 때부터 속으로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때가 되면 죽은 지인이 데리러 온다는 건가.’ 생각했었지만, 행여나 부정이라도 탈까 봐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었다. 부모님이나 친척분들도 비슷했는지 한 번도 돌아가시는 거 아냐? 같은 말은 하지 않았는데 요양병원에 모시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올해는 넘기시지 못할 거 같은데, 내년에는 힘들지 않을까? 같은 얘기들이 되풀이되었고, 돌아가신다면 어디에 모실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슈가 되었다. 충남의 선산에 계신 할머니와 합장을 할지, 이장을 할지, 혹은 납골당에 모실지 등. 그때마다 난 괜히 기분이 찜찜했지만, 어른들의 이야기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를 미리 모시고 사진관에 가 영정 사진을 찍고, 수의를 맞추며, 이별을 준비했다.
2011년에 요양병원에 모시고 2017년에 돌아가셨으니,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을 이별을 준비해왔던 셈이다. 어느 날 날벼락처럼 들이닥친 죽음이 아니라 ‘그럴지도 모르겠다.’라고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해온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별을 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드라마든, 영화에서든 연인과 헤어지고 소위 말하는 폐인처럼 지내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다른 장면들은 몰라도 이별만큼은 때론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경우도 많다. 죽음이 아닌 단순히 연인 간에 헤어지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이별은...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이별을 겪으면서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이별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싶은 사람은 없더라도, 이별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무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죽음만큼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별이니까.
당연한 얘기겠지만, 갑작스럽게 닥치는 각종 사고와 병마를 사람의 힘으로 일일이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떠나는 이는 남겨진 이에 대한 마지막 말을 전할 준비가 필요하고, 남겨진 이는 떠나는 이가 편히 떠날 수 있도록, 남은 사람들끼리 잘 버틸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유서 한 장, 영정사진 한 장 없이 떠나보내게 되면 미안함과 죄책감 등이 더 크게 다가올 테니까. 최소한 마음의 준비를 해두면 조금은 슬픔을 덜어낼 수 있으니까.
준비한다고 해서 슬픔이 0이 되진 않을 거다. 그래도 아무 예고 없이 귀신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공포영화보다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고 보는 공포영화가 덜 무서운 것처럼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면 조금은 덜 슬퍼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