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3명의 통화 소리를 듣게 됐다. 의도한 건 아니고 안 들을 수 없을 만큼 소리가 크고 또렷했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한 명의 통화 내용은 '왜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했냐, 거봐라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 아니냐'였다. 직장 상사로서 하는 말일까? 아빠로서 자식에게 하는 말일까 궁금했다. 더불어 나는 저런 말을 누구에게 했는지를 돌아보며 10걸음쯤 걸었다.
두 번째 사람도 통화 중이었다. 은행나무 옆에 서 있었고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직장인 듯했다.
그분이 주로 한 말은,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만한 사정이... 아, 네.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 11시까지 보고서 올리겠습니다'였다. 변명을 하려다가 마지못해 받아들이며 급하게 마무리하는 듯했다.
세 번째 사람은 2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애인하고 통화하는 듯했다. '그래서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래서 해줬잖아. 더 어떻게 하라고' 꽤나 답답해하는 듯했다. 한숨소리가 컸다.
퇴근길에 우연히 들은 어른 3명의 말을 듣고 질문이 생겼다. '3명의 말은 다르지만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무엇일까? 어른은 무엇일까? 어른의 말은 아이와 어떻게 달라야 할까?' 그 질문을 들고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금 걸었다.
묘하게 비슷하다고 느꼈던 건, 전화 너머에 있는 사람이든 전화를 받고 있던 사람이든 서로의 마음이 부딪혔다는 것. 그 어느 한쪽도 마음이 다정해지지 않았을 거란 추측이었다. 물론 뭐 항상 다정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3명의 저녁은 왠지 맥주 한 캔과 함께 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른의 대화란 주로 뭘 해달라는 요청이나 지시 사항, 상대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질문, 변명, 내 생각이 맞다고 우기거나 싸우는 말이 많다. 어른의 말은 무엇일까? 진짜 어른은 어떤 말을 할까? 가만히 생각해 봤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 계신다. 그분들은 어떤 말을 어떻게 하시지?
그분들의 공통점 3가지는 이렇다. 사람에게 관심이 있고, 바라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신다.
1. 상대의 지위, 나이에 상관없이 오직 그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
진짜 관심. 상대방이 정말 잘 지내고 있는지, 그 사람의 마음이 괜찮은지 물어보신다. 잘 지내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신다.
2. 상대의 안부를 묻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안부를 물었으니 너도 나에게 물어야지' 라며 은연중에 댓가를 바라는 일은 없다. 자신만 상대에게 관심을 갖고 안부를 묻는다며 억울해하지도 않는다. 상대가 자신에게 자주 안부를 묻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도 않는다.
3. 안부를 묻든 혼을 내든 그 마음을 상대방에 맞게, 상대를 위해서 표현하신다.
상대방이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잘 모른다. 더구나 표현도 안 하면서 상대가 알아주길 바란다. 내가 이런 마음이니까 당연히 알 거라고 착각한다. 그건 표현하기 귀찮아서라기보다, 내가 표현했을 때 돌아올 상대의 반응이 어떨지 몰라 두려운 마음도 있다. 진짜 어른은 그런 두려움마저 없다. 그저 표현하신다. 너에게 관심이 있음을, 그저 행복한 지를 묻고 그 마음을 표현해 주신다.
그런 어른의 말이라면 그게 혼내는 말이든, 걱정이든 전부 감사하다. 그 크고 따듯한 마음을 받을 수 있어서.
나는 언제쯤 어른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작아지지만, 죽기 전엔 할 수 있으려나 싶어서 조바심도 나지만 그래도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오늘이 있어서 다행이다.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침에 아들이 한 말이 생각났다.
"엄마, 내 방은 내가 환기시킬 테니까 엄마가 문 열어 놓지 마!"
건조하고 퉁명스럽게 다짜고짜 말을 툭 던지고는 학교 다녀오겠단 인사도 없이 그냥 나가버렸다. 17살 아들이. 보통은, 아들이 이럴 땐 마음이 서글펐다. 자책도 했고,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아침부터 한다는 소리가,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나 싶어서 서글펐고
왜 내가 그 좋아하던 일까지 그만둬 가면서 저 애를 키웠나 싶어 자책했고
나는 고작 17살짜리 말에 휘둘려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드는지 그런 자신을 원망했다.
역시 엄마의 자격이 없다며 아침을 온통 심란하게 만들었다. 돌아보니 마음이 진짜 작았다. 내 마음 크기는 병뚜껑만 한 모양이었다. 내가 느낀 서글픔, 자책, 원망이 과연 가치가 있는지 하나하나 뜯어봤다.
1. 서글픔을 느꼈던 이유는 나를 지키기 위한 감정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아들을 무시하거나 한심해하며 화냈다면 아이를 다치게 하고 몰상식해 보이니까, 그런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안전한 감정을 선택한 거였다. 한심해하며 화내는 걸 아이에게 내뱉으면 무기가 되고 서글픔은 혼자 껴안고 있어도 되니까 슬픔을 선택했던 거다. 진짜 슬픔이 아닌, 나를 지키기 위한 불필요한 감정일 뿐이었다.
2. 내가 희생했다, 내가 애지중지 널 키워냈다, 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었다. 내가 해 준 것만 생각했다. 부모는 자식에게 잘한 것만 생각하고 자식은 부모가 자기에서 서운하게 한 것만 기억한다더니, 딱 내 얘기였다.
너를 키우기 위해 포기한 커리어, 씻고 자고 먹는 모든 일상을 제대로 못한 채로 키웠다는 생각이 여전히 있었다.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바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대우를 받게 돼도 괜찮을 만큼은 아닌 모양이었다. 너한테 못해준 게 뭐가 있냐는 억울함까지 있었다. 그래서 아들이 퉁명스럽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따듯한 인사 한마디 없이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는 게 서운했다. 자식에게 바라는 게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해주었다는 마음이 있으면, 한순간에 마음은 지옥이 돼버린다.
지금 이 순간보단 나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아들에게 무엇을 바랐는지 다이어리에 디테일하게 써보았다. 아이가 한 14살 정도까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말해주길 바랐다.
'엄마, 지금 내가 이러이러하니까 환기는 내가 할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웃으며 가면 얼마나 좋나!
이 문장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아들이 어른이길 바랐다는 걸 알았다. 상대의 눈을 보고 마음을 살피며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다정하게 전달하는 것은 진짜 어른이어야 가능한 거였다. 퇴근길에 우연히 '귀'로 만난 그 3명도 나도, 아직은 어른의 말을 할 줄 모르는데, 17살짜리한테 바랬다니!! 다이어리를 누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얼른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