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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친구랑 가고 싶어요, 너 말고

성격장애 상사와 내돈내산 여행

D는 자신의 모든 언행을 ‘다 너를 위해서‘라 주장하고, 자신의 뜻에 동의하지 않으면 ‘멍청하고 생각이 짧아서’라며 무시한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다.

타인을 통제하고자 하는 나르시시스트들에게 가스라이팅은, 숨 쉬듯 일어나는 삶의 방식이다.

가스라이팅은 주로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데, 나는 D와 한순간도 친하다 여기지 않았지만 D는 자신이 직원들과 매우 친하다고 믿는다. 내 가족은 집에 있다고 외치는 다비언니의 노래를 사내방송에 신청해 봐도 우리가 가족 같음을 철석같이 믿는 D의 사고방식에는 변함이 없다.




D에게는 2~3년을 주기로 도지는 고질병이 있다. 그건 바로 ’직원 복지의 일환으로 여행 추진하기‘이다.


D는 직원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 우리를 위한 복지혜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회사는 50인 미만의 작은 기업이지만 업계에서는 퍽 이름이 알려져 있다. 한창 잘 나가던 회사의 상황에 기분이 좋던 D는 어느 날 직원들 다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게 어떠냐며, 어디를 가면 좋을지 의논해 보라고 했다. 일정은 3박 4일, 하루 근무를 빼고 주말과 창립기념 휴일을 포함한 날이었다. 비용의 절반은 회사에서 지원, 나머지는 개인 부담이라고 했다.

회의실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감정이나 욕구에 무관심하고,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그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지 여부는 D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직원여행은 대표인 D가 ‘우리를 위해’ 베푸는 혜택이므로 당연히 우리는 감사하며 받아들일 일이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판단할 때 D에게 정면에서 반론을 제기해 봤자 화만 부르고 결과는 변함없음을 터였다.


D는 자신이 우리에게 ‘하루의 휴일’을 제공했다 여기고, 나는 ‘나의 쉬는 날 3일’을 빼앗겼다 여긴다. D는 회사가 ‘여행비용을 절반이나 지원’한다고 생각하고, 나는 ‘일하면서 돈까지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이엔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흘렀고 그건 대화를 통해 좁힐 수 있는 간극이 아니었다.

D는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하고 유능하다는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에, 나와 생각이 다른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내 생각과 다르다면,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는 것이 나르시시스트들의 사고방식이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 생각, 처지는 그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자료출처: 사피언스 스튜디오, 김경일 교수님


회의의 탈을 쓴 통보는 그렇게 끝났고, 한마음으로 미적미적 여행 추진을 뭉개던 중 계속되는 D의 독촉 끝에 여행지 선정이 시작되었다. 여기가 낫다, 저기가 낫다, 비용이 얼마다, 의욕 없이 뱅뱅 돌던 논의는 결국 터져버렸다.

모두가 의무적으로 여행에 참여해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물음이 삼삼오오 모인 직원들 사이에서 새어 나왔고, 임원들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커진 불만의 소리에 D가 없는 긴급 직원회의가 열렸다. 일단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여행 경비가 수십 만 원이고, 상당수의 직원들이 최저임금을 겨우 웃도는 박봉인지라 무조건 강요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D는 부모님한테 달라 그럼 되지 않냐는 멍멍이 소리를 지껄였었다.


끝내 다수결로 여행 진행 여부를 결정하자는 말이 나왔고 무기명 투표가 진행되었다.

나는 갈등했다. 본심은 당연히 조금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근무일을 빼주고 비용을 다 대줘도 가기 싫은 직원여행인데 내 시간과 돈을 바쳐가며 가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러나 D를 제외한 다른 동료들과는 꽤 사이가 좋았고, 사적으로도 가깝게 지낸 것이 문제였다. D를 오래 겪어 온 선임들은 여행이 무산되어 D의 심기가 상할 것을 진심으로 염려했다. 그리고 D가 그래도 우리를 생각해 제안한 것인데 걷어차는 걸 불편하게 여겼다.


돌이켜보면 그건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의 사고방식이었다.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유발해 상황을 통제하고자 하는 건 가해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하지만 아직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고, 나는 동료들의 마음에도 약간은 공감이 갔다. 가스라이팅 가해자에게 공감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걸, 나를 우선순위에 두고 거절하는 게 옳다는 걸 당시엔 미처 몰랐다.


고민 끝에 나는 찬성에 표를 던졌다. D의 마음이 상할까 하는 우려보다는 D의 눈치를 살피며 마음 졸이는 동료들이 안쓰러워서.

그러나 결과는 과반수의 반대. 여행의 파투였다.


그리고 D의 인성도 파탄 났다. 사실 원래 파탄 난 인성이지만 평상시에는 아닌 척하는데 제 뜻을 따르지 않자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냈다.

진정 ‘직원들을 위한’ 여행이었다면 당사자들이 싫다고 했을 때 마음은 서운할지언정 받아들이는 게 당연한 것을, 실상은 지극히 자신의 만족을 위해 기획한 여행이었기에 ‘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것에 D는 분노했다.

그래서 괘씸한 것들이 감히 내가 베푸는 은혜를 거절했다며 노발대발했다. 직장 상사와 함께 하는 여행이 싫고, 근무 외 시간을 들이는 게 싫다는 직원들의 마음은 D에겐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였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돈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D에게 ‘여행은 가고 싶어 하면서 지들 돈은 쓰기 싫은 이기적인 것들’이 되었다.

다시는 너희들과 여행 같은 건 가지 않겠다며 성질을 냈다. D는 그게 협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나 나에겐 몹시 반가운 말이었다.

돈을 주고 가자 해도 싫은 게 너와의 여행이라는 것을 D가 꼭 알았으면 좋겠다. 돈을 더 내고 휴가를 다 소모해도 여행은 친구랑 가고 싶지, 너랑 가고 싶지는 않아요.


D는 그 후로 한동안 온몸으로 기분 나쁨을 표 냈고,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들은 가시방석 같은 나날을 보냈다.

나는 D의 간헐적 폭언을 듣는 것과 D와 3박 4일을 함께 하며 내 돈, 내 시간 쓰고 생색은 D가 내는 꼴을 보는 것을 비교하며, 전자가 썩 견딜만한 선택지라고 위안하는 걸로 끓는 속을 다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가 한 말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하며 뻔뻔하기 그지없는 D는 그로부터 3년 후 다시 직원여행을 추진한다. 여행을 극구 반대하던 직원들은 그 사이 D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퇴사를 했고, 비교적 순응적이었던 새 직원들로 다시 조직된 회사는 마침내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 여행은 나에겐 내돈내산으로 가고 싶은 식당 하나 고를 수 없었던 (가)족 같은 시간으로 남았으나 D에겐 ‘너희가 너무 즐거워해서 나도 기뻤던’ 시간으로 오래도록 추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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