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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친목인가

칠순잔치는 회사 말고 집에서 하세요

우리 회사에는 친목회가 있다.

월 1만 원 정도의 돈을 모아 직원들의 생일파티나 회식 등에 보태 사용한다. 소규모 회사에서 동료들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함이었으나 조직 구성원들이 바뀔 때마다 호불호가 갈렸다.


대체로 E 성향의 직원들이나 조직의 윗분들은 생일파티를 유지하는 걸 선호했고, 나머지는 소정의 선물만 전달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걸 원했다.

나는 후자였다.

생일파티는 아무리 간소하게 해도 세팅을 하고 치우는데 손이 필요하다. 할 일이 차고 넘치는데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사서 하고 싶지 않았고, 전체회의나 다과모임만 있으면 나타나 제 얘기만 하기 바쁜 D도 싫었다.


D의 얘기 태반은 자기 자랑이거나 생색내기, 타인 비하다.


나르시시스트들은 늘 주변의 인정이나 칭찬, 부러워하는 반응을 기다리기 때문에 자기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고, 원하는 반응이 올 때까지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한다.

D는 사무실 전체가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로 매일 자화자찬을 하면서도 모자라는지 직원들이 모이는 자리만 있으면 귀신같이 나타나 떠들고, 다른 사람이 말하면 흐린 눈을 한다.

자료출처: 미친사랑, 오은영 박사님

지금은 그냥 축하멘트만 하는 걸로 직원들의 생일을 넘기지만 한때는 파워 인싸, 파티마니아의 주도 하에 매달 이벤트 같은 생일파티를 치렀다.

성대하던 파티가 간소화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맞물렸으나 결정적인 원인은 역시 D였다.


칠순이 되도록 은퇴도 안 한 D의 70번째 생일


때는 바야흐로 D의 칠순. 보통이라면 진작 정년퇴임을 했을 나이이나 D는 자신의 업적이자 인생인 회사를 타인에게 넘길 마음이 조금도 없다. 자신이 이제 남으면 얼마나 남았겠냐며 초탈한 척을 10년 전부터 했지만 사실은 더 큰 것을 쥐기 전까지는 지금 가진 것을 내려놓을 마음이 없다.


그렇게 D는 기어코 칠순을 회사에서 맞이했다.


친목회 담당자는 최대한의 정성을 들여 사내 카페에 D의 잔치상을 마련했다. 직접 만든 간식과 음료, 과일 등을 차리고 꽃과 향초로 장소를 꾸몄다.

D는 친목회비를 1원도 내지 않지만 친목회 예산의 절반은 D의 생일파티를 위해 사용된다. 따로 선물을 주는 건 아니라 다 같이 먹고 마시는데 쓰이지만 어쨌든 D는 온전히 직원들 돈으로 차린 생일상을 받는 것이다.

물론 D는 그에 대해 전혀 고맙게 여기지 않으며,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라고 여긴다.


그래서 기껏 마련한 칠순잔치에 감사하는 대신 성에 차지 않는다며 참석을 거부했다.

미리 사내 카페에 모인 직원들이 수차례 모시러 갔음에도 사무실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안 가겠다며 버럭 성질을 냈다. 진심으로, 치매가 온 건 아닐까 의심했다.

오다 주운 선물에도 의례적인 인사치레는 하는 게 인간관계의 상식 아니던가.

부모도 아니고 스승도 아니고, 상사의 칠순잔치를 해주는 부하직원들이 어디 있으며, 기껏 준비한 자리가 자신의 격에 맞지 않는다며 지척에서 불참하는 어른이 어디 있는가.


결국 D의 칠순잔치는 비슷한 시기에 생일이 있는 다른 직원의 생일파티로 바뀌어 D 없이 끝났다.

그리고 참석을 거부한 걸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D는 간부들을 불러 모아 그 자리가 얼마나 격식에 어긋나고 경우 없는 일이었는지를 성토했다. 한 번도 아니고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이 대우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쉽게 상처받고 분노한다.

끝내 D는 칠순잔치를 주도한 친목회 담당자를 불러 폭언을 쏟아냈다. 요지는 ‘네가 몹시 배운 게 없고 생각이 짧다는 것’이었다.


몇 주가 지나도록 계속되는 생일 이야기에 견디지 못한 임원 한 명은, 직급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모여 어디 호텔 식사자리라도 갖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는 오래도록 D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 D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이요, D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인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게 가스라이팅인 줄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흡사 볼드모트의 호크룩스처럼 D의 영혼 한 조각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용없어요. 이제와 그런다고 그분이 만족할 것 같나요? 오히려 역시 자기가 옳았다며 더 기세등등해서 앞으로 몇 년은 두고두고 곱씹을 걸요.”


나는 호크룩스의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다행히도 다른 간부들은, 불편한 마음을 갖고도 내 말에 동의해 그 제안은 무산되었다. 그냥 D가 그 일을 잊을 때까지 조용히 거리를 두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르시시스트에게서 살아남으려면, 그에게 비난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그 비난은 정당하지 않다. 터무니없는 폭언에 휘둘려 나르시시스트들의 뜻에 따르기 시작하면 그들의 착취는 더 심해진다. 제아무리 헌신해도 나르시시스트들은 그것이 자신이 받아 마땅한 대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마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함부로 대하는 게 그들이다.

욕을 먹더라도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야 한다.


단, 나르시시스트가 상사일 때는 일을 잘해서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행히 나는 업무적으로는 D에게 인정을 받았고, 그래서 D는 뒤에서 내가 싹싹하지 못하다 욕을 할지언정 노골적으로 막대하지는 못한다.

물론 그 인정도 자기 밑에서 잘 배운 덕이라는 나르시시스트적 사고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D 덕분에 그 후로 모든 생일파티가 폐지되었다. 파티가 열릴 때마다 D가 칠순을 다시 상기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D의 생일은 그냥 넘어가기 껄끄럽다며 매년 그의 생일파티만 다과 하나로 간단하게 치른다. 그마저도 D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종류 선정부터 세팅 방법까지 신경 쓰는 다수의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다과상 같은 별 거 아닌 일에 대해 D의 비난을 너무 귀담아듣지 말라고. 좋아하지도 않는 남의 취향 하나 못 맞춘다고 내가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소한 것 하나하나 나르시시스트들에게 거슬림 없는 사람이 되는 건, 그에게 더없이 좋은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다. 내가 불편한 만큼 상대에게도 껄끄러운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나르시시스트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 글을 완결내고 출판하여 D의 은퇴선물로 주는 게 나의 소박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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