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는 보았나, 돈 내고 일하기
D에 대한 글을 쓰며 가끔은 너무 황당한 일들이라 ’혹시 남들이 거짓말이라 생각하지는 않을까‘ 싶은 우려도 든다. 하지만 이건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진실이고,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는 현실이다.
D가 자기애성 성격장애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지난 10여 년 간 겪을 만큼 겪어서 이제 새삼 놀랄 것도 없다 싶을 때쯤이면 D는 질리지도 않는지 새로운 에피소드를 자꾸 누적한다.
레퍼토리라도 다양하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 그렇지도 않다.
D의 말은 항상 자신의 수고나 아이디어가 얼마나 훌륭하며 대단한 것인가로 시작한다. 그 과정 안에서 남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시시콜콜한 사실들, 주로 자신이 힘들었던 일이나 타인의 칭찬 등의 썰을 길게 늘어놓는다.
다른 회사나 직원들에 대한 평가절하도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다. 타인을 깎아내리면서 동시에 자신은 추켜올려 내가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임을 강조하고 돌아올 찬사를 기대한다.
기대한 대로 만족스러운 반응일 경우 다음에는 그 반응에 대한 자랑까지 포함하여 똑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되고, 기대한 반응이 오지 않을 경우 상대가 자신의 위대함을 알아볼 수 없는 무능력자라는 비난이 포함된다.
매일 D를 접하는 직원들의 반응은 대체로 형식적인 박수나 침묵이다.
그래도 이전엔 몇몇 중간관리자들(a.k.a 가스라이팅 피해자)이 D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아부성 발언들을 한 번씩 하곤 했는데 지난해 ‘돈 내고 일하기’ 사건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달라졌다.
D와의 에피소드를 논할 때 탑 3 안에 꼽힐 그 사건의 시작은 코로나 거리두기가 막 풀릴 시점이었다.
우리 회사에는 연 1회, 3박 4일 정도로 진행되는 해외 행사가 있다. 코로나로 인해 3년 간 진행되지 않았던 행사는 방역이 완화되자마자 빠르게 추진되었다.
업무분장은 되어 있었으나 예측할 수 없는 방역지침 때문에 아무것도 준비한 건 없었고, 급하게 진행하는터라 실무진들은 최대한 간소하게 진행하고 싶었으나 오랜만에 행사에 좀 더 규모를 키웠으면 하는 대내외적 요청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 ‘내’는 D다.
D는 더 많은 참가자들에게 생색을 내고 싶고, 회사를 알리고 싶어 늘 모든 행사의 규모를 키우고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업무는 늘어나도 직원은 늘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행사를 추진할 때마다 D는 인력확충과 초과수당을 호언장담하지만 실제로 지켜진 적은 별로 없다. D는 자신이 받아가는 돈은 ‘받아 마땅한’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타인은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소모품으로 여기기 때문에 비용을 지불하기 아까워하고, 어떻게든 적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참 어떻게든 해내는 직원들이 있기에 매번 그의 억지는 통용되고 만다.
이번에도 어쨌든 실무진들은 최선을 다해 행사를 준비했다. 문제는,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는 점이었다.
항공료와 숙박비, 버스 대절, 식비 등이 전반적으로 다 올라 예상비용이 훌쩍 뛰었다.
게다가 D는 간만에 해외 행사라는 이유로 직원 전체가 함께 다녀오길 원했다. ‘해외 행사=일하는 사람들에게도 힐링’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논리였다.
참가인력이 늘어나면 회사의 부담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D는 그 대안으로 자신이 6-70만 원 정도 기부할 테니 나머지 직원들도 10만 원씩 내라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냈다.
일하면서 돈도 내라니, 희대의 헛소리였다.
근로가 무슨 뜻인지는 아는 걸까. 돈을 내고 일을 하라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참신함일까.
심지어 응당 주어야 할 출장수당에 초과근무수당도 받지 못하는 판국이었다. 회사사정도 넉넉하지 않고, 공익적인 의미로 진행되는 행사인터라 내 노동력을 기부한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나는 이 행사가 나의 힐링이라는 데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만 했고,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카페조차 자유롭게 가지 못했다.
해외 한번 가기 어려운 7-80년대도 아니고, 일하러 가는 게 무슨 힐링인지. 차라리 업무에 필요한 최소인력만 가고 비용을 줄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나 D는 모든 직원을 데려가는 걸로 자신이 혜택을 베푼다고 생각하고 생색을 내고 싶어 했다.
아니 백번 양보해 여행이 어려운 누군가에겐 진짜 힐링이 될 수 있다고 쳐도, 생색을 내고 싶으면 제 돈으로 내든지, 왜 생색은 본인이 내고 돈은 내가 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의 입장에선 일도 하고 돈도 내고 D가 생색내는 꼴도 보아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차라리 10만 원을 내고 3박 4일 출근을 하지 말라 하면 오케이였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D의 생각을 전달하는 중간관리자에게 이건 틀렸음을 수차례 어필했다. 그들의 답은 하나같이 ‘알지만 어쩔 수 없다’였다. D에게도 말을 꺼내보았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이번 한 번뿐일 테니 그냥 넘어가자고도 했다.
그들이 나를 달래려 하면 할수록 분노만 치솟았다. 왜 부당한 요구에 대해 D를 설득하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을 설득하려 하는가.
아마 신입시절의 나였다면 그냥 욕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용히 퇴사각을 재든지.
하지만 나는 어느새 직장에서 중간 이상의 연차였고, 별 거 없지만 직책도 맡고 있었다. 이런 부당한 요구를 후임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게, 너무 창피했다.
그리고 이게 한번 별 반발 없이 받아들여지면 D의 특성상 우리에게 고마워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고 확신할 것이 뻔했고, 그럼 다음에도 비슷한 요구를 또 할 가능성이 높았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도, 당신 뜻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알려야 했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임원진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1. 다른 회사라면 마땅히 수당을 지불할 일을, 돈을 내면서 일하라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 옳은 말이지만 D의 성격을 알지 않느냐, 대신 행사 후 거하게 회식을 시켜주겠다.
2. 회식은 안 해도 상관없고, 돈을 내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먹고 마시는 돈을 내는 게 낫다. > 그럼 부담금액을 5만원으로 줄이는 건 어떠냐
3. 금액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일을 ‘수고’라고 생각하지 않고 회사 돈으로 ‘힐링’한다고 생각하는 마인드가 가장 큰 문제다.
되도 않는 제안들을 잘라내며 한창 열변을 토한 덕에 간부들끼리 긴급회의가 열렸다. 윗사람은 설득할 수 없고 아랫사람들도 설득하지 못한 간부들은 다른 대안을 마려하기 위해 고심했다.
긴 논의 끝에, 오랫동안 D와 함께 하며 D를 알만큼 아는 사람들은 그냥 돈을 내고 2, 3년 차의 직원들은 안 내든가 간부들이 대신 내든가 하기로 했다.
썩 마음에 드는 결론은 아니었으나 D는 남의 말을 들을 위인도 아니었고, 어쨌든 D의 요구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했기에 타협안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임원 한 명이 대표로 의견을 전달했고 D는 폭발했다.
(Co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