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를 돕는, 비뚤어진 우월감
나르시시스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는 ‘감히‘이다.
그들은 타인을 비난하며 자신의 우월감을 증명하려 애쓰지만 반대로 자신을 향한 비난은 아주 사소한 것도 참지 못하고 쉽게 격노한다.
나르시시스트들의 분노는 비난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그저 ‘감히’ 하등한 타인이 대단한 자신의 뜻을 거슬렀다는 데에서 온다. 요즘의 시선으로는, 지극히 꼰대스러운 발상이다.
D는 자신이 몹시 좋은 뜻으로 이 회사를 세우고 헌신하고 있으며, 본인이 솔선수범하여 기부를 했음에도 오래 함께한 아래 직원들이 자신의 뜻에 동의하지 않고 감히 반기를 든 것에 격노했다. 저연차 직원들만 빼겠다는 타협안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뜻을 거슬렀다는 게 중요할 뿐.
너희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공감 같은 건 D에게 불가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우리 회사는 사회복지에 가까운 일을 한다. 나르시시스트인 D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매우 선하고 공익에 앞장서는 인물이다. D 스스로도 본인을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은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한없이 약한 사람이라고.
가당찮은 소리다.
D가 강자에 강한 건, 늘 자신이 갑이라고 생각하는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D는 자신이 아주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선구자라고 생각하므로 누구에게든 자신을 내세우길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이용할 가치가 있는 강자에게는 ‘선의의 거짓말’을 비롯하여 환심을 사기 위한 온갖 방법을 다 쓴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은 모두 회사를 위함이라고 합리화한다.
또한 약자에 약한 것도, ‘자신의 우월감을 충족시켜 주는 약자’에 한해서만 발동된다. D가 베푼 은혜에 감사하며 마냥 굽실거리는 상대에게는 필요 이상의 호의를 베풀지만, 상대의 반응이 성에 차지 않는 순간 매몰차게 돌아서 먼저 준 것도 갚으라고 한다. 심지어 상대가 바란 것도 아니고 본인이 자진해서 베푼 것임에도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강자에 강함은, 강자든 약자든 일관된 기준과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똑같이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약자에게는, 동정하고 연민하여 은혜를 베푼다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온전한 내 덕이 아니기 때문에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운 좋게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갖고 태어났고, 운 좋게 학대하지 않는 부모를 가졌고, 운 좋게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서, 운 좋게 상식이 통하는 주변인들을 만났다.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가 노력한 부분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노력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기에 우월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응당 타인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D는 비뚤어진 우월감으로 남을 돕는다. 어떤 마음으로 돕든 도움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D의 나눔이 선의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나눔의 수혜자도 아니고 함께 나눔을 강요받는 입장에서는 D의 일장연설이 가당찮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기부란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서 해야지, 강압에 의한다면 강탈이나 다름없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건 기부를 강요하고, 내 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D의 태도였지만 자신이 대단히 선하고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D에게 자신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 직원들은 그저 ‘지 돈은 10원 한 장 쓰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것들’이었다.
괘씸함에 꼬장이 발동된 D는 나머지 비용도 다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티를 내며 직원들과 거리두기를 시전 했다.
그대로 끝났다면 나름대로 해피엔딩이었다. 기분은 상했지만 D의 뜻을 꺾었고, 거리두기 역시 바라 마지않던 바였다.
그러나 사건은 그렇게 순탄하게 끝나지 않았다.
사그라든 불씨를 들쑤신 건, 회사의 필요에 의해 단기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외국인 직원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모른 채 뒤늦게 격노한 D의 일장연설만 들은 외국인이 그럴싸한 주장에 홀랑 넘어가 10만 원을 쾌척한 것이다!
덕분에 D는, 잠깐 본 외국인도 제 뜻을 이해했는데 10년을 넘게 본 직원들이 제 뜻을 몰라준다며 2차전을 시작했다.
이 행사에서 아무 일도 맡지 않으며, 단지 여정에 동행할 뿐인 외국인과 실무를 맡아 뛰어다녀야 하는 직원들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은 D의 머릿속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있지만 모른 척 한 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D가 행사의 실무와 거리가 먼, 필수인력으로만 꾸리려면 배제될 것이 확실한 직원들만 따로 불러 10만 원 이야기를 다시 꺼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행사에 참여하게 하는 걸 혜택을 주는 거라 우길 수 있는 대상을 선별한 것 같았다.
결국 또 일부가 견디지 못하고 10만 원을 냈고, D는 그 사실을 나머지에게 알리게 했다.
분위기를 모르는 외국인만 그곳에 가면 제가 아는 맛집이 있는데 방문할 시간이 있을지를 물어보았다. 당연히 그딴 건 없었다. 멋모르는 외국인 노동자는 워라밸 없는 K행사의 쓴맛을 봐야 D의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깨달을 터였다.
어쨌든 다시 시작된 10만 원 이야기에 그렇지 않아도 좌불안석이던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이 결국 나를 설득하러 나섰다. 핑계인즉, 그래도 모시는 윗사람이 저렇게까지 나오니 그냥 사과하고 10만 원을 내자는 주장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답답함에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옳은 건 옳고 그른 건 그르다. 옳지 않음에도 상사의 뜻이라는 이유로 따라 준 세월이, D를 안하무인의 독재자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갑질이 힘을 갖는 건, 거기에 응해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주먹 쓰는 깡패들처럼 물리적인 힘을 쓸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사람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건 거기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아무리 돈으로 사람을 부리려고 해도 돈에 굽신거릴 사람이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D가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큰소리쳐도, 모든 직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D의 가스라이팅에 시달린 이들은 하나둘 백기를 들었고, 기어이 사과를 입에 올렸다.
나는, 10만 원을 내는 것보다 사과가 더 끔찍하게 싫었다. 그때만큼은 제가 옳다고 우겨대는 D보다 사과하자고 하는 중간관리자들이 더 싫었다.
D를 최악의 나르시시스트로 만든 건, D의 선천적인 기질 탓도 있겠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의 탓도 분명 있었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사과의 자리가 열렸다. 나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똥 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임원 한 명이 대표로 심기를 상하게 해 죄송하다는 말을 꺼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D의 토라진 속은 그 정도로 풀리지 않았고, 가스라이팅 피해자들도 더 간곡히 사과할 만큼 속이 없진 않았다. 첫마디 이후로 다들 입을 다물었고, D는 똑같은 레퍼토리만 반복하다 결국 사과의 자리는 무의미하게 파투 났다.
나중에 가장 중증의 가스라이팅 피해자(a.k.a 호크룩스)가 말하기를, 솔직히 너무 마음이 불편해 사과하고 10만 원을 내고 싶었지만 아랫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걱정돼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나 사실 중요한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나 갑질을 하는 권력자들을 대할 때 중요한 것은, 연대다. 권력자는 소수고 대중은 다수다. 소수의 권력은 사실 대중의 지지에서 힘을 얻는다. 다수가 굳건히 연대한다면 소수는 절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
D와의 에피소드 탑 3에 속할만큼 길고 갑갑한 사건이었으나 덕분에 직원들의 연대는 한층 굳건해졌다.
그 후로도 D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툭하면 10만 원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고 납득이 안 간다는 것이었다.
직원들이 사과를 하지 않으면 곧 은퇴할 거라며 으름장도 놨다. 어린애가 떼쓰듯 유치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자신이 매우 중요한 인재라고 믿는 나르시시스트나 할 수 있는 협박이었지만 D가 은퇴할 날만 손꼽는 사람들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당연히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D는 그 후로도 몇 번 더 은퇴할 거라고 큰소리쳤지만 어느샌가 번복하고 지금은 또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통탄할 일이다, 정말.
직원들 앞에서 그 정도로 호언장담했으면 창피해서라도 책임을 져야 할텐데, 나르시시스트들은 제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말을 바꾸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D가 은퇴하는 날 축하파티를 열고 10만 원쯤 기꺼이 쏘겠다고 약속했는데.
나는 D가 은퇴하는 그날까지 글쓰기를 지속할 생각이다. D가 속을 뒤집어놓을 때마다 새로운 소재라고 생각하며 폭풍집필을 하는 게 최근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새로운 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