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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tysense Oct 15. 2020

사무실 도둑을 잡았다

사무용품을 사도 사도 계속 없어지는 이유가 있지

나의 사무실 공간은 이 순서로 채워졌다.

- 모나미 153 - 빅펜 - 플러스펜


검정, 파랑, 빨간펜을 브랜드별로 사도 사도 일이 즐겁지 않을 때가 있다.

그다음 단계는 펜 이외의 것들이다.

- 포스트잇 - 페이지 디바이더 - 계산기


교보문고에서 알록달록 포스트잇과 페이지 디바이더를 들여도, 숫자 버튼을 누르는 촉감이 좋은 계산기를 들여도 회사 일이 즐겁지 않다. 그다음 단계, 문구류를 넘어선 사무용품이다.

- 스테이플러 - 제침기 - 문진


그러다 이제는 전자제품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이제부터는 단가가 높아지며 거침없어진다.

- 무선 마우스 - 무선 키보드 - 화면보호기 - 블루라이트 차단 기능 필름


하루는 사무실 전화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국 드라마 '24'에 나오는 짙은 회색의 버튼이 수도 없이 달린 멋진 전화기를 놓고 싶어서 바꿨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 두 달이 지나서 우리 회사는 사무실의 모든 전화기를 IP 전화기로 교체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나의 멋진 '24'전화기는 곧 우리 집 창고에 처박혔다.


나는 이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월급보다 책상 꾸미기 예산이 더 들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의 한 직원은 이쯤에서 멈추지 않고 고가의 빨간색 가죽의자를 들였다. 그 분은 인사이동 때마다 그 의자를 머리에 이고 다녔다. 그것을 보고 나는 블루라이트 차단 기능이 추가된 컴퓨터 화면보호기나 전화기에서 멈추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 과장님은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스탠드업 책상을 들이셨다. 회사 예산으로 가능한 직급에서는 의자, 책상 할 것 없이 가능하신 일이었다. 사비로 데스크를 꾸미는 나 같은 미생과는 직급이 다르니.


데스크테리어(deskterior)
: 'desk(책상)'와 'interior(인테리어)'의 합성어로 노동시간이 긴 선진국 등에서 사무실을 집과 같은 공간으로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대한민국 젊은 회사원들의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BBC)

여직원들의 책상은 민트색 키보드, 핑크색 프레임 액자, 진주 장식의 거울, 꽃 같은 것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지만 나의 사무실 공간은 얼핏 봐서는 주인의 성별을 구분할 수 없다. 굳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달력의 내 필체 정도.


나의 사무실 공간에서 최고가는 키보드, 블루라이트 차단 화면보호기이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내가 가장 아끼는 사무용품은 아니다. 의외로 나의 최애 사무용품은 제침기와 문진이다.


이게 도대체 얼마나 하느냐고, 구하기 힘든 물건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내가 가진 제침기와 문진을 사용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우리 회사에서만큼은 희소성이 있는 사무용품이다.

스테이플을 제거하는 용품은 다양하다. 이빨형으로 생긴 것도 있고, 자석이 붙어 있어서 스테이플(침)이 사방에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제거된 스테이플이 모아져 여러 번 제거한 후 한 번에 밀어서 버릴 수 있는 것도 있고, 한쪽 끝에 칼이 붙어 있는 것도 있다.


나는 제침을 하다 종이가 뜯겨 나가거나 한 번에 침이 뽑히지 않는 것이 불편해서 적당한 것을 찾던 중 대형 제본용을 구입했다. 침과 종이 사이로 제침기를 밀어 넣고 손잡이를 가볍게 누르기만 하면 부드럽게 뽑힌다.


문진은 두꺼운 서류나 책, 매뉴얼을 검토할 때 종이 무게를 못 이겨 책이 통째로 덮이거나 페이지가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소한 것들이 업무에 방해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들인 투명한 크리스털 문진이다. (진짜 크리스털은 아니지만)


이것을 눈독 들인 도둑이 우리 사무실에 있었다.


아침에 와 보면 제침기와 문진이 원래 자리에 있지 않거나 회의용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때가 있었다. 내가 제자리에 안 뒀나 싶어 그것들을 찾아 제자리에 두었지만 급기야는 이것들이 내 자리에서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다.


찾다가 포기하고 그전에 사용하던 이빨형 제침기를 사용하자니 자꾸 종이가 뜯겨 나갔다.

문진이 없어서 스마트폰으로 대신 종이를 누르다가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지고 미끄러져 책상 틈 사이로 빠졌다.


펜이나 포스트잇이 없어진 것과는 다른 강도의 화가 난 나는 사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 선배님, 여기요. 선배님 좋은 거 쓰시길래 제가 야근하면서 가져다 쓰다가 저도 모르게 제 서랍에 넣었어요. 흐흐흐 이거 진짜 좋은데요? 가끔 써도 되죠? 흐흐흐"


아, 이 후배 녀석. 제침기와 문진을 찾으며 눈이 뒤집힌 나를 보고 빙구웃음으로 선수를 치다니.


화가 있는 대로 났던 나에 비해 나의 최애 사무용품은 재빨리 주인을 찾아왔다. 화풀이를 할 도 없이 이렇게 사무실 도둑을 잡았다.(잡혔다. 또는 자수했다.)


사무용품을 사도 사도 끝이 없는 것은 후배 녀석과 같은 귀요미 도둑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무실을 내 집처럼 내가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는 것은 물건으로 채워질 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면서도 계속 사무용품을 사들이는 나,

그만 좀 사라면서도 내 사무용품에 눈독 들이는 우리 팀원들,

'데스크테리어(deskterior)'라는 근사한 타이틀까지 붙여준 누군가.


내가 언제 이 사무실을 떠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부서이동을 하게 되면 나는 내가 최고로 아끼는 제침기와 문진을 포함해 키보드, 마우스, 화면보호기까지 후배 녀석에게 물려줄 생각이다.


그 날에는 후배 녀석의 귀여운 도둑질도 끝이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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