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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Apr 02. 2017

60년생, 13학번 엄마

엄마의 졸업여행, 아들의 퇴사여행 - Prologue

어느 날엔가 부엌에서 땅콩을 볶던 엄마가 내게 말했다. 


"대학교는 다닐 만 해? 나도 공부를 좀 더 했으면 좋았을걸"


고소한 땅콩 냄새에 섞여 온 그 문장은 당연하지만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건 엄마도 한때는 스무 살이었으며, 꿈을 꾸는 소녀였다는 사실이었다. 그 시절 보통의 집들이 그러했듯, 엄마 역시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4남매의 막내딸에게까지 교육의 기회가 돌아가기엔 그 시절의 삶은 퍽이나 팍팍했을 테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그 지독한 클리셰와 마주해야만 했던 열아홉과 스무 살 언저리의 엄마를,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내 멋대로 엄마의 삶을 재단하는 건 오만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종종 엄마가 그저 '우리 엄마'로만 살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신문을 꼬박꼬박 챙겨보는 엄마는 나보다도 사회이슈에 민감했고, 역사에도 해박했다. 게다가 예술, 문화 방면에도 지식이 해박해서 어떤 영화에 어떤 배우가 나왔는지, 다른 작품은 뭐가 있는지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로 영화팬이기도 했다. 내가 퀸이나 비틀즈를 좋아하게 된 것도 순전히 엄마의 영향 때문인데,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퀸의 웸블리 스타디움 라이브를 비디오로 녹화해서 '퀸의 가장 역대급 라이브'라며 보여줄 정도로 확고한 음악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요리면 요리, 베이커리면 베이커리, 뜨개질이면 뜨개질 등, 그녀는 무엇하나 못하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내게 엄마는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아는 것도 많고 자기만의 취향이 확고한 멋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들에겐 세상 그 어떤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얘기를 종종하곤 했다. 그래서 엄마는 386세대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엄마는 60년대에 태어났지만, 8로 시작하는 학번은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엄마의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나는 배움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말로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대학생인 나는 엄마가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해 감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식탁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다가 엄마가 말했다.


"엄마 방통대에 원서 넣었어. 가도 괜찮지 아들?"

"응? 그래. 뭐 그런 걸 나한테 물어."


그런 내 대답을 들은 엄마의 표정이 환해졌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MT도 가고, 스터디도 하면서 TV에서 보던 대학 생활을 하게 되었다며 설레 하는 엄마의 표정은,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의 엄마는, 정말로 스무 살의 대학교 새내기 같았다.


사실 그 자리에서 나는 가까스로 뒷 문장을 삼켜야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삼켰던 뒷 문장은 "엄마도 이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엄마의 인생을 살아"였다. 나는 그걸 왜 나에게 묻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엄마는 엄마의 삶을 살라고. 왜 내 허락 따위를 구하려 하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짐짓 뚱하게 대답하며 못 다한 문장을 삼켰다.


2013년 3월, 60년생의 엄마는 그렇게 13학번의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잘 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전전긍긍하던 엄마는 그 모든 고민들이 무색하리만치 대학생활에 쉽게 적응했고, 2017년 2월,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엄마가 졸업을 앞뒀던 2016년 12월 무렵, 나는 1년 5개월 가량 다녔던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마침 회사도 그만뒀겠다, 엄마도 긴 대학생활을 끝내고 졸업을 앞두고 있겠다, 핑계가 좋았다. 나는 그렇게 그 해 말, 엄마를 데리고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탈탈 털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앞으로 쓸 여행기는 지난 2016년 12월 19일부터 2017년 1월 4일까지 떠났던 엄마의 졸업여행, 그리고 아들의 퇴사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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