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투명한 막이 나눈 세상은 차안과 피안 같다.
들판이 가물해지는 끝자락에서 회청의 굴곡이 이어지고 있다.
멀리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푸른 기운을 엷게 머금은 회색의 농담으로 채색한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저것을 두고 파랑을 머금은 유채색이라 불러도 되겠고 회색을 품은 무채색이라고 여겨도 괜찮겠다.
하늘의 경계선인지 땅의 경계선인지, 하늘과 땅의 실루엣이 한 치의 틈 없이 살갗을 맞대고 있다.
저곳에 다가 설 수만 있다면 세상의 끝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빛의 명암이 빚어낸 경계선은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일으킨 음의 파형처럼 높고 낮게 이어져 흐른다.
몇 주 전만 하더라도 갈아 놓은 얼음 같은 하얀 눈이 산꼭지마다를 감싸고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더듬기 어렵다.
지나간 계절을 추억하려는 것은 멀어져 간 날을 돌이키려는 것과 같아서, 행여 햇볕 아래에서라면, 부끄러움에 얼굴 붉어지기 십상이다.
이왕에 나선 여행길이니 ‘그때 만약..’을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못난 일은 없어야겠다.
사실 먼 산자락의 모서리를 덮고 있는 저 희뿌연 뭉치가 짙은 안개가 녹다 만 솜사탕처럼 엉켜 붙은 것인지, 생각 많은 하얀 구름이 게으른 걸음을 쉬고 있는 것인지, 걸음 무거워진 철 지난 계절의 잔상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냥 지난 계절이 거두어 가지 못한 '눈의 얼룩'이라고 여기기로 한다.
오늘이라는 날이 위치한 시간을 더듬어보면서 '분명 옳은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스스로를 토닥거린다.
“만년설은 아닐 텐데도 여태껏 떠나지 않은 것이, 혹시 더 따스한 햇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자꾸만 늘어나던 생각의 철길은 눈 덮인 들판의 작은 기차역에서 끊긴다.
지난 계절의 흔적 주변을 맴돌던 사색은 이윽고 토스카나의 들판길에 나선다.
하얀 눈의 싸늘함과 뽀얀 햇살의 따스함이 구분 없이 엮여 있는 뫼비우스의 띠를, 어쩔 수 없다는 듯, 이것이 운명이란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느긋하게 걸어간다.
시작이란 걸 알아차릴 수 없었으니 끝이란 건 결코 특정 지을 수 없었다.
하나의 계절이 또 다른 하나의 계절로 무심하게 이어져 흐르는 것과 같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이것과 저것을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세상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변덕 때문일 거야.”
세상은 앞과 뒤를 구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 펼쳐진 공간이다.
하긴 애초부터 앞과 뒤가 없었기에 세상은 '구분'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기에 인간에게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라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가마득한 선조 때부터 전해져 온 ‘변덕’이라는 속성 덕분이다.
인간의 변덕은 인간과 세상을 합리화하는 머리이자 가슴이다.
계절의 경계를 지나칠 때면 유독 센티멘털해지는 것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고개 내미는 변덕 때문이라고, 차창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에게 슬며시 말 건네고서는 눈을 감는다.
차창을 넘어 들어선 햇살이 검붉은 상형 문자를 눈꺼풀 위에 그려 넣는다.
생각이 걸어가고 있던 길에서 빠져나온 눈길은 다시 먼 산꼭대기에서 반짝이는 그것에게 멈춘다.
"녹지 않는 눈이라면 좋겠다."
이 계절에 토스카나의 끝자락에서 조우한 녹지 않는 눈이라니, 이어 다가올 햇살을 단단한 바위처럼 견뎌낼 수 있다면 좋겠다.
어딘가 허술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 바람에 입꼬리가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