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초입기의 카라바조에게는 당장에 머물 곳과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던 카라바조에게 한 곳에 정착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로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콜론나 가문(Colonna family)의 주선으로 사제 판돌포 푸치(Pandolfo Pucci)의 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 상황을 두고 “판돌포 푸치가 카라바조를 후원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판돌포 푸치가 초입기 로마 시절의 카라바조에게 몇 개월 동안 잘 곳과 먹을 것, 그림을 그릴 화구와 공간을 제공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후원’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 또한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판돌포 푸치는 가톨릭 사제였으며, 교황 식스토 5세(Pope Sixtus V, 1521–1590, 재위 기간: 1585-1590)의 한 여자 형제의 자산 관리인(Steward)이었다고 한다.
판돌포 푸치가 재산 관리인으로 있었다는 교황 식스토 5세의 여자 형제는 교황이 사망한 후에 팔라초 콜론나(Palazzo Colonna)로 들어갔다(또는 돌아갔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몇 년도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팔라초 콜론나는, ‘Palazzo'란 단어가 ’궁전‘을 나타내는 단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콜론나 가문을 위해 지어진 궁전’(a Palace of Colonna Family)이었다.
팔라초 콜론나는 어느 한 사람의 가족들만이 거주하는 저택 한두 채가 모여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가문의 핵심 인사들과 몇몇 가까운 가족들이 함께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궁전에 버금가는 호화로운 저택’인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팔라초 콜론나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 시점부터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자산을 관리할 별도의 개인 관리인이 필요치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팔라초에서는 구성원 개인이 소유한 집을 포함한 모든 자산들에 대한 관리가 시스템적으로 이루어졌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 시스템을 받치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팔라초로 돌아간 이상, 판돌포 푸치의 자산관리인으로서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한 유력 가문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이 지금의 대기업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남겨져 있는 기록들을 통해 추측해 보면, 교황 식스토 5세가 사망으로 인해 지위를 잃은 것이 1590년이고, 카라바조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1592년 중반이었기에, 카라바조가 판돌포 푸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이 개인적으로 소유했던 자산을 전부 정리한 상태라서 별도의 개인적인 관리가 필요하지 않은 상태였거나, 적어도 상당 부분을 정리한 상태에서 팔라초 콜론나로 들어갔고 남아 있는 자산의 관리는 팔라초 콜론나의 자산 관리인이 맡은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 카라바조의 푸치 시기:
카라바조가 로마의 트라스테베레(Trastevere) 근처에 있는 판돌포 푸치의 집에 머물면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지낸 것은, 로마에 도착한 직후인 1592년과 1593년 초 사이의 몇 개월 정도였다고 보고 있다.
트라스테베레는 로마 바티칸의 남쪽에 붙어 있는 구역으로 당시 많은 성직자들이 트라스테베레와 그 인근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카라바조의 푸치 시기]라고 별도로 구분 짓는 문헌들도 있지만 그 기간이 워낙 짧기 때문에 [카라바조의 초입기 로마 시절]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예술사에서는 카라바조의 가장 초기 작품인 〈과일 깎는 소년〉(Boy Peeling Fruit, c.1592–1593, 동일한 제목으로 4점이 남아 있다.)이 이 시기에 그려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연구자에 따라서는 다른 몇 점의 작품 또한 이 시기에 그렸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사실 판돌포 푸치의 성향과 당시 그가 처해 있었던 여건, 그리고 캐비닛 그림이라는 소품이 유행했던 시기라는 점과 카라바조의 실력을 바탕으로 추측해 보면 카라바조가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
비록 카라바조가 판돌포 푸치의 집에 머무는 동안 제대로 된 식사조차 제공받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이 시기는 ‘카라바조가 화가로서 자립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커다란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
사실 사제 판돌포 푸치는 예술사나 교회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카라바조와 관련된’ 부분에서만 짧게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마저도 문헌에 따라서는 다소의 어긋남을 갖고 있어 텍스트화 한 이의 추측과 추론이 그와 카라바조 사이에 가미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에 있어 판돌포 푸치의 역할이 극히 미미하며, 또한 그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오직 카라바조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들을 바탕으로 추측해 보면 판돌포 푸치가 비록 성공한 고위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좋은 집안 출신이었으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 푸치 가문(Pucci Family)과 사제 판돌포 푸치:
푸치 가문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피렌체(Firenze, Florence)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으로 중세 말기부터 각종 문헌에 등장하고 있다.
푸치(Pucci)라는 가문의 이름은 시조(始祖)인 Jacopo Puccio(줄여서 Puccio)에서부터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원래는 토스카나의 시에나(Siena) 인근 지역에서 시작한 가문이지만 피렌체로 본거지를 옮겨 13세기 후반부터는 가문이 쌓은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피렌체의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피렌체 공화정(Republic of Firenze) 시기에 본격적으로 피렌체의 정·관계에 진출하여 도시의 최고위직을 맡았으며 르네상스 시기에는 메디치(Medici) 가문과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지위를 강화하였다.
추기경(Cardinal)과 같은 고위 성직자를 여러 명 배출함으로써 피렌체에서 뿐만이 아니라 로마에서도 영향력을 가진 유력 가문이 되었다.
1559년에는 판돌포 푸치(Pandolfo Pucci)가 공화정 복원을 노리는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가문의 지위가 일시적으로 약화되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치인 판돌포 푸치’와 카라바조를 후원(?)한 ‘사제 판돌포 푸치’는 같은 이름의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쨌든 사제 판돌포 푸치 또한 푸치 가문이라는 명문가 출신이다.
카라바조를 얘기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헌에서 판돌포 푸치를 너무 폄하하고 있는데, 이는 판돌포 푸치의 배경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것일 수 있다. */
밀라노를 떠난 카라바조의 초입기 로마 생활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판돌포 푸치의 영향을 너무 미약하게 평가하는 것을 두고 이성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제로서 판돌포 푸치는 성공한 고위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큰 명망을 가진 가문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카라바조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카라바조가 판돌포 푸치의 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성공하지 못한 화가가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하였고 그를 통해 ‘성공하지 못한 채로 이대로 나이만 먹게 된다면, 결국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카라바조의 예술에 있어 판돌포 푸치가 한 가장 큰 역할은 ‘아직은 무명화가에 불과했던 카라바조에게 성공에 대한 열망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간절하게 만든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카라바조가 화가로서 자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것 또한 카라바조의 예술에 있어 이 시기가 가진 중요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판돌포 푸치는 자신의 성공(재기)을 위해서, 자신의 능력(경제력)으로 지원 가능하면서도 고위 성직자들과 명문 귀족들의 눈에 들 정도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를 찾고 있었는데 이때 콜론나 가문을 통해 카라바조를 소개받았을 것이다.
당시 로마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몰려든 수많은 화가들이 북새통을 이루다시피 북적거리면서 조그마한 기회라도 붙잡으려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판돌포 푸치와 같은 중간 성직자의 눈에 띄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아직은 무명에 불과하였지만 상당한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언제든 기회가 찾아온다면 자신을 후원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릴 만반의 준비를 갖춘 화가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라바조가 판돌포 푸치를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콜론나 가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당시 콜론나 가문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판돌포 푸치는 카라바조가 아닌 다른 화가를 그 자리에 앉혔을 것이고, 판돌포 푸치의 입장에서는 그 편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판돌포 푸치의 예술에 대한 안목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가 명문가 출신이라는 것과, 카라바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는 판돌포 푸치 또한 보통 이상의 예술적 안목을 갖추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가능하다.
어쨌건 판돌포 푸치와 카라바조의 만남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판돌포 푸치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었고 카라바조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카라바조는 판돌포 푸치가 제공한 모든 것에 대해 불평을 쏟아내다가 얼마가지 않아서 판돌포 푸치의 집을 떠났고 그 후로도 그에 대한 불평을 계속하였기에 결과적으로 판돌포 푸치가 카라바조를 선택한 것은 덕보다는 손실이 더 많은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는 카라바조의 한 가지 성향을 알 수 있게 된다.
카라바조에게 판돌포 푸치를 소개해 준 것은 콜론나 가문이다.
당시 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던 콜론나 가문과 카라바조는 전혀 격이 맞지 않은 사이였다.
따라서 카라바조에게 판돌포 푸치를 소개해 준 것은 순전히 콜론나 가문의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여기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카라바조는 자신을 소개한 콜론나 가문의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판돌포 푸치에 대한 언행에 좀 더 신중을 가졌어야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에는 카라바조가 젊었다는 것과 그의 성격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카라바조가 판돌포 푸치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카라바조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판돌포 푸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판돌포 푸치와 카라바조는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식성이나 성향까지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달랐다.
그 두 사람이 가진 공통점이라고는 ‘로마에서의 성공을 간절하게 바라는 것’뿐이었다.
판돌포 푸치로서는 카라바조를 선택한 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
로마 초입기의 카라바조로는 어차피 잃을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판돌포 푸치는 카라바조를 선택함으로써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