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해 맺힌 둥근 방울이
때 놓친 기억들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비포장 신작로 돌틈을 헤집는
녹슨 자전거의 앙칼진 신음처럼
마지막 무대에 선 무희들의
서걱한 갈색 군무처럼
불현듯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하면, 이제 되었다고
때맞춰 내려서는 것이 순리이긴 하지만
구불한 궤적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딱히 들이밀 변명거리 없이도
호흡 괜히 더 가빠지기에
괜찮다 괜찮다 그만하면
여태껏 잘 살아왔으니
이젠 수미산을 내려가도 괜찮겠다
닝기적 어설픈 신선놀음 따위에
행여 더 늦어진다면
그 따가운 눈총을 어찌 감당하려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올라올 때 빈손이었으니
내려갈 때도 빈손일 수밖에
갈변되어 가는 첫 빛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시간의 흐름을 가늠한다. 수미산의 찰나는 억 겹과도 같아서
행여 중력에 맞서려 한다면 생각마저도 영겁에 빠질 수 있다. 걸음을 재촉하지만 다리는 마음을 따라주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천지간을 뒤덮은 물방울을 비집고 거뭇거뭇한 실루엣들이 배어 나온다.
"이를 어쩔꼬 구불구불 따라온 저 길에 번민의 찌꺼기들이 잡초처럼 자라고 있으니."
오를 때 그랬던 것처럼 내려설 때도 발 앞만을 보라고, 자기주장을 결코 굽히지 않는 것이 산이다.
올라서는 것과 내려서는 것은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인 것처럼 서로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려갈 때야 깨닫게 된다.
깨달음이 언제나 늦어지는 것은 어리석음이 부리는 원초적 고집 때문이다.
하긴 그 깨달음조차 이내 변색되고야 마는 것이, 색 바래는 그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또한 삶의 순리일 수 있다.
이제 수미산을 거의 다 내려왔나 보다.
찰나 같기도 영겁 같기도 한 시간이, 어제와 그 어제처럼, 기어이 흘렀다.
머리카락에는, 허락한 적 없는데도, 겨울 아침 서리 같은 세월이 허옇게 내려앉았다.
누군가 수미산의 초입에 박아 넣은 오두막 뒤뜰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안쓰럽게 허공을 기어오르고 있다.
사릿문 앞을 지나다가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어 걸음이 멈춰진다.
붉고 초록의 둥근 방울들이 늘어진 가지 끝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엉켜 매달려 있다.
방울토마토가 매달려있는 저곳 또한 인드라의 그물에 얽혀있나 보다.
시간의 호흡 가득 내려앉은
뒤뜰 작은 텃밭 넝쿨에
기억의 향기 머금은 둥근 포말이
조글조글 맺혀 있네
선잠 갓 깨어난 무거운 바람이
슬쩍 몸을 부대끼자
농익은 내음 화사하게 터트려
천지간을 하나로 잇네
뿌리 하나에서 구불구불 오르다가
졸망졸망 무리 지어 맺힌 것이
설핏 모양새는 닮았지만
붉거나 파랗거나 제 모양새 서로 뚜렷하여
어느 것 하나 구분되지 않는 것 없네
코끝으로 헤아리기엔
향기 너무 깊어
눈 비벼 길을 열고
손끝으로 살포시 어루만지니
졸고 있던 포말들이 깨어나
천지간을 환하네 비추네
알알이 맺힌 것마다
저마다의 오롯한 세계이고
서로가 서로를 비추면서
인드라망을 펼쳐 감싸 안으니
작은 텃밭 넝쿨이
온 세상을 가늠케 하는구나
• 색즉시공(色卽是空):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의 본질을 설명하는 <반야심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色(색)이란 빛깔, 모양, 얼굴을 말하는 것으로 물질적인 현상, 형체가 있는 모든 것을 일컫는 한자어이며 또한 卽(즉)은 곧, 바로 ㅇㅇ이 곧 ㅇㅇ이다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는 한자어이다. 是(시)는 이, 이것, 옳다, ㅇㅇ이다라는 강조의 의미를 가진 한자어이며 마지막으로 空(공)은 빌 공, 하늘을 나타내는 것으로 실체가 없음, 고정된 자아가 없음을 말하는 한자어이다. 그래서 색즉시공을 ‘있는 것이 곧 없는 것‘, '찬 것이 곧 빈 것‘ 등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현실 세계를 차지하고 있는 물질적 존재는 모두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색즉시공이란 ‘물질적인 것에는 불변하는 고유의 존재성이 없음’을 일컫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 공즉시색(空卽是色): 본성인 공(空)이 바로 색(色)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색이란 만물(萬物)을 일컫다. 따라서 공즉시색이란 만물의 본성인 공이 연속적인 인연에 의하여 임시로 다양한 만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색이란 공이 만들어낸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기에 세상의 만물은, 비록 물질적인 현상을 가진다고 해도 결국 그 어떤 것도 고유한 존재성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색은 실체 하지 않는 임시적인 현상인 것이다.
•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물질적인 색(色)의 세계와 평등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불교 범어(梵語)의 원문에서는 “이 세상에서 있는 모든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으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는 더 이상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기술되어 있다.
이 긴 문장을 표의 문자(表意文字)인 한자(漢字)로 한역(漢譯) 한 것이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며, 이 열여섯 글자 중에서 여덟 글자로 줄인 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그 뜻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문장을 살펴보면 여기에서 말하는 색(色)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空)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