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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Dec 17. 2022

나도 아플 때 쉬는 사치를 부리고 싶다

의사 선생님은 나더러 쉬라고 하셨어

“좀 어떠셨어요, 김도비 님. 잘 지내셨나요?”


지난 어느 가을날, 선생님은 또 언제나처럼 잘 지냈냐고 물으셨다.


“아무래도 선생님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약을 더 써야 할 것 같다고 지난주 내내 생각했어요. 아직 약이 남았는데도 약 받으러 올까 하고요.”


약을 먹으면 아무리 커피를 마셔도 흐려지지 않는 몽롱-한 기분이 이어진다.


“올리시긴 해야 하는데. 왜 그런 마음이 드셨을까요?”

답답한 게 커져서요. 이혼을 더 미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고요. 근데 약을 올렸다가 낮에 머리가 더 안 돌아가면 어쩌나 싶어서. 그렇게 될까요?”

“아무래도 처음 며칠은 그러실 수 있어요.”

“제가 일을 하는데, 머리가 멍-하면 안 돼서요. 일을 해야 하는데 지난주에는 집중도 못하고 자꾸 산만해지더라구요.” (대굴빡이 안 돌아간다고 말하려다 잘 참았다.)


선생님이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당분간은 좀 쉬셔야죠, 일도 줄이시고요.”

“이게 데드라인이 있어서요. 완성도가 높아야 일을 하는 구조인데, 그런데 요즘에는 마음에 딱 맞게 잘 됐다 싶은 문장도 거의 없고.”


그러자 선생님이 왜 이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조금 쉬세요.

"우리가 몸살감기에 걸리면 며칠 쉬어야 하잖아요. 그거랑 같은 거예요. 특히 정신적으로 힘든 거는 보통 만성이라서 충분히 잘 쉬셔야 해요.”

“선생님, 제가 암 수술하고 백일쯤 후부터 출근을 시작했어요. 일부러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매일 외출할 일을 만들고, 루틴을 확보해서 삶에 활기를 불어넣으려고요. 직장에서 일도 너무 보람 있어요.”

“직장을 따로 다니시고. 번역도 하시고.“

“네, 일부러 제가 좋아하는 걸로 몰입할 일거리를 찾으려고.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도 있고요. 어머님 아버님 계신 집에 계속 같이 있기도 싫었지만.”


정말 그랬다. 벌써 1년 전 일이긴 했지만 집에서조차 마음이 편할 수 없어 너무 힘들었으니까.


“쉬는 것도 좋은데. 직장 일은 힘들지 않으세요?”

“네, 환영받으면서 일하고 있어요. 직장에서는 스트레스가 1도 없어요, 가아아아끔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길 때도 있지만. 제가 월급루팡인가 싶을 때도 있고. 다만 번역은 완성도 높게 해야 하는데, 머리가 더 잘 안 돌아가서. 가뜩이나 요즘 기분이 또 안 좋고 막 그런데.”

“일에서 스트레스가 없으신 건 좋은 거죠. 화는 그럼 어디에서 나는 걸까요?”


… 남편 보면요. 꺄르르.

그 말을 하고선 두 손바닥으로 눈을 몽땅 덮은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나는 더 웃고 싶었던 걸까, 울고 싶었던 걸까.


“약은 더 올려서 드셔야 해요. 우선은 작은 거 반 알 드시는 거 한 알로 올릴게요, 그래도 세게 드시는 건 아니에요.”

“네. 그렇더라구요.”

“그리고 단번에 좋아지지 않아요. 말씀드렸다시피 보통은 만성이라 평소처럼 일하시려고 하지 마시고, 좀 쉰다고 생각하셔야 돼요. 정교함이나 정밀함을 요하는 일은 당분간 좀 덜하시는 게 맞아요. 

우리가 아프면 잘 쉬고 회복하는 게 필요하잖아요? 

아픈데 안 아플 때랑 똑같이 지내려고 하시기보단, 약을 올려서 먹고, 지금 당장 원하시는 대로 일이 잘 안 되더라도 회복이 필요하니까 푹 쉬시고요. 머리도 충분히 쉬게 해 주시고.”

“… 그러게요. 그러네요. 제가 잘못 판단했었네요. 선생님 말씀을 귀담아 잘 새겨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살기 힘든 걸 참으며 살던 시절에 썼던 거지만, 지금도 아프면 쉬라는 말이 사치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이제 싱글맘이 되었으니 더 그렇다. 쉬고 싶을 때마다 푹 쉬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 부모가 되면, 엄마든 아빠든 특히 주양육자가 되면 마음대로 아플 수도 쉴 수도 없다. 남편이 자기 앞가림 때문에 3년간 부재할 때 나는 젖을 물려야 했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했으며, 친정 엄마의 손을 빌렸으나 밥도 하고 일도 했다. 아이들이 크고 나니 챙길 일은 점점 더 많아졌다.


외국생활 중 피 묻은 조개관자 같은 것을 세 번이나 절제하는 암 수술 당일에도 나는 등에 거즈와 의료용 테이프를 바른 뒤 그 흔한 타이레놀 한 알 조차도 처방받지 못한 채 바로 퇴원하여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갔고, 집에 와선 구레나룻이 너무 자라 보기 흉했던 둘째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어줬으며, 그다음 날에는 첫째와 전부터 약속했던 광장의 행사에 가서 꼬마용 롤러코스터를 타고 놀아야 했다.


놀이기구 위에서 소리를 지를 때마다 실밥도 꿰맨 데가 어디인지 알려주겠다며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엄청 아팠다는 뜻이다.


그러니 의사 선생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으면서도 그렇게 쉴 수 없어 슬펐다. 그리고 사실은 몸이 힘들게 일을 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편하지 않아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아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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