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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jazz Nov 04. 2023

휴가와 편지, 기억의 저편

최근 몇 주간 계속되던 야근에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용기 내어 연차휴가를 쓰겠다고 한마디 한 뒤 휴가 내기 딱 좋은,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에 맞춰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휴가라고 일부러 어딘가를 가고 싶진 않았고, 그냥 오랜만에 집에서 혼자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반 정도만 뜬 채 아내와 아이들이 집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워 버렸네요. 이후 얼마간 잠을 더 자긴 했는데, 자꾸만 울려대는 업무 관련 전화벨과 메시지 알림 소리에 “아,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은 이불 밖으로 나와 거실 소파에 아무 생각 없이 앉았습니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9시 반, 한창 회사 이메일이 왔을 시간이어서 기계처럼 휴대폰을 열고 회사 앱을 켜고, 아침에 수신된 따끈따끈한 메일 중 중요한 것만 골라 몇 개를 확인하기 시작했네요. 휴가를 쓴다고 말하기가 어려웠지, 사실 제가 없어도 회사는 정신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휴가에 이렇게 집에서까지 회사 메일을 확인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멀찌감치 던져 놓고 잠시 머리를 식혔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문득, 이메일이 아닌 진짜 메일, 그러니까 손 편지와 엽서들이 떠올랐습니다. 매일 보는 업무적인 ‘전자’ 우편이 아닌, 예전에 간혹 받았던 사적인 내용의 ‘진짜’ 편지가 그리웠습니다. 약 5년 전인 2017년 12월, 해외주재원을 나가게 되어 제가 소유하고 있던 짐들을 정리하다가 처분해야 할지 끝까지 고민했던 그 편지들. 제법 큰 플라스틱 상자에 한가득 들어있던 학창 시절과 군대시절에 받았던 편지들이 생각났네요. 그래서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던 서울의 11월 첫 주 금요일 오후 세시 무렵 CBS 음악 FM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흘러간 옛 음악을 들으며, 베란다 창고를 열어 예전에 받은 편지들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를 꺼내 왔습니다.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 있던 편지들을 꺼내 보니 시간이 순간적으로 정지했다가 갑자기 쏜살같이 흘러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편지들 사이로 지난 시간의 결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오드리 토투(Audrey Justine Tautou) 주연의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Amelie, 2001)에서 나오는 “상자”의 주인이 느꼈던 감정과도 비슷했을 것 같네요.


추억의 보물상자 같았던 편지함을 열어보니 반가운 흔적들이 여럿 담겨 있었습니다. 호주에서 온 엽서(2005년). 이건 귀여웠던 대학 (女)후배 교환학생 시절의 흔적이고, 바르셀로나에서 온 엽서(1997년). 이건 우리 누나 배낭여행의 흔적이고, 또 몇 통의 바다 건너온 편지들. 이건 여러 친구들과 대학 선후배들의 여행 흔적들이네요. 지금은 연락이 끊겨버린,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 갔던 친구의 편지(1994년), 또 국제 우편(Air mail) 딱지가 붙어 있는, 중학교 때 참가했던 잼버리(Jamboree) 대회 이후 한동안 주고받던 호주 스카우트 대원들의 편지와 엽서(1992년~1995년), 그리고 풋풋하게 연애했던 대학시절 수없이 주고받았던 그 애와의 편지(1997년~2001년). 이렇게 여러 편지와 엽서들을 꺼내어 잊고 있던 이름들을 오랜만에 다시 보니 설레기도 했는데, 한편으론 시간의 흐름에 살짝 무덤덤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뒤지다 보니 편지가 일상생활의 낙(樂)이었던 군대시절의 편지도 한가득 나왔네요. 대학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글씨가 적힌 "학생회실 발신" 군대 시절 편지들(1999년~2001년). 그리고 그 속의 소중했던 이야기들. 심지어 군인이었던 친구들과도 편지로만 소통했었는데, 그 시절엔 어찌 그렇게 할 말이 많았는지, 지금 다시 보니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물론, 계급이 높아질수록 편지는 뜸해졌지만, 기껏해야 훈련소 6주에 이등병 6개월이었는데 그때 받았던, 각종 부대의 이름이 발송처에 적힌 편지들도 수두룩했습니다.


이윽고 보물 상자 같았던 편지함 속에서 가장 놀랐던 편지를 발견했는데요. 그건 다름 아닌, 군입대 직전인 대학 2학년 때 여름농활 가서 현지 아이들에게 받았던 편지였습니다. 그때도 아이들이 삐뚤빼뚤 쓴 귀여운 글씨의 그 편지가, 무더운 한여름의 소나기보다 더 시원했던 편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랜만에 꺼내어 다시 봐도 비슷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에게 이런 편지도 받았었구나 하는 오랜만의 기억에, 강원도 철원의 정겨운 풍경과 함께 한참 옛 생각이 나더군요. 대학 1학년 때부터 2학년 때까지 줄곧 같은 장소로 봄, 여름, 가을 계절마다 농활을 갔었는데, 마을회관에 놀러 온 아이들마다 수북한 저의 다리털을 보고 저의 이상한(?) 외모에 신기해해서 농활 때마다 저는 자연스럽게 아동반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때 주간에 농사일을 하는 것보다 저녁부터 밤까지 아이들과 붙어 있는 게 훨씬 더 힘들었는데, 그래도 지금 다시 돌아보니 힘들었던 기억보다 즐거웠던 추억이 더 많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아이들을 맡긴 읍내 어머님들이 그렇게 저를 좋아라 했던 것 같습니다. ^^) 당시 살짝 비가 와서 농사일을 나가지 않던 날엔 철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하루종일 아이들과 놀았는데요. '샘반'과 '솔반' 단 두 개의 학급밖에 없어 조촐하게 지어진 학교 건물과 운동장의 모습이 기억 속에 스쳤고. 원시인 오빠(2학년 때 아동반장이었던 저에게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 내일 가냐면서, 오빠 가면 이제 재미없다고 말하던 은지의 모습도 생각이 났네요. 그때 은지가 오빠 군인 가면(아이들은 ‘군대’ 가는 것을 ‘군인’ 간다고 표현) 우리 동네 철원으로 오라 했었거든요. 참고로 철원에는 청성부대라 불리던 6사단이 있었는데, 국내 최전방에 위치해서 한겨울 대한민국의 최저기온을 자랑하는 무시무시한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가을 농활을 갔던 9월 초에도 추수를 하러 나간 아침에 논에 온통 서리가 내려앉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아이들 지금은 벌써 나이 서른에 접어들었을 텐데, 그들에겐 제가 스쳐간 존재였겠지만 저에게 그들은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가끔 생각이 나는 그런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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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뜻하지 않게, 갑작스레 숨겨져 있던 기억의 저편에 다녀오고 나니 바쁜 일상을 핑계로 많은 것을 잊고 살도록 한 제 자신이 살짝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일상에 지쳐 삶의 동력을 얻고 싶을 때 혹은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지난 편지와 엽서들을 다시 꺼내서 천천히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럼 금세 삭제할 수 있는 이메일이나 휴대폰의 카톡/문자메시지와는 분명히 다른, 색다른 감성을 또다시 충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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