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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인간 Oct 19. 2021

그걸 배워 뭐에 쓰나


 “어머님~ 허리 펴세요. 허리 펴고 앞으로 가야 해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스피드스케이팅 강습 라인에서 무릎을 굽혀 허리를 낮추고 앞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주춤주춤 나아가는 걸 보니 초보인 모양이다. 스케이트 복을 입고 헬멧, 장갑까지 착용한 걸 보니 일회성 강습은 아닌 듯싶다. 주위에 스피드스케이팅을 배우는 성인이 없다 보니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 옆으로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코치와 함께 허리에 고무벨트를 차고 트랙을 천천히 돌고 있다. 곡선 구간에서 원심력을 이기기 위한 훈련이다. 나이 많으신 분이 강습을 받는 건 처음 본 지라 신기하여 유심히 지켜보았다. 직선 구간에서는 벨트 없이 허리를 굽혀 낮은 자세로 트랙을 도는데, 그 모습이 곧 넘어질 듯 불안불안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한 발씩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신중하게 스케이트 날을 밀고 있었다.

'와, 연세가 있어 보이시는데 스케이트를 배우시네?' 우연히 천연기념물을 발견한 듯 신기했다.


트랙 안쪽으로는 피겨 스케이팅 강습이 한창이다. 보통 7~8살에 피겨를 시작하기 때문에 강습을 받는 연령대는 대부분 어린 아이다. 그 사이에서 긴 머리를 푸른색으로 염색한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강습을 받고 있다. 동작을 보니 대략 1년 정도 배운 것 같다. 동작 하나하나의 선이 예쁘다.

'이제 나이가 많으니 선수를 할 것도 아닐 테고, 취미로 배우는 걸까?' 피겨 스케이팅 역시 취미로 배운다는 게 생소하게 다가왔다.   



  

코로나19로 인해 강습받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일반인의 이용을 제한하고 있어, 빙상장 안에 있는 인원들은 코치와 강습생들이 전부다. 강습생들을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미취학 아동에서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나이는 아이가 원해서 시켜보는 경우가 많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선수 쪽으로 진로를 정한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혹 성인 강습생을 볼 수 있다.


국내에서 스케이트가 보편적인 취미 활동도 아니고 강습도 훈련의 성향이 강해서, 성인 강습생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차오른다.

'취미로 배우는 거겠지? 스케이트를 취미로 배우다니 신기하다. 근데 취미로 배우기엔 너무 훈련 같은 느낌인데. 이걸 배워서 뭐에 쓰려는 거지? 일반 성인 경기나 대회가 있는 건가?'

 

수많은 의문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다, 얼마 전 빙상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딸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  피겨 하는 이유가 뭐야?

-  점프해서 회전하는 거 하고 싶어서.

-  대회 나가는 게 아니고?

-  대회? 나는 점프해서 회전하는 게 목표야.     

무언가를 배우면 그에 걸맞은 결실을 이루어 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나와, 배움 자체에 중점을 두고 즐기고 있는 아이와의 생각의 간극은 너무나 동떨어져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배우는 게 있으면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 강박적으로 여겨왔고, 그 결과물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따지는데 집중했던 거 같다. 그러니 새로운 경험을 하는 데 있어 항상 두려움이 앞서다 보니 머뭇거리다가 시작 자체를 하지 않은 일들이 수두룩 했다.

빙상장 위를 누비는 어른들을 보며 ‘저걸 배워 뭐에 쓰나?’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안쓰러워졌다. 나는 배움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던 거다.


배움의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을 즐길 줄 아는 그들이 멋있어 보였다. 생계를 위한 게 아닌 것에 시간과 돈, 노력을 쏟아부어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그들의 마음이 부러웠다.


대학교 4학년 때 프랑스 뮤지컬을 보고 반해,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DELF 자격증을 딴 경험이 있다. 공대생인 내가 취업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프랑스어를 공부하다 보니 자격증까지 따게 된 건데, 당시 주위에서 취업이랑 관련 없는걸 한다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대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시의 나는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 공부라기보다는 재미있는 취미 활동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취업을 한 후에는 바쁜 일상을 핑계로 손을 놓았더니 다 잊어버렸다. 몇 년 전부터 다시 시작해 볼까 했지만, ‘그걸 배워 뭐에 쓰나’ 싶어 그만두었다. 하지만 몇 년째 나의 새해 목표에는 프랑스어 공부가 있다. 원서를 읽고 싶다. 이럴 거면 진작에 시작할걸.


써먹을 데가 없어도 내가 좋으면 하는 거다. 결과가 어떻든 과정이 즐거우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시간일 거다.


14년째 책장에 꽂혀있는 프랑스어 책을 펼쳐 보는 것부터 시작해봐야겠다. 그걸 배워 뭐에 쓰겠나 싶지만, 그로 인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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