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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인간 Oct 24. 2021

집안일의 두려움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든 게 귀찮을 때가 있다. 씻는 것도, 먹는 것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 그렇지만 홑몸이 아닌지라 산송장처럼 누워있을 수가 없다. 나는 먹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아이들 밥을 차려 주어야 하고, 나는 씻지 않아도 아이들은 씻겨야 한다. 


이런 날이면 생존을 위한 일만 겨우 처리하고는 나머지는 하지 않고 눈 감아 버린다. 싱크대에 그릇이 피사의 사탑처럼 쌓이고, 빨래 바구니에는 빨랫감이 넘쳐나 바닥에 널브러지기도 하며, 바닥은 하루만 닦지 않아도 먼지와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는 게 보인다. 이렇게 지저분한 집안을 참아내고 견딜 수 있는 나의 게으름과 인내심에 내심 감사할 따름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하면 티가 잘 안 나는데, 안 하면 확연히 티가 나는 게 집안일이다. 하루만 게을러져도 집안은 난장판이 된다. 나의 지독한 게으름으로 인해 집안은 곧잘 전쟁이 끝난 폐허처럼 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이유뿐만은 아니다. 


20대 초반 약물 부작용에 따른 급성간염으로 피부가 같이 뒤집어졌다. 아토피 피부염이 생긴 것이다. 성장하면서 호전될 가능성이 높은 소아 아토피와는 달리, 성인 아토피는 발병하면 호전될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처음 얼굴로 시작해서 목과 팔다리에도 퍼져 나갔다. 등 빼고 전신에 퍼져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져 입원한 적도 있다. 지금은 목과 팔에 접히는 부분에 약간의 피부염이 있고, 손가락에 집중되어 있다. 손가락 마디마다 붓고 갈라져 피가 난다. 손가락을 완전히 굽히기 어려운데, 손가락에 힘을 주어 구부려야 하는 일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마디가 찢어지며 피가 묻어난다. 이런 손에 물이 닿으면 갈라진 살갗에 통증이 느껴지면서 건조해진다. 집안일은 손에 물을 묻히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나의 일상이 되어야 하는 집안일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지워내기 위해 얼마 전 식기 세척기를 주문했다. 아쉽게도 큰 사이즈의 식기 세척기는 집안에 놓을 곳이 없어, 싱크대 상부에 놓고 사용할 수 있는 8인용으로 구매했다. 주문하고 오매불망 식기 세척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기 3주. 그 긴 기다림의 시간 끝에 드디어 집안에 들어왔다. 드디어 왔다!

일단 통세척을 하고, 설거지할 그릇을 애벌로 물에 헹구어 세척기에 넣었다. 테트리스를 하듯 잘 놓아야 좀 더 많은 양이 들어간다기에 신중하게 설거짓 거리를 쌓고는 버튼을 눌렀다. 윙~ 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들린다. 1시간 14분 후에 세척이 끝난다고 뜬다. 비록 손으로 하는 것보다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 시간 동안 두려운 집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세척이 끝나고 그릇을 꺼내 보니 뽀득뽀득 잘 씻겨져 있었다. 식기 세척기를 발명하신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무엇이든 손이 빠른 친정엄마는 한 시간이 넘게 돌아가는 세척기를 보고 말한다. 

“어유~ 저거 얼마나 된다고 한 시간이나 기다려. 그냥 후딱 해치우면 되지.”

하지만 손가락 구부리기 힘든 나는 한 시간이 걸리든 두 시간이 걸리든 마냥 고맙다. 그러고 보니 세탁기도 고맙고, 건조기와 청소기도 고맙다. 


누군가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탄생했을 제품 덕분에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편리함은 불편함과 결핍을 만나야만 생성될 수 있다. 나의 삶도 그런 과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의 불편함이 조금은 무뎌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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