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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인간 Oct 28. 2021

보풀


 뒤로 넘어가는 달력을 보며 옷장에서 가을 옷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절에 맞지 않는 따뜻한 기온을 핑계로 옷장 정리를 미루어 봅니다. 절대 귀찮아서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해 보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기침과 사랑은 절대 감출 수 없다는데, 게으름도 감출 수 없음이 틀림없습니다.


쌀쌀한 바람이 제법 불기 시작해서야 뒤늦게 옷장 문을 열어 봅니다. 옷장에서 꽤 긴 시간을 기다렸을 옷들을 하나둘 꺼내 보자면 여러 생각이 스쳐 갑니다. 아…. 살찐 것 같은데 맞으려나. 이런 옷도 있었어? 깜빡하고 있었네. 입을 옷이 없네, 없어.


옷장 맨 위 수납칸에 놓여있는 투명 플라스틱 상자가 눈에 띈 건 그때였습니다.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어보니 두꺼운 털실로 짠 카키색 카디건과 연보라색 긴 팔 니트, 그리고 다홍색 니트 조끼가 곱게 개어 있었습니다. 그 옷들을 보는 순간 ‘아, 맞다! 나 이런 옷도 갖고 있었지?’라는 생각을 하며, 개어 있던 옷들을 하나씩 펼쳐 봅니다. 포근한 털실의 감촉에 하늘에서 살포시 내리는 하얀 눈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아마 눈이 있는 곳에 갈 때는 따뜻한 털실로 만든 옷이나 장갑, 목도리, 모자가 함께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인가 봅니다. 그 덕에 볼이 빨갛게 얼어버리는 한겨울에 눈이 내리는 풍경을 생각하면 전혀 추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하얀 눈에 누워 뒹굴거리면 폭신할 것만 같습니다. 거기에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나 거리의 빛이 함께한다면 훈훈한 공기까지 느껴지는 듯합니다. 


니트 소재의 옷은 세탁 과정에서 보풀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세탁 망에 넣고 울 코스로 세탁을 합니다. 빨래 건조대에 널어놓을 때도 잘 펴서 말립니다. 세탁 라벨에 표기된 대로 해보지만, 약간의 보풀이 일기도 합니다. 입고 활동할 때도 마찰로 인해 보풀이 날 수도 있고요. 아무리 조심해도 보풀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지요. 보풀을 발견하면 조심스레 떼어냅니다. 심혈을 기울여 떼어도, 다음번에 또 생길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만나는 수많은 골치 아픈 일들도 이 보풀과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갈등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도 누구나의 인생에 공평하게 고난과 역경은 찾아옵니다. 그럴 때 힘들고 귀찮더라고 보풀을 하나씩 제거하면 보풀이 있던 자리는 처음과 같이 말끔해집니다. 물론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번의 보풀을 만날 수 있지만, 그때마다 ‘떼어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각하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보풀이 생기면 떼어내면 그만인 거죠.


카키색 카디건을 걸쳐 보았습니다. 역시 포근하네요. 왼쪽 팔 부분에 약간의 보풀이 보입니다.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잡고 당기니 보풀이 사라졌습니다. 떼어낸 자리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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