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확장이 아닌 고요한 성장으로 #251109
#1
넷플릭스에서 ‘풋볼 매니저(FM)’를 공짜로 플레이할 수 있길래 오랜만에 켰다. 게임 속에서 팀을 맡으면 나는 늘 가장 먼저 기존 인력을 정리한다. 평판이 좋든, 팀 내 분위기가 어떻든, 실력이 기준에 미치지 않으면 해고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게 팀의 균형을 맞추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주급 체계가 가벼워지고, 자원이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팀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게 FM의 기본 공식이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우리 회사는 어땠을까?” 게임에선 클릭 한 번으로 정리되는 일이지만, 현실의 조직에선 한 사람의 삶과 자존심이 달린 결정이다.
#2
작년에 Outcome은 법인을 설립했고, TIPS 및 투자를 받았다. 매출도 꾸준히 늘었고, 계좌엔 돈이 쌓였다. 그러니까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경계심이 무너졌던 것 같다. 우리는 정말로 필요한 사람보다 ‘필요할 것 같은 사람’을 뽑았다. “이 정도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쉽게 판단했고, 쉽게 채용했다. 그 결정이 쌓이면서 회사는 무겁고 느려졌다. 스타트업에서는 매출보다 비용이 회사를 죽인다. 그리고 IT 기업의 비용 대부분은 인건비다. 한 번의 잘못된 채용이 몇 달 치 생존 기간을 갉아먹는다. 당시 우리는 성장에 집중한다고 말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방향을 잃은 확장이었다.
#3
배기홍 대표님이 쓴 글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스타트업은 굶어 죽기보다 배 터져 죽는다.” 그 말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투자를 받고, 매출이 생기고, 돈이 들어오니 평소엔 하지 않던 결정을 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웠던 판단이 느슨해지고, 비용은 점점 커졌다. ‘여유’를 ‘안정’으로 착각했고, ‘인력확장’을 ‘성장’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회사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일의 우선순위가 흐려지고, 팀의 방향이 모호해졌다. 결국 문제는 ‘돈’이 아니라 ‘정신의 이완’이었다. 투자금이 회사를 살릴 수도 있지만, 방향을 흐리게 만드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배웠다.
#4
그래서 결심했다. Outcome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난 6개월 동안 우리는 강력한 체질 개선을 단행했다. 12명이던 팀을 6명으로 줄였다. 몇몇은 새로운 업무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떠났고, 몇몇은 회사의 방향에 공감하지 못해 스스로 정리됐다. 또 몇몇은 회사와 긴 대화를 통해 합의 후 퇴사했다. 마지막 한분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가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그 분과 지난 수요일 밤에 대화를 끝내고 나니, 텅 빈 사무실에서 하염없이 술이 고프더라. 내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그럼에도 놓치지 말아야하는 건 '다음에는 이러한 채용문제가 발생하지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5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방향을 바로잡으니 신기하게도 변화는 곧바로 나타났다. 지난 한 달 동안 5천만 원에 가까운 계약이 이루어졌다. 예전 같으면 몇 달을 소모하던 의사결정이 이제는 며칠 만에 끝난다. 팀의 구조가 선명해지고, 각자의 역할이 명확해졌다. 회의는 짧아지고 실행은 빨라졌다. 숫자로만 본다면 여전히 작은 회사지만, 일의 밀도와 집중력은 전혀 다른 수준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제 글로벌 기업들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유럽에서 잘 나가는 SaaS 기업이 파트너십을 제안해 왔다. 그들과 함께 웨비나(Link)를 준비 중인데, 솔직히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글로벌 무대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찾고 있었다.
#6
올해만 4건의 대규모 행사가 예정되어 있고, 내년에는 채용박람회에도 참가한다. 다시 채용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절대 성급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숫자가 아니라, 방향이다. Outcome의 리듬과 가치관에 맞는 사람인지 오래 보고, 깊이 대화할 것이다. 그리고 함께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미합류의 결정을 빠르게 내릴 것이다. 그게 냉정함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회사를 키운다는 건 사람을 많이 모으는 일이 아니다. 같은 방향을 향한 사람만 남기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 그걸 안다.
#7
돌아보면, 지난 2년은 참 많은 걸 배웠다. FM 속에서는 한 명의 선수를 교체하면 팀이 정리되지만, 현실의 스타트업은 사람 한 명의 변화가 조직의 문화를, 분위기를, 리더의 철학까지 바꾼다. 냉정함은 리더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그러나 그 냉정함은 잔인함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책임감이어야 한다. 나는 그걸 몸으로 배웠다.
배기홍 대표님이 쓴 글 중에 “고요한 성장을 하는 기업이 좋다.”라는 글이 있다. 조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장에서 우리 투자사는 수년 동안 진흙탕에서 굴렀고, 그동안 솔직히 망할 뻔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회사는 절대로 죽지 않고 매번 더 강하게 살아남는 바퀴벌레처럼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면서 그 분야에서 계속 자기만의 영토를 야금야금 만들었고, 자신의 브랜드도 조금씩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들이 투자자들의 돈으로 요란하게 사업하고 있을 때, 이 회사는 아주 조용히 제품을 만들었고, 고객을 확보했고, 매출을 만들었고, 심지어 수출까지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면서 요란하지 않고 고요하게 성장하는 회사들이 제일 좋다.
Outcome은 지금 화려한 신규 투자유치가 아니라, '매출 중심의 고요한 성장'을 택했다. 외부의 박수보다 내부의 일관성을, 투자금의 속도보다 고객의 신뢰를. 회사는 더 이상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팀이 아니라, ‘제대로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팀이 되어가고 있다.
#8
그래서 나는 믿는다. 고요한 성장의 끝에는 반드시 단단한 결과가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언제나 ‘사람’이 있다. Outcome은 그렇게 다시, 제대로 걸어가고 있다. 조용하지만 확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