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 활동 중 대상이 컴퓨터 개발을 공부하는 소수집단(minority)의 학생들일 경우 가능한 참여하려는 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마침 여유 시간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좀 더 효율적이지 않나? 하는 공리적인 관점에서 그러기도 하고 (기계적으로 자원 배분하는 건 직업병인 듯) 나도 한 때 소수집단 (외국-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시아계 여성) 학생이었으니 그들이 겪는 문제에 특히 마음이 동한다. 특히 이번처럼 학생들의 이력서를 첨삭하고 조언해 줄 수 있는 기회는 내심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코로나 이전엔 회사 돈으로 여러 도시 여행하는 게 좋아서 대학 취업 박람회 참가를 자원하곤 했다. 물론 친절히 학생들을 응대하고 질문에 답하는 일도 하지만, 실무자로서의 주 임무는 학생들의 이력서를 받고 빠른 시간 평가하고 분류하는 데 있다. 누군가를 평가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여태 떨쳐내지 못했다. 특히 대상이 어린 학생이고 박람회 특성상 개개인에게 짧은 몇 분밖에 할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 상기된 표정으로 양껏 눈에 띄려고 열심인 학생을 앞에 두면 옛날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리고 늘 입 안에 깔깔한 안타까움이 남는다. 이력서에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나. 그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하거나 태도를 보였다면 좋았을 텐데. (괴로운 민망함과 안도감도 함께 찾아온다. 그때 내가 그런 소극적인 방식으로 취직을 할 수 있었던 건 벼락 맞을 확률의 운이었구나... 착하게 살자ㅜㅠ)
내가 도와준 학생은 이제 막 3학년이 되었지만, 이전에 다른 공부를 하다가 2학년 끝에 전공을 변경했기 때문에 아직 기초적인 과목 수강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우선 체크하는 점은 기본적인 문법 및 스펠링 오류. 깨끗해서 다행이다.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는 이력서가 아니었다면 철자 실수를 보자마자 삑. 다음! 가차 없이 탈락일 테다. 읽어야 할 이력서는 수백 개가 넘고 사소한 철자 실수 덕에 더 읽지 않아도 될 수고를 더는 격이다. 첨삭하는 입장으로 돌아와 보자. 솔직한 첫인상은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자격미달도 아닌 애매한 상태랄까? 이력서를 받아보는 리크루터가 하필 그날 기분이 너무 안 좋은 상태였다면 떨어지고, 우연히 즐겁고 맛있는 점심 식사를 가진 후 처음 검토하는 이력서라면 큰 문제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즉 상당 부분 운에 달린 이력서였다
우선 좋은 점부터. 학점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다만 다른 분야 공부를 했었다니, 과연 그 성취를 다른 분야에서도 인정해 줄 수 있는지는 역시 그 순간 이력서를 읽는 사람이 판단할 일이다. 또 다른 플러스. 기본이긴 하지만 필수 과목들을 이수하고 있다는 점. 어쨌든 땅이 고르게 다져 있어야 그 위에 집도, 빌딩도 세우는 법이다.
이 학생의 경우 눈에 뜨였던 경력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경험을 벗어나 외부 단체의 프로그램에 참가해 프로젝트 경험을 쌓았다는 것이다. 스토리는 만들기 나름. 전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장 경험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극복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Above and beyond. 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노력하는 자세가 되었겠구나 하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면 좋겠다. 회사 인턴쉽 프로그램들은 당장 업무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기 보단 실무 경험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아웃리치 프로젝트에 가깝기 때문에 열심히 많이, 그리고 빨리 배울 수 있는 학생임을 어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여전히 경험 부족은 문제였다. 항목마다 내용이 부실하고 "나"라는 사람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았다. 수업 과제, 혹은 적어도 한 달 이상 걸리지 않은 프로젝트들은 과감히 빼라고 조언했다. 차라리 수강이 끝나지 않은 당장의 수업이라도 괜찮으니 기초 과목들보다 심화 과목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넣는 편이 인터뷰어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더 수월하고 지금 내가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 어필하기 좋다. 그리고 좀 더 심각한 문제. 각 프로젝트 당 약 3-4개의 세부 항목 중 2개 정도가 프로젝트 자체 설명만 하고 있고, 다른 항목에도 살짝 한발 뒤로 빼는 듯한, 수수한 동사를 써서 한 일들을 나열했더라.
여기서 영문 이력서 101. Action Verbs. (행동 동사? 행위 동사? 정도로 해석되겠다) 각 항목은 반드시 행동 동사로 시작하고, 게 중에서도 좀 더 적극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동사를 선택하는 편이 좋다. 이 학생은 역시 기본에는 충실했으나 "Collaborated with / formatted and designed visuals / Organized codes"같은 표현들이 문제였다. In short, unimpressed. 이력서를 읽는 내 입장에서는 결국 얘가 직무와 관련된 일을 얼마나 잘할까? 에 중점을 두는 데 "협업을 했다"는 게 과연 내가 가장 내세우고 싶은 행동일까? Collaborated, worked with 이런 어중간한 말을 모두 빼라고 알려 주었다. '팀' 프로젝트라는 꾸밈 명사 하나로 설명될 부분을 가장 중요한 문장의 말미에 배열하는 건 공간 낭비일 뿐. 직설적으로 '난 네 팀이 한 일에는 관심 없고, 네가 어떤 임무를 맡고 수행했는지'만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냥 자신 있게 내가 만들었다고 말해도 괜찮은 걸. 혼자 모두 만들었다고 거짓말하라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부분을 이렇게 구현했고 그 구현의 결과 이 정도의 성과가 났으며, 그 일은 팀에게 이만큼의 기여를 했다를 어필해야 한다. 앞의 협업에 대한 문장에 "formatted and designed visuals" 같은 설명이 뒤따라 왔을 땐, 개발자 직군에 지원하는 학생의 내세울만한 업적이 디자인 경험이 되고 마는 오류가 생긴다. 프로젝트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여기서 한 일을 설명해줄래? 질문했을 때 술술 나오는 말이 이력서에선 두루뭉술하게 표현되거나 누락된 것은 반드시 고쳐야 했다. 이력서가 통과되지 않으면 직접 설명한 기회도 없는 셈이니까.
덧붙여 가능하면 buzzwords, 그러니까 일종의 핫한 단어들을 전략적으로 이력서에 많이 포함하라고 조언했다. 대다수의 리크루터는 이력서당 3초의 검토하는 시간조차 쓰기 불가능할 정도의 산더미 같은 이력서를 마주한다. 결국 키워드 검색에 의존할 때가 많다고 하는 데, 그렇다면 가능한 그들이 검색할 법한 단어들을 이력서에 넣어 발견의 확률을 높이는 것도 전략이다. 키워드는 지원하는 직군의 채용 공고에서 찾으면 된다. 실무자로서 개인적으로는 간혹 이 전략이 과해서 아따, 요놈 봐라? 요즘 좋다는 건 자기가 다 해봤다 그러네? 하고 반대의 효과가 날 때도 있긴 하다. (아 그럼 어쩌라고)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이력서가 리크루터들의 필터를 통과하고 무사히 실무자인 내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이력서는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니까.
그 밖에는 자질구레하게 이름 폰트가 너무 작다거나 굳이 가능한 기술란에 Microsoft 워드, 프레젠테이션 같은 걸 왜 넣었냐고 묻는 정도였다. (직무에서 직접 관련 기술을 요구한다면 당연히 추가하는 게 좋겠으나, 아닌 경우 그냥 공간 채우려고 넣는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다른 개발 툴이나 프레임워크는 써본 적이 없니? 물어서 가능한 좀 더 직무와 직접 연관 있는 기술 목록으로 치환하라고 일러주었다.)
쓰다 보니 더 직접적으로 이런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몇 년 전에 지역 한 대학에서 개최한 콘퍼런스 패널로 참가해 학생들에게 취업 관련 조언을 하고 업계에 대해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나를 뒤쫓아온 학생 몇이 이력서 첨삭을 부탁했는 데, 도저히 그 모든 학생 이력서를 다 봐줄 수도 없는 노릇인 데다 까놓고 말해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행사에 와서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 자체가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봉사 활동인데 뭘 자꾸 더 바라는 느낌? 그래도 친절하게 학교마다 학생들 커리어 상담 센터가 있고 이런 이력서 첨삭도 받을 프로그램이 있으니 학교에 속해 있는 동안 최대한 학교가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자기가 다니는 2년제 학교에는 그런 지원이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알고 봤더니 그 학생은 다른 학교 주최 행사임에도 사비를 들여서 콘퍼런스를 참가한 것이었다. 으앗, 창피해. 내가 누린 교육과 기타 모든 혜택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오만과 무지가 까발려지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번 일은 그날의 부끄러움을 잊지 못해서 뒤늦게라고 마음의 짐을 좀 내려놓고자 하는 일인 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