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립공원 완주

나의 두번째 산티아고

드디어 한국 국립공원 22곳을 완주했다. 이것은 나의 두번째 산티아고다. 스페인 산티아고를 걷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나만의 산티아고를 찾았고, 첫번째 산티아고는 2020년 6월부터 2년여의 걸쳐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국토종주 자전거 여행이었다.


첫번째 산티아고를 통해 우리나라 4대강과 바닷길을 자전거로 달렸다면, 두번째 산티아고에서는 우리나라 22개 국립공원을 찾아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걸었다. 우리 국토의 젖줄인 강에서 어머니를 만났다면 산과 바다에서 민족의 기상을 느끼게 해 준 아버지를 만났다.


나의 두번째 산티아고는 2023년 12월 31일 태백산 등정을 시작으로 2024년 12월 22일 오대산으로 마무리 되었다.

#1 태백산 2023 12.31


쉬는 달 없이 한달에 한 두군데 국립공원을 찾았고, 여름 휴가 때에는 서울과 서해안, 그리고 땅끝에 있는 월출산과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을 찾아갔다.


돌아보면 지난 일년이 정신없이 지나갔지만 그 가운데 22개의 빛나는 순간이 있다. 때론 피로과 걱정을 안고 떠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길 떠남은 설레임이었다. 우리가 바라는 일상의 탈출에 이보다 좋은 것은 없으리라.

#2 한라산 2024 1.17


왜 산을 오를까? 나에게 산은 무엇인가?


산은 나를 만나는 곳이다. 정신없이 살다가도 산에 가면 땀을 흘리며 신나게 걷고 있는 소년 나를 만날 수 있다.


길은 제각기 다르지만 산이라는 보편성은 자연이 주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그 안에 들어가면 나는 자신을 호흡하고 하나의 걷는 존재로 온전히 머물게 된다.


때론 상상하지도 못한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되기도 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야산에서 만난 상고대다. 우연히 눈의 나라에서 길을 잃고 넋을 놓고 말았다.

#3 가야산 2024 2.24


삶에서 지치고 힘들 때 산을 오르면 생기를 되찾아 돌아올 수 있다. 왜일까? 아마 산은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아름다운 소녀이기 때문이 아닐까.


맑은 하늘 아래 주왕산을 오르며 산이 새색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질학적으로도 특별한 주왕산 계곡은 신기했고, 가슴에 묻어 둔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소환했다.

#4 주왕산 2024 3.2


그래도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단연코 경주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수련원이 경주 보문호 옆에 있는데 인성교육원에서 주관하는 1학년을 위한 인성캠프가 학기마다 9-10차수 있기 때문이다.


벚꽃 핀 보문호를 젊은이들과 걷고, 종종 아침 일찍 보문호를 달렸던 기억이 새롭다.

#5 경주 2024 3.22


덕유산은 신학생 때 새만금을 찾아가던 길에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자전거를 끌고 넘은 기억이 있어 반가웠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이렇게 큰 산이 있어 서로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덕유산을 직접 올라보니 여전히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상에서 펼쳐진 동서남북의 풍광과 넉넉한 맛이 좋았다.

#6 덕유산 2024 4.10


산을 오르는 길이 늘 좋지만은 않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예상치 못한 일도 생기곤 하는데 정말 알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산의 날씨다.


월악산 오르는 길은 비가 내렸다. 안개가 자욱해 한치 앞 보이는 것 하나 없는데 끝도 없는 계단은 하늘로 이어졌고 순간 두려웠다. 아무도 없는 영봉에서 본 운무의 장관은 우중산행이 주는 보너스였다.

#7 월악산 2024 4.20


대부분의 산행은 혼자 이루어졌다. 다른 사람과 시간을 맞추는 것도 어렵지만 정상을 향해 돈키호테처럼 덤벼드는 산행에 함께 할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은 가파른 산이 아니라 볼 것이 많은 관광지 같았기에 지인들을 꼬셔 함께 떠났다. 독일마을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남해 금산 보리암을 올랐다. 함께 가는 길은 늘 좋다.


보리암에서 내려다본 상주은모래비치에서 신나게 놀고 주일미사도 드렸다.

#8 한려해상 2024 4.28


산은 산마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속리산은 그 이름에 걸맞게 속세를 떠나지 않은 산의 스토리로 가득했다.


문장대에 오르니 세조의 이야기가 들려왔고, 바위에 누워 하늘을 보니 시가 나왔다.

#9 속리산 2024 5.10


가장 놀라웠던 산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무등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광주라는 대도시 옆에 우뚝 솟은 산은 험난했지만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가장 많았고, 기이한 바위가 멋있었다.


마침 무등산을 오른 날이 5월 18일이라 산행을 마치고 망월동 5.18 국립묘지를 찾아갔다.

#10 무등산 2024 5.18


소백산은 나를 키운 산이다. 나의 유년시절을 보낸 풍기에서 늘 소백산을 바라보았고 산이 내려준 하천에서 물고기와 가재를 잡고 물놀이를 하며 얼마나 즐거웠던가.


어릴 때처럼 희방사와 폭포를 거쳐 깔딱고개를 오르니 연화봉이 맞아주었다. 연화봉에서 비로봉으로 가는 길은 어머니처럼 단아했으며 백두대간의 정기가 느껴졌다.

#11 소백산 2024 5.24


지리산과 나와의 인연은 30년이 넘는다. 그동안 산은 여전한데 나만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인지 하루산행이 쉽지는 않았지만 정상에서 본 하늘과 풍경은 모든 힘듬을 없애 주었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워지는 지리산을 환갑에 다시 찾을 것을 약속했다.

#12 지리산 2024 6.9


2024년은 내 인생 산(山)을 통해 또 다른 의미의 산 사람(Living Person)이 된 해이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계속 이어졌다.


한라산을 오를 때 백두산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사목하다가 하양 사제관에 온 신부님들의 도움으로 말이다. 지난 여름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중국 연길에서 이도백하로 가서 자고 차로 끝도 없이 가면서 백두산이 얼마나 크고 웅장한 산인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서파에서 백두산을 만나고, 다음날 북파에서 다시 백두산을 마주하고 북한을 바라보았다.


우리 민족의 정기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나는 누구인지 묻게 되었다. 내려오는 길에 들른 장백폭포는 그 웅장함이 놀라웠다.


언젠가 북한에서 백두산을 오를 수 있기를, 금강산도 오를 날이 오기를!

백두산 2024 7.14-15


여름 집중휴가 기간동안 서울 형님댁을 방문해 북한산을 올랐다. 비가 내렸고 낙석으로 인해 백운대로 오르는 길이 폐쇄되어 있었다. 반대편에 유일하게 열려있는 길을 돌아서라도 가고자 마음먹고 갔지만 중간에 길을 잃었다.


국립공원 중 유일하게 정상을 오르지 못한 북한산은 2016년 1월에 오른 백운대 사진으로 대신한다.

#13 북한산 2024 7.29


변산반도는 2년전 사제관 신부님들과 여행을 갔던 적이 있어 도장만 찍고 태안반도에 있는 천리포 수목원으로 향했다.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천리포 수목원은 미국인 민병갈에 의해 조성되었다. 개인 재산을 모두 털어 천리포를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가꾸었고 죽을 때까지 나무를 보살폈던 그의 정신이 남아 있는 그곳에서 언젠가는 하룻밤을 머물면서 새벽 수목원을 걷고 싶었다.

#14-15 태안반도 & 변산반도 2024 7.30


높지는 앉으나 가볍지 않은 월출산에 올라 남도의 향기를 맡는다.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가는 길에 다산초당에 들러 정약용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다산은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유배 당했지만 깊은 산속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수많은 책을 쓰고 제자들을 키워냈다.


어떤 처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는 다산의 모습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16-17 월출산 & 다도해 2024 7.31


우리나라에서 무당이 가장 많다는 영험한 산 계룡산은 남매탑의 전설로 아름다운 곳이다. 가끔 산의 가장 높은 곳에 군부대가 있어 정상을 오르지 못하는 산이 있는데 계룡산이 그랬다.


더운 여름이라 많은 사람들이 계룡산 입구에서 내려오는 계곡 물에 발을 담그며 즐길 때 나는 땀을 한바가지 흘리고서야 계룡산을 만났다.

#18 계룡산 2024 8.17


한때 단풍이 들면 산 전체가 붉게 변한다 하여 적악산으로 불렸던 치악산은 구렁이에게 잡아먹히려던 꿩(雉-치)을 구해준 나그네가 위험해 처했을 때 꿩이 자신의 몸을 던져 상원사 종을 세번 울리게 하여 구했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비롯한다.


그래서인지 다람쥐가 사람 무서운줄 모르고 먹을 것을 든 손에 올라왔다. 서로 해치지 않는 자연은 아름답다.

#19 치악산 2024 8.24


내장산은 단풍이 유명해서 단풍이 들면 가리라 마음 먹었지만 시간은 나를 아직도 푸른 내장산으로 이끌었다.


시월의 어느 날, 단풍이 조금씩 물들어가는 내장산에서 시원함과 평안함을 맛보았다.

#20 내장산 2024 10.9


산은 내게 스승이다. 한걸음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고 인내하게 하고 끝까지 몰아부친다. 한번도 산을 오르기 포기한 적은 없지만 설악산 당일 코스는 어마무시했다.


적어도 1박을 할려던 계획은 갑자기 산불예방 휴식기에 들어간다는 소식 때문에 당일 일정으로 바뀌었다. 하양에서 쉬지 않고 3시간 반을 달려가 오색약수터 코스로 2시간 반을 올랐다. 가파른 산행길이어서 내려오는 시간도 그만큼 걸렸다. 집에 돌아와 며칠을 앓았다. 아, 설악산!

#21 설악산 2024 11.14


마지막 산은 오대산이다.(작년에 국립공원이 된 팔공산이 있지만 동네 산처럼 자주 올랐기에 여기에는 포함하지 않는다)


1박 2일의 일정으로 떠났지만 대설주의보로 산이 폐쇄되어 부득이하게 하루 더 머물렀다. 마지막 산이라 생각하니 산을 오르는 한걸음 한걸음이 소중했다. 천천히 깊이 호흡하며 걸었다.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빛나는 설산이 은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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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오대산 2024 12.22


내 인생의 한 챕터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이렇게 멋진 산이 많은줄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산과 함께 한 2024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다음 페이지로 서둘러 넘어가려는 마음이 머뭇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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