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덕복희 Nov 04. 2021

이영 씨 다 알고 있었잖아요

영화 <디바> 리뷰


친구 사이엔 우정 말고도 수많은 감정이 흐른다. 애틋함, 동경 같은 비교적 말랑말랑한 것과 질투, 열등감, 증오까지 공존한다. 꼴도 보기 싫지만 없어선 안 되는, 사랑하는 한편 죽여버리고 싶은 친구가 있다. 그런 건 '진짜 친구'가 아니지 않냐고? 그 우정이 진짜인지, 그들이 친구가 맞는지는 주변 사람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너무 복잡하게 얽힌 감정은 타인이 납득하도록 설명할 수 없다. 당사자마저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파국이 오기 전까지는.


영화 <디바>는 다이빙 선수이자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두 사람, 이영(신민아 분)과 수진(이유영 분)의 이야기이다. 운동선수로서 훈련된 승부욕과 극심한 성과 압박이라는 설정이 있지만 두 사람의 역사에 누적되어 온 복잡한 감정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러니까 어떤 목표(혹은 분노) 때문에 흑화한 빌런 서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디바>의 구성, 특히 뚝 끊긴 듯한 엔딩을 두고 혹평이 많았던 건 아마 여기서 비롯된 오해가 아니었을까. 이 이야기는 관계의 파국에서, 그걸 자각하는 순간에서 끝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갈등의 시작은, 학교 괴담의 고전 격인 '전교 1등을 해쳐서 1등을 차지한 만년 2등' 서사와 비슷하다. 중요한 경기 직전, 이영이 수진에게 병원에 있는 엄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멘탈이 흔들린 수진은 다이빙 대에 이마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하고 그 트라우마로 더 이상 기량을 펼칠 수 없게 됐다. 유망주였던 수진보다 선수 생활은 늦게 시작했지만 재능을 타고났던 이영이 곧 수진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9년이 흘렀고, 그동안 여전히 둘은 친구였다.


무엇보다도 사고 이후 수진이 심리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 운동선수라는 특수성 때문에 현대 의학보다 '정신력'으로 병에 맞서야 했다. 그 정신력이 망가진 문제를 정신력으로 이겨낸다는 게 어불성설인데. 하긴 영화에서 극대화되는 설정, 장르에 투영하여 그렇지, 매사가 승부인 현실에서도 흔한 오류이다. 


그런데 은퇴를 두고 갈등이 불거지기 전까지 수진은 왜 9년이나 이영을 견뎠을까? '9년 동안 왜 한 번도 묻지 않았냐'며 원망하기 전에 수진이야말로 왜 먼저 따지지 않았을까? 엄마 얘길 왜 했냐고, 너 때문에 사고가 났고 내 전부였던 다이빙이 이제 무서워졌다고. 수진을 답답해하다가, 불현듯 같은 대사가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순간이 기억났다. 엄마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잖아. 뭐가 서운한지, 왜 입을 다물었는지. 분위기를 바꿔버리고 맛있는 걸 먹자고 해 버렸잖아. 내가 마지못해 먹을 때까지 모른 척 했잖아. 수진은 어차피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할 것이 겁났는지도 모르겠다. 이영이 '미안하니까 나도 다이빙을 그만두겠다'고 할 리는 없으니. 평생 도와줄게, 더 연습해 보자 같은 말을 할 테니.



어린 이영에게 1%라도 악의가 있었는지 몰라도, 사고는 사고였고 이영은 최선을 다해 수습하려 했다. 수진이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고, 서운함에서 분노를 거쳐 증오를 켜켜이 쌓는 동안 이영은 남들 보기에 '너무 착해서 탈인 친구' 역할로 수진을 챙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진의 증오가 점점 일기장을 뚫고 나와도, 뼈 있는 말과 살얼음판 같은 관계를 다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을지도. 난 너랑 달라. 나라면 저렇게 속 좁고 찌질하게 굴지 않았을 걸. 그러나 내밀한 사이에서는 무섭게도 그렇게 은은한 무시를 상대방이 감지할 수 있다.


영화는 절정을 향하며 이영이 '다 알고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린다. 불편한 마음은 이마의 가려움으로, 발목을 잡는 죄책감은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으로 표현된다. 불안이 증폭되면서 특정 인물들 ― 수족관 사장, 택시 기사, 형사, 기자 ― 이 실제로 위협을 가하는 환상을 본다. 이영 뿐만 아니라 여성의 일상에 내재한 보편적인 공포를 포착한 부분이다. 이 기억의 재편 과정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소 지루할 정도로 집요하다. 경험과 착각, 잊고 있던 감정을 모조리 헤집어 배열하는 모습은 한 여성이 삶을 자신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과 닮았다. 그러므로 남들에겐 구구절절로 보일지라도 이영에겐 그 혼란이 필요했다. 문제를 직면하고 나서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비록 그 끝이 관계의 종말이었지만 말이다.



다이빙 선수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우스꽝스러워도 멀리서 봤을 땐 아름다운 장면이다. 둘과 가까운 코치든 동료 선수든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둘만의 얼굴이 있다. 주변에서 상황과 논리를 바탕으로 답을 내리는 영역과 별개로. 머리론 납득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 서운함.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감정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주변의 악의 없는 개입 ― 공허한 조언, 충고, 격려 ― 이 도움이 안 될 뿐더러 악의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해명할 수 없는 관계를 해명해야 하는 상황, 이영을 다그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슬펐다. 수진의 죽음은 엄밀히 따지면 사고사였으니 이영이 끝까지 수진을 구하려다 사망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물을 순 없다. 9년 전 사고와 마찬가지다. 이영은 수진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만회하려 노력한 건 사실이지만 함께 가라앉지도, 끝까지 끌어주지도 못했다. 


어떤 관계는 최선을 다해도 손쓸 수 없다는 걸 보았다. 최선을 다했다는 착각일 수도 있다는 걸.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고 싶어서, 이영과 수진에 관해 오랫동안 생각해 본다.




(사진: 다음영화 <디바> 스틸컷)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