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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문서 위조의 역사는 매우 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증>(Donatio Constantini)

by Francis Lee

기독교 역사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증>(Donatio Constantini)이라는 문서만큼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온 것도 드물 것이다. 이 문서는 일단 누가 만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4세기 들어서 기독교의 종교 활동을 승인한 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천하의 최강자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272~337)가 그 출신이나 이력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문자 그대로 '노바디'에 불과했던 (후에 교황으로 불린) 일개 로마 주교에 불과한 실베스터 1세를 매우 특별히 대접했다는 내용이 담긴 이 문서는 중세기 기독교가 한창 그 세력을 확장하던 8세기 중반에 위조된 문서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문서가 작성된 때는 기독교에 매우 호의적이던 신성로마제국의 1대 황제인 칼 대제(Carolus Magnus, 740/742~814)가 통치할 무렵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는 15세기까지 이 문서를 마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처럼 간주했다. 그러나 사기는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어서 이탈리아의 가톨릭 사제 발라(Lorenzo Valla, 1407~1457)가 1439년부터 1년간 연구한 끝에 위조된 것임을 밝혀냈다. 그 연구 결과로 발표한 것이 바로 <거짓으로 믿고 위조된 '콘스탄티누스 기증' 선언에 관하여>(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o)이다. 발라는 지금도 세계 최고의 도서관에 속하는 바티칸 도서관을 세운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의 역사비평적 교회 문헌 분석 방법은 19세기 독일 튜빙엔 학파가 주도한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방법의 선구가 되었다.


이 문서는 콘스탄티누스가 서기 315년 아니면 317년 3월 30일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햇수가 불분명한 것은 이 문서 자체에 그런 식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기독교의 종교 활동을 승인한 313년 밀라노 칙령이 선포된 지 2~3년 만에 콘스탄티누스가 느닷없이 실베스터 1세에게 그 당시 황제의 궁전이었던 라테라노궁을 선물한 것도 모자라 지금의 이탈리아 반도 땅 전체를 기증(donatio)하였다. 이 문서는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교황령’, 곧 교황의 부동산이 존재하게 된 법적 역사적 근거로 제시되곤 하였다. 물론 너무 아무런 이유 없이 황제가 호의를 베풀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너무 황당해하니 미안한 마음에서 전설을 만들었다. 그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가 문둥병에 걸렸는데 이를 실베스터 1세가 기적적으로 치유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에 크게 감동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당장 기독교로 개종하고 위에서 말한 부동산을 아낌없는 기증을 했다는 전설을 이 문서에 담았다. 그것도 모자라는지 아예 실베스터가 로마를 괴롭히는 용도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실베스터를 주인공으로 한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도 될 판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이 문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위조된 내용은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교회가 그 당시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이른바 5개 교회, 곧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예루살렘, 로마의 교회 가운데 실베스터가 주인으로 있던 로마교회가 이른바 '베드로 좌'가 있는 교회로 가장 우위에 있다고 선포한 내용이다. 그 베드로 좌는 현재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전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교황이 반포한 신앙과 윤리에 관한 모든 내용은 신성불가침 한 권위를 지닌 무류적 선언으로 간주될 정도다.


그러나 로마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의 위에 있다고 내세우는 유일한 근거였던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증여>가 가까로 판명되었음에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로마 교구의 주교가 '교황'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현재 가톨릭 교회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기독교 교파도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톨릭 교회가 내세우는 근거는 이 문서만이 아니다. 먼저 베드로가 현재 베드로 대성전이 있는 자리에서 순교하였고, 베드로의 정통성을 이은 '교황'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하였다는 과학적, 고고학적 증거는 전혀 없다. 그리고 예수는 베드로를 '교황'으로 임명한 적도 없다. 그저 가톨릭 교회의 일방적 주장인 것이다. 그러니 다른 교회가 동의할 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증여>라는 문서가 위조되기 오래전에 현재 프랑스 리옹 지방의 주교였던 이레네오(Εἰρηναῖος, 130~202)가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 교회를 세웠고 후계자로 리누스(Linus)를 교황으로 임명하였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독교 교회에서 리누스를 1대 교황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예수의 정통성에 문제가 되는 일이 생겨 2~3세기에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교황의 순서를 다시 정했다. 그래서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하자고 합의를 한 것이다. 사실 이는 아무런 과학적 증거가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그저 교회의 권위자가 말했으니 권위 있는 증언과 결정이 된 것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서 길고 긴 긴 로마 교황의 목록 작성이 시작된 것이다. 로마의 1대 주교로 간주되고 나중에 1대 교황으로 추대된 베드로 를 시작으로 33대 로마 주교인 실베스터 1세에 이르기까지 교황 목록은 충실히 작성되었다. 중세에는 교황이 동시에 한꺼번에 서녀 명이 임명되는 사태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통은 면면히 이어와 가톨릭 교회에서는 현재 프란치스코를 제270대 교황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를 전 세계 모든 기독교 교회의 수장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주장의 결정적 근거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증여>라는 문서 한 장이었다.


그러나 이 문서가 위조임이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가톨릭 교회는 수위권을 내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일단 신자수가 약 12억 명으로 기독교 교파 가운데 최대이고 약 30만 명에 이르는 사제들이 강력한 단일 대오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그 어떤 기독교 교파와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 아무리 수많은 사제들이 아동 성추행을 하고, 심지어 사제 성추행과 주교가 그 비리를 은폐한 결과로 미국의 보스턴 교구가 배상금을 갚을 길이 없어 파산해도 여전히 가톨릭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교회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요소는 바로 그런 세속적 숫자로 표현되는 물리적 힘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콘스탄티누스는 337년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흔히 알려져 있으나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마저도 아무런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기독교에서는 그가 로마제국 최초의 기독교 황제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전혀 역사적, 사실적, 문헌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사실 콘스탄티누스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과 아내까지 모함하여 죽일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었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벌인 전쟁에서 상대방을 잔인하고 교활하게 죽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인정머리라고는 전혀 없고 오로지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아내와 자식까지 잔인하게 죽인 콘스탄티누스가 어떻게 그와는 정 반대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기독교의 종교 활동을 승인하고 압류한 재산까지 돌려주게 된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가 죽고 300년 정도 흐른 그 당시 기독교는 이미 상당한 신자 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종교 집단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자들의 자기 종교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았다. 특히 야훼 신과 예수에 대한 신앙심으로 문자 그대로 똘똘 뭉친 집단이었다. 그 당시 한창 권력 투쟁을 벌이던 콘스탄티누스는 이 세력의 지지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313년 당시 로마제국의 서부를 장악하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동부를 장악한 리키니우스와 협정을 맺는 자리에서 <밀라노 칙령> 발표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최대의 정적인 리키니우스와 팽팽한 세력 다툼을 벌이던 콘스탄티누스는 아직 그를 제거할 힘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내리자 자기의 여동생을 리키니우스와 정략결혼시킨 것도 모자라 리키니우스를 지지하고 있던 기독교 세력의 지지를 자신도 확보하기 위하여 이러한 칙령 반포에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밀라노 칙령> 반포 이전인 311년에 리키니우스가 단독으로 황제 칙령을 내려 기독교의 종교 활동을 이미 합법화했었다. 이를 알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기독교를 좀 더 지원하려는 리키니우스의 뜻에 동의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는 리키니우스보다는 마치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매우 호의적인 인물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늘 승자 편 아니든가?


그러나 이러한 협정을 맺은 지 2년밖에 안된 315년 콘스탄티누스는 카발라 전투와 317년 마르디아 전투에서 그 당시 콘스탄티누스보다 더 강한 세력을 지닌 리키니우스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된다. 이후 협정을 맺고 두 사람은 잠시 휴전 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324년 아드리아노폴리스의 전투에서 마침내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를 격파하고, 나중에 콘스탄티누스가 사형에 처한 자신의 첫째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인 크리스푸스가 비잔티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리키니우스는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재판도 없이 반란죄의 누명을 씌어 귀양살이하고 있던 리키니우스를 사형에 처하고 만다. 절대 권력에 대한 욕심에 눈이 어두워 기독교의 사랑, 특히 원수에 대한 사랑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325년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수도로 삼던 로마보다는 리키나우스가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동부에 더 애착을 가지고 아예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게 된다. 그래서 무주공산이 된 로마를 기독교 교황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기적’을 문서로 공인하고 싶은 욕망에 기독교 교회가 위조해 낸 것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다.


그러나 사실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공동 반포한 이후에도 기독교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유일신교인 기독교의 신만을 숭배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로마 시민이 자기가 원하는 종교 생활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종교 다원주의 원칙을 철저히 유지하였다. 그 이유는 당연히 정치적 계략에서 나온 것이다. 아직은 그 세력이 절대적이지 않은 기독교를 위해 다른 종교를 배척할 경우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기독교로 개종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식 기독교 신자가 아닌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교리의 확립에 획기적인 사건이 된 니케아 교회회의를 325년에 소집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기독교 교회 안에서는 여러 분파가 나뉘어 신과 예수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교회가 갈라질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를 보다 못한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믿을 교리를 정하여 신경으로 확립할 것을 명령하였다. 기독교의 분열이 자신의 정치적 안정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정치권력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을 즐기던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에 충실하여 마침내 <니케아 신경>을 만들어 예수가 죽은 지 300여 년 만에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통합된 기독교 세력이 자신의 정치적 지지 세력이 되는 것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죽고 나서도 기독교는 계속 분열했다. 로마 교회와 원수 지간이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아리우스 세력이 장악하였고 카르타고 교회에서는 도나투스파가 득세하였다. 교회의 분열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분열은 오늘날에 들어와 새로 생긴 현상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유는 그의 어머니인 헬레나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헬레나는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음에도 깊은 신앙심으로 아들을 잘 키워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헬레나 역시 아들 못지않은 잔인함으로 유명했다. 그의 미움을 받은 둘째 며느리 파우스타를 첫째 며느리인 미네르비나의 아들인 크리스푸스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모함으로 목욕탕에서 뜨거운 증기로 질식사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것도 임신한 상태의 며느리를 말이다. 이런 방법으로 황족을 죽인 경우는 유일무이한 경우였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를 믿었다는 여자인 그것도 성녀인 헬레나가 저지른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잔악한 행위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설에서는 이런 헬레나가 그저 고맙기 그지없는 존재이기에 선뜻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기독교로 개종된 증거가 전혀 없는 콘스탄티누스도 성인의 반열에 올려버렸다. 무엇보다도 콘스탄티누스가 교회 재산을 돌려주고, 많은 교회를 건축해주었으며, 기독교 신자를 관리로 임명하여 기독교 세력이 정치 세력의 지원을 받는 일에 많은 공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밀라노 칙령> 반포 이후에도 기독교가 혐오하는 타 종교의 ‘우상숭배’를 금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의 통치 시절 로마제국의 공식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단 한 개의 신상이나 신전도 파괴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지방에서는 아폴론 신상과 같은 것에 대한 이른바 '우상 파괴' 사건이 있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 지방의 기독교 신자들의 주동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오히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종교 자유를 공인한 다음에도 페르시아의 태양신인 미트라를 섬기면서 미트라 신의 초상을 동전에 조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겨 넣기까지 했다.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 이런 사람이 기독교 신자 일리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런 황제의 행보가 ’‘신실한’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지만, 교회 건물이 마구 늘어나고 교회 자산이 증식되는 마당에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굳이 돈을 많이 주는 황제에 맞서 순교할 필요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이때부터 교회는 정치 세력과 철저히 밀착하여 교회의 세속적 세력을 키우는 데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20세기에 들어서서 기독교와 정치가 법적으로 분리되는 이른바 '정교분리'가 법제화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정교분리가 이루어져 재산상의 ‘손해’를 보게 된 기독교는 정부에 그 배상을 요청했고 많은 유럽 국가는 이에 따라 해마다 엄청난 금액을 교회에 지불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는 이러한 배상이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신자가 줄어들고 헌금이 줄어들어도 큰 걱정이 없는 것이 유럽의 기독교 교회이다.


기독교 교회 재산에 세금을 물리지 않고, 정부의 돈으로 교회를 짓고, 십자가 형을 금지하고, 로마 시민이 즐기던 검투도 금지하고, 주일을 공휴일로 정하며, 기독교의 중요한 축일, 곧 성탄절과 부활절과 같은 행사를 공식적으로 행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콘스탄티누스 덕분이다.


콘스탄티누스의 호의를 등에 업은 교회는 무엇보다 교회 건물을 호화로운 보석과 금으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성경책도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했다. 이제 더 이상 신앙을 위하여 순교를 각오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재산과 세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교회에 입교하려는 시민들이 교회 문 앞에 줄을 서게 되었다. 다 콘스탄티누스 덕분이었다. 물론 신앙심이 깊은 자들은 이것이 다 전능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놀라운 '은총'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맘몬(Mammon), 곧 재물의 신보다 야훼 신을 섬기라는 에수의 강력한 요청을 전혀 안 들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로마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군에 속하는 그를 찬미 찬양하는 축일까지 제정하여 눈물 나는 축복을 지금도 바치고 있다.


이렇게 기독교는 하루아침에 타락한 후 1700년 가까이 유럽의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를 지배했다. 과연 이것이 신의 섭리일까? 잘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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