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에 돌입한 나는 잘하는 걸 해보자는 생각으로 타고난 재능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결론은 음악이었다. 그에 앞서, 새로운 삶을 위해선 전혀 다른 삶의 자세가 필요했다. 방탕과 무절제함에서 규율과 절제로 삶의 자세를 180도 바꿨다. 금연금주와 뼈를 깎는 다이어트에 몸무게를 정상치로 만들었다.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언어로부터 시작된다. 전문적인 영역일수록 생전 접하지 못한 생경한 언어부터 돌파해야 한다. 음악의 언어와 음표는 내가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기에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단 몇 개월의 준비 끝에 운 좋게 음대 작곡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해 보니 동기들은 수년간 음악을 해왔기에 음악적 역량에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간극을 메우기 위해 밤낮없이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그 결과 전학기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생전 처음으로 맛본 목표와 도전, 노력과 성취의 과정. 이 모든 것은 스스로가 원했고 즐겼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졸업 후 유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점점 안 좋아졌고 얼마 후 결국 유학을 포기했다. 현실의 벽 앞에 쓴잔을 마셨지만 다른 길을 찾아 매진했다. 4년제 음대로의 편입을 준비했고, 이번에도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단기간에 목표를 달성한다. 그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어느덧 서른, 졸업을 앞뒀다.
중학교 2학년에 시작한 첫사랑은 그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여자친구의 마음은 조급했다. 나는 아직 학생이었다. 결혼할 수 있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졸업 후 작곡으로 마땅한 일자리도 없었기에 당장 앞날을 약속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혼이 필요했고 결국 이별을 고했다. 13년간의 사랑은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나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고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별과 함께 음악에 대한 열정도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음악은 나답게 살게 했던, 충만한 삶을 알게 했던 소중한 경험을 선사한 매개체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로 사랑마저 떠나간 현실에 음악은 더 이상 의미 없었다. 꿈이고 뭐고 당장 생계를 위해 돈벌이를 찾아야 했다. 6년간 내 삶의 전부였던 음표를 하루아침에 지워버렸다. 나는 새로운 욕망을 쫓아 새로운 언어를 내재하려 했다.
이 시기 '철학적 가능성'의 궤적은 사회, 정치, 역사, 성공학으로 폭을 넓혀갔다. 역시나 인문사회 서적만을 탐독했다. 이때까지도 철학은 안중에 없었다. 그저 세상을 좀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