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빛고래 Mar 20. 2021

내 안에 아큐를 찾아라

루쉰 [아큐정전]





< 얼렁뚱땅 >


얼렁뚱땅 : 말이나 행동 따위를 일부러 어물거려 남을 슬쩍 속여 넘기는 모양.


아큐의 삶을 한 마디로 축약한다면 얼렁뚱땅이란 단어가 제격일 것입니다. 게으름, 나태함, 안일함으로 무장한 아큐는 매사 자신이 대면한 상황 또는 사건을 얼렁뚱땅한 자세로 맞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지 않고 상황의 전후좌우를 살피지 않으며 상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함부로 막 사는 인생입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듯이 아큐는 판판이 깨지고 그의 비호감과 어리석음은 사람들의 냉대와 무시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괴로운 현실과 얼렁뚱땅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있었으니. 바로 정신승리법입니다. 사실과는 별개로 상황을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 이렇듯 아큐는 망상에 가득 찬 인간입니다. 얼렁뚱땅의 삶은 편합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공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나에게 편한 감각과 경험, 익숙한 습관, 해왔던 양식대로 느긋하게 살면 됩니다. 그로 인해 간간이 발행하는 괴로운 상황은 정신승리법의 망상으로 대처합니다. 아큐는 얼렁뚱땅한 삶의 진정한 달인입니다.



< 드높은 자존심 >

아큐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릅니다. 그가 생각하는 웨이좡 사람들은 모두 "세상 구경하지 못한 가소로운 촌뜨기들"이었습니다. 아큐의 드높은 자존심에 그럴듯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는 집도 없고 직업이 없으며 날품을 팔았습니다. 누구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망각의 대상이었습니다. 자존심 또한 망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아큐는 한때 잘 나갔고, 식견도 높으며, 게다가 일도 잘했으니, 원래는 거의 '완벽한 인간'이어야 했다." 아큐와 같은 허술한 인간이 완벽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현실과 이상의 엄청난 간극. 이러한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승리법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신승리법이 결코 내면 깊숙이 파고든 세상과 타인에 대한 분노까지 해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드높은 자존심을 짓밟힌 분노는 곧 약자를 향해 발산됩니다. "상대방을 살펴서 어눌한 자 같으면 욕을 퍼붓고, 힘이 약해 보이면 두들겨 패주었다." 만만한 상대를 짓밟아 얻는 희열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의 타깃은 주로 비구니와 하녀 같이 힘없는 여성들입니다. 힘의 우위를 이용한 열한 방식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쾌락을 얻는 것입니다. 아큐는 약자인 여성을 향한 폭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하려는 찌질한 인간자화상입니다.



< 야생의 무리 >

아큐가 살고 있는 웨이좡 사람들의 얼렁뚱땅함은 아큐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건의 진실, 사실의 진위 여부를 들여다볼 생각도 없이 그저 느낌과 소문, 추측만으로 사건과 사람을 가립니다. 그 결과 아큐와 같은 허술한 인간에게 몇 년간 존경을 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가당찮은 거짓말로 높은 집안 나으리에게 따귀를 맞는 굴욕을 당한 아큐. "하지만 아큐가 잘못을 저질렀는데 왜 사람들이 그를 깍듯이 존경하는 것일까? 이거야말로 난해한 일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큐가 자오 나으리와 한 집안이라 말했으니, 그로 인해 얻어맞았더라도, 어쩌면 어느 정도 진실일지도 모르기에 그를 존경하는 게 낫지 않겠나." 이것이 웨이좡 사람들의 통례입니다. 사람들은 아큐가 떠벌린 말의 진위여부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신나게 씹어댈 수 있는 흥밋거리와 힘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원초적인 요소만이 그들의 관심사입니다. 얼렁뚱땅의 극치인 아큐의 행보에 대중이 동요하는 데는 아큐와 같은 어리숙함이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웨이좡 사람들은 오직 힘의 논리만이 작동하는 야생동물 무리를 닮아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우두머리를 따르며 일신의 편안함을 유지하는 게 최고의 덕목입니다. 사건과 상황은 통례와 성현의 말씀을 따르면 됐기에 생각을 골똘히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큐가 억울한 누명으로 처형당한 후 누구도 그가 죽은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우두머리들이 알아서 잘 해결했을 거란 생각을 할 뿐입니다. "총살을 당한 것이 그가 나쁘다는 증거였다. 나쁘지 않다면 총살당하는 데까지 가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웃이 처형당하는 사건의 인과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고 알고 싶어 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들 또한 권력에 짓눌려 언제든 억울한 누명을 당할 수 있거늘. 웨이좡 사람들은 또 다른 아큐입니다.



< 양자택일 >

아큐의 삶은 극단적입니다. 아큐는 세상을 오직 자기 뜻대로만 정해서 관계합니다. 문제는 아큐의 뜻이 매우 어리석다는 데 있습니다. 아큐는 진실과 사실을 토대로 뜻을 결정지을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드높은 자존심으로 오직 자신의 경험, 감각, 감정으로만 대상을 단정 짓습니다. 따라서 아큐의 마음은 좋거나 나쁘거나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거나 소유하거나 버리거나의 극단적 양자택일에 빠져있습니다. 자기 멋대로 상황과 사람을 판단하여 한쪽으로 쏠린 마음으로 대상에게 덤벼듭니다. 이런 앞뒤 없는 들이댐이 세상에 통할리 없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아큐에게 당한 이들은 그대로 응징하거나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칩니다. 아큐의 레이더망에 걸린 사람들은 결국 모두 아큐의 적이 돼버리고 맙니다. 무지함으로 점철된 아큐의 시선이 모든 상황과 관계를 극단으로 치닫게 한 것입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선 생각이라는 엄청난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아큐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봅니다.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이유는 나의 본능과 감각만을 이용하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완벽한 인간이라는 독선에 빠져있기에 엄청난 수고를 감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드러나 보이지 않는 진실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 숨어있는 법입니다. 단순한 양자택일에 빠지지 않고 숨어있는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지적인 무장을 바탕으로 깊은 생각이라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 뒤집기 한 방 >

아큐는 한 방을 노립니다. 언제나 구질구질한 현실을 한 방에 뒤집을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래서 도박판을 기웃기웃거립니다. 결과는? "아큐의 돈은... 다른 사람들 허리춤으로 사라져 갔다." 늘 꽝입니다. 어느 날 그에게도 행운이 찾아옵니다. "그는 따고 또 땄다. 동전이 은전이 되고, 작은 은전은 큰 은전이 되어 수북이 더미를 이루었다. 그는 신바람이 났다." 하지만 영문도 모를 난장판 속에 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아큐의 흐리멍덩함과 어리석음은 덜컥 찾아온 행운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실패의 고통을 맛보았다." 그러나 실패의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곧바로 정신승리법을 통해 고통은 어느새 흡족함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편 좀도둑임이 발각되고 또다시 옹색해진 아큐에게 솔깃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지체 높은 양반들이 두려워하는 혁명당의 등장이었습니다. 아큐는 혁명에 올라타 뒤집기 한 방을 꿈꿉니다. "이 빌어먹을 운명을 혁파하자. 미운 놈들! 한스러운 것들!... 나도 혁명당에 들어가야지." 혁명의 주역이 되어 세상이 뒤집어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아큐. 그러나 그는 혁명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고작 자신의 변발을 말아 올린 것뿐. 혁명으로의 투신은 상상 속에서만 펼쳐집니다. 결국 아큐는 이도 저도 아닌 체 혁명의 주변에서 기웃거리다 그의 어리석음을 포착한 권력의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그리고 혁명의 희생량이 되어 죽임을 당합니다.


아큐의 삶에는 과정이 없습니다. 과업을 이루기 위한 치열한 과정들이 삶에서 생략되어 있습니다. 과정의 노력이 없기에 무엇도 이룰 수 없고 이룬 것 없는 비루한 인생. 하지만 현실을 압도하는 욕망은 망상을 부채질합니다. 아큐에게 한 줄기 희망은 오직 뒤집기 한 방뿐. 두께를 쌓는 과정 없이 인생역전을 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대부분 역전의 망상을 꿈꾸다 아무 소득 없이 인생을 탕진해 버리는 결과를 맞습니다. 설사 운 좋게 행운을 거머 줘도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갖춰지지 않으면 행운은 오히려 크나큰 화로 돌변하여 삶을 타격합니다. 두께를 쌓는 치열함을 피하거나 감당하지 못하면 삼류로만 머물 뿐입니다. 오늘도 한 치의 치열함 없이 인생역전을 꿈꾸는 자. 아큐와 같은 하류 인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언어의 한계 >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

< 비트겐슈타인 >


아큐의 언어는 과연 어떨까요? 비루한 인생만큼 아큐의 언어 세계는 무지로부터의 빈곤과 협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빈곤한 언어로 말하기 능력은 지극히 떨어지지만 매번 정신승리를 하느라 혼잣말은 청산유수입니다. 어눌한 아큐가 가장 신나게 말을 내뱉는 경우는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공격할 때입니다. 이렇듯 아큐의 존재 형식은 그가 즐기는 언어처럼 오직 타인에 대한 무시와 공격을 향해 있습니다. 빈곤하고 원초적인 언어는 감각적인 것에 집중하게 되고 감정의 배설과 뒤엉켜 왜곡된 정신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왜곡된 정신세계는 현실과 소통하지 못합니다. 끓어오르는 욕구를 참지 못하고 우 씨 어멈에게 어이없는 고백을 해버린 아큐. "너 나랑 자자, 나하고 자!" 우 씨 어멈은 허겁지겁 줄행랑을 칩니다. 상대방에 대한 무시가 전제되어 상황과 대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통행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타인과의 교감이 배제된 폭력적 소통 방식의 근원은 빈곤한 언어로부터 구조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소통의 부재로 인해 아큐는 점점 세상으로부터 고립됩니다.


무지는 언어의 빈곤을 야기하고 언어의 빈곤은 삶의 경쟁력을 약화시킵니다. 또한 지적 반성 능력이 결여되어 삶의 방향은 극단화됩니다. 언어의 빈곤은 곧 삶의 재앙인 것입니다. 아큐는 생각을 정립하거나 사건과 상황을 정의 내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판단을 하지 못하며 결정을 짓지 못합니다. 무시와 공격의 장이 아니면 언제나 우물쭈물하며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갑니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아큐는 누명을 쓰고 조사를 받게 됩니다. 권력자는 아큐의 어리석음을 눈치채고 그를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아큐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집어삼킬 화마 속으로 순순히 걸어 들어갑니다. 여기서 아큐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까막눈으로 자신의 명줄이 끊어질 판에 고작 동그라미를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숨이 달려있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전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아큐. 극단적 언어의 빈곤은 아큐의 세계를 소멸로 한계 지어버립니다. 아큐의 언어는 타인과 자신을 파괴하는 끔찍한 재앙이었습니다.


나의 언어는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의 가장 핵심적인 비물질적 토대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언어적 토대는 어떠한가요. 나를 세상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단단한 토대가 되어 떠받치고 있나요. 반대로 세상이 나를 잠식하도록 심연을 향해 무너지고 있나요. 내 언어의 질은 내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 무엇을 원하는가? >

우 씨 어멈을 희롱하여 기피 대상이 된 아큐는 곧 생존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별수 없이 살기 위한 몸부림을 준비합니다. "그는 길을 가며 '구걸'할 요량이었다. 잘 아는 주점... 잘 아는 만두집도 보였다. 하지만 모두 지나쳤다. 잠시도 멈추지 않았을뿐더러 구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굶어 죽어가는 판에 아큐는 구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드높은 자존심이 구걸을 막아선 게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저한 무기력과 무의욕, 무념의 상태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음은 그의 삶을 고갈시키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혁명의 물결에 올라 인생역전을 꿈꾸는 아큐.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혁명당과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눈치챕니다. 문제는 아큐와 좋지 않은 관계인 가짜 양놈에게 입당을 간청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벌레처럼 무시했을 가짜 양놈에게 아큐는 어렵게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그러나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가짜 양놈에게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나가... 꺼지라고" 아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문밖으로 달아났다... 가슴속에서 슬픔이 솟구쳤다... 그가 품었던 포부와 지향, 희망, 앞날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아큐의 혁명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혁명의 인생역전은 가짜 양놈의 단 두 마디로 허공으로 사라졌습니다. 가짜 양놈의 거절 두 마디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상실하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었기에 빈약한 내적 무장은 작은 충격에도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아큐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수많은 어리석음으로 존재합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만들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미성숙한 인격? 지성의 결핍? 빈곤한 언어?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이러한 어리석음을 극복하려는 마음의 발현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발현이 곧 모든 행위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도전과 과제에 직면합니다. 그 속에서 지금 내 역량의 한계와 마주합니다. 도전을 넘어설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에 나의 역량이 벽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편안함, 익숙함에 안주하여 벽을 넘어서려는 치열한 수고를 감당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현재를 고수하기 때문에 낯선 것을 거부합니다. 좁고 협소합니다. 자신이 만든 왜곡된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진실을 보지 않습니다. 아큐와 같은 이들입니다. 한 편 어떤 이들은 더 높은 수준의 세계 혹은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나아가려 합니다. 이들은 벽을 극복하기 위한 수고를 감내하기 위해 철저히 각성합니다. 미지의 영역으로 마음을 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철저한 각성이란 바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입니다. 아큐는 어리석음으로 마주하는 비천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마주하는 철저한 각성이 아닌 정신승리법을 통해 자기를 속여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비참한 삶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실현 가능한 어떤 것도 해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머무르거나 안주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정체된 삶은 결국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낙오되기 때문입니다. 주체적으로 우뚝 서서 매 순간 삶의 향상을 꿈꾼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작가의 이전글 걸리버, 끊임없이 건너가는 존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