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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로도 Feb 09. 2021

나를 안심시키는 마법의 주문

IT 회사의 쪼랩으로 살아가며 마주하는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

떨리고 무섭지만 꼭 내가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 있는 날 아침, 나는 나에게 외워주는 주문이 있다.


아, 10시간 뒤면 나는 집에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좋아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있을 거야.


내가 왜 이 주문을 외우고,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어쩌다 이 주문을 외우게 되는지 설명하자면 상황이 대략 이렇다.

(대략 치고는 좀 길다. 짧게 정리하면 모르는 게 많은데 제대로 되어야 하는 게 많은 아주아주 중요한 날이라고 하자 )


나는 큰 회사들이 회사를 운영하는 IT 시스템을 파는 회사에서 일한다. 나는 고객사가 사용자/비즈니스 중심적인 IT 전략을 만들고,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어떻게 해 나갈지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시스템에서 무엇을 더 좋게 하면 좋을지(aka 혁신/개선 과제 도출)부터, ERP Global Roll-out Planning (서울에 있는 내 방에 앉아서 대구에 살고 있는 컴맹인 누나의 컴퓨터에 엑셀 깔아주기랑 비슷하다), 가끔 재밌는 일로 신사옥/공간 재탄생 프로젝트까지 다양한 범위의 프로젝트를 한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 같이 힘들게 모여 전략의 방향성을 수립하고, 실행 과제들을 발견하고, 서로 생각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간을 설계해야 하는 일이 많다. 업계에서 흔히들 Design Thinking 워크숍이라고 부른다. 매번 금융, 제조, IT 등 다른 산업에 있는 고객사를 3~4주 정도 간격으로 만나서 이런 하루의 여정을 디자인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을 마주친다.


그중에 나를 주문 외우게 만드는 2가지 큰 어려움이 있다.




나를 주문 외우게 하는 2가지 어려움

첫째, 나는 모르는데 사람들은 나를 본다.


이런 워크숍의 대부분은 고객도, 우리 회사도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고민하는 자리이다. 참고할 만한 케이스가 있다면 땡큐지만,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산업의 고객을 만났을 때, 무지에서 오는 불안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매번 다른 산업의 범위도 다양하고 4주 만에 내가 공부해서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칠 만한 전문가가 된다? 말도 안 된다. 참가한 사람들은 그 업에서 10년 넘게 밥 먹고 그 일만 해오신 분들이 많다. 수십 년 동안 한 업계에서 전문가들을 수십 명 앞에 서면 여간 긴장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Why와 How가 섞인 질문을 10개만 얻어맞아 보면 밑천은 금방 드러난다.


후덜덜덜

내가 집중하는 것은 최대한 집단지성을 활용해 우리만의 해답을 만들어 나가고, 그 답이 충분히 의미 있는 답이 될 수 있도록 여정을 설계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 여정의 설계가 우리의 목적 달성에 최적화되어있고, 이렇게 하면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계의 대부분을 내가 책임 지고하는 경우가 많아, 내가 보통 전체 진행을 한다.


워크숍 참석자들은 진행자의 말을 듣고 움직인다. 이때 진행자의 말이란, '나'라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우리 회사'가 하는 말로 들려야 한다. 내 한마디가 우리 회사의 방향과 어긋나 버린 다면 큰 실수이다. 그래서 워크숍 전에 영업, 기술영업, 서포트, 마케팅 등 내부 이해관계자들과 메시지를 합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우리 회사를 대표해 이야기해야 하는 시간.

20여 명의 처음 보는 사람들이 팔짱을 끼고 어디 한번 해봐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주문 외우게 하는 2가지 어려움

둘째, 오늘이 가진 의미가 무겁다.


8시간의 워크숍을 설계를 위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반년 동안 준비한다. 대개 20여 명의 IT부서, 재무, 영업 등 다양한 부서의 중요한 사람들이 모인다. 이 워크숍 설계를 할 때 무겁지만 꼭 다뤄야 할 질문이 있다.


고객사와 우리 회사에게 이 하루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고,
참가한 사람들 각자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이런 워크숍은 보통 고객사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담당하는 팀에서 지휘하는 경우가 많다. 현장, IT, 경영진의 필요를 잘 종합하고 조율해서, 더 좋은 비즈니스를 하고 더 나은 회사가 될 수 있는 IT적 기반을 만드는 팀이다.


워크숍에서는 온갖 일들이 일어난다


워크숍을 요청한 팀에게 이 하루는 앞으로의 혁신 여정을 함께 설계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IT 부서는 현업의 중요한 사람들에게 왜 IT가 중요하고 현업의 긴밀한 협조가 왜 필요한지 공감해주길 바란다.(내 경험 상, 현장과 사이가 좋은 IT 부서가 많지는 않다. 특히 제조회사는 더욱이.) 현업들은 제발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우리한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공감해주길 바란다. 경영진은 일단 서로 좀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자리를 스폰서한 우리 회사의 영업은, 이 활동을 통해 IT와 현업의 관계 형성을 기대하고 IT 부서가 더욱 힘을 얻기를 바란다. 회사 내에서 힘은 곧 예산 증대를 의미하며 향후 영업 활동에 기반이 된다. 꼭 의미 있고 재밌었다는 피드백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현업, IT 모두에게 우리 회사 솔루션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일타쌍피의 기회이다.


실제로 참가자들은 이 하루에 온종일 집중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내부 작업을 거친다. 일단 그날 되어야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 놓고 와야 해서 눈치가 보인다. '아, 저분은 바빠 죽겠는데 왜 하루를 통째로 빼고 간대?'라며 동료들에게 핀잔을 먹기도 한다. 매니저도 설득하고 출장, 외근 신청 절차도 거쳐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와서 노는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곳에 와서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들이랑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어색하고 긴장된 상태이다.


오늘이 가진 의미를 공감하게 되면, 가끔 버거울 때도 있다. '이 사람들의 노력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라는 책임감이 엄습한다. 워크숍 장소에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오늘의 의미'를 느끼게 되면, 나도 절로 긴장하게 된다. 빠뜨린 것이 없나 불안한 마음이 든다.




혓바닥이 길었다. 내가 왜 긴장하게 되는지 공감해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긴장되는 일이 달에 적어도 1번씩은 일어나게 되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내 마음을 달래는 방법을 터득해 버렸다.


여기서 잠깐 슬로모션으로 묘사가 들어간다.


시작할 시간 3분 전이다. 진행하기 위해 부담감을 안고 왼손으로 마이크를 움켜 잡는다. 마이크 옆에는 목을 축이기 위해 미지근한 물을 한가득 떠 놓은 머그컵이 있다. 오른손으로 컵을 들어 아랫입술로 컵의 온도를 느낀다. 손목을 젖혀 컵 바닥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린다. 콧등까지 컵 안에 잠긴다. 말라있는 입 안에 물을 흘러 들어온다. 바짝 말라있던 입 안이 촉촉해진다. 컵 위로 빼놓은 눈은 먼 산 바라보듯 멍하니 초점을 잃는다. 그렇게 컵에 내 얼굴을 반쯤 묻고 컵 뒤에 잠깐 숨어있는다. 머금은 물을 꼴깍 삼킨다.

그렇게 물 한 모금을 마시는데 걸리는 시간, 3초.


그 3초의 순간에 나는 나에게 이렇게 주문을 외우고 있다.


아, 10시간 뒤면 나는 집에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좋아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있을 거야.


사실 스스로 이런 문장을 소리 내서 말하지는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소리 내 말해주는 그런 걸 가끔 상상해보는데, 좀... 뻘쭘하다. 이 말을 되뇌면서, 이런 상황 속에 있는 나를 찍은 사진을 상상한다라고 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이 주문은 불안하고 긴장한 나에게 자신감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 준다. 이 주문 속에 숨겨진 원리, 주문 외우는 방법, 주문의 성공률 높이는 방법은 이렇다.



Tip 1. 불안한 마음을 중립의 상태로 만들기


불안하고 긴장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안하지 않고, 긴장이 덜한 상태이다. 이 상태의 끝판왕을 '편안하다'라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 상태까지 가는 과정 속에는 불안하지는 않은데 편안하지는 않은, 그런 중립의 상태가 있다.


불안함에서 바로 편안함으로 가는 것에 과정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과정 속에는 '그냥 그저 그런 상태'도 존재한다.


이 주문의 원리는 불안한 마음에서 '그냥 그런상태로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불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긴장과 불안에 휩싸이면 마음에 무언가 들어가지 못하는 딱딱한 상태가 된다. 비워져서 무언가 들어올 수 있는 유연한 중립의 상태인 '그냥 그런'상태로 만들어 보자.


비우는 이유는 자신감이라는 녀석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기 위함이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하더라도 마음이 불안할 때는 자신감이 발휘되기가 힘들다. 자신감의 중요한 발동 조건은 불안을 불편하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편안한 상태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중립의 상태로 만드는 것. 그렇게 나 자신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줄 준비가 된다.

 


Tip 2. 최대한 구체적으로 기억해내기


내가 원하는 편안함의 상태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기억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내 오감으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 속의 세상보다는 친숙하고 잘 아는 경험이 좋다. 버킷리스트에 있는 휴양지 해변에서 놀고 있는 상상보다는, 오늘이 끝나고 아늑한 집안에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상상한다'라는 말 보다 '기억해낸다'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내 머릿속에는 대충 이런 곳이 떠오른다


무엇이 들리고, 공간의 밝기는 어떤지. 어느 정도의 따뜻함이 느껴지고, 어떤 냄새가 나는지. 내 오감이 기억하고 있는 그 경험을 끄집어내 기억한다. 그 구체적인 경험 속에 있는 나를 다시 끄집어 내본다. 그 경험을 속에 있는 나를 바라는 것 만으로 긴장이 조금은 이완된다.


너무 먼 미래에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는 가까운 미래에 경험할 수 있는 기억이 더 잘 통하는 것 같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상태, 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상상해보고 그 미래가 단기적으로 곧 온다는 기대로 불안이라는 녀석을 잠재워 볼 수 있다.



Tip 3.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서 천천히 걸으며 숨 고르기


냄비에 눌어붙은 음식물을 떼기 위해 박박 긁어서 떼는 것도 방법이지만, 따뜻한 물에 불려 놓고 떼면 더욱 쉽게 떼 진다. 이처럼 주문을 무작정 외우는 것이 아니라, 주문이 더 잘 먹히도록 환경을 만들면 더욱 효과적이다. 생각보다 아~주 간단한데 이 3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1. 햇볕 쬐기
2. 간단히 몸 움직이기
3. 안정적인 호흡을 하기


사람이 긴장하고 스트레스받고 불안하게 되면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녀석은 일시적으로 판단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지만, 뇌로 공급되는 포도당의 양을 줄여서 피로감을 높이고 우울하게 만든다. 이때, 필요한 녀석이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다. 세로토닌은 편안한 상태를 느낄 때 나오는데, 불안하고 충동적인 마음을 추슬러주는 역할을 한다. 


위 3가지는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시키는 방법이다. Tip 2에서 말했던 과거의 편안한 상황에서 만족했던 경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정리

햇빛이 내리쬐는 창가에서 서성이면서 3번의 심호흡을 크게 내셔 보자. 그리고 미지근한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이 마법의 주문을 외워보자. 20초도 안 걸린다.


"아, 10시간 뒤면 난 집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싹~ 하고,
반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소파에 앉아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BTS의 Dynamite를 듣고 있겠지?"


상황에 대해 나를 안심시키는데 유명한 말로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말이 더 잘 통하더라. 그리고 모든 이벤트에는 끝이 있다. 끝이 있음을 꼭 기억하자.




에필로그

하.지.만. 중요한 점은(슬픈 소식에 가깝겠지만...) 이렇게 나를 안심시킨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주하는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주문이 나에게 딱히 자신감을 심어 주지는 않는다. 불안하지 않는 상태가 자신감 있는 상태는 아니니까.


내가 자신감을 키우는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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