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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신 Feb 17. 2018

필기구에 대한 단상

 초등학교 저학년 때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연필 한 다스를 선물 받으면 그것만 주구장창 썼었다. 어릴 때 부터 마이너스의 손이었는지 연필 깎기에 연필을 깎으면 항상 연필심이 박혀셔 문제였다. 박힌 연필심 빼겠다고 톱밥 같은(연필 깎은 가루들)것들이 우수수수 떨어지고 칼날을 손대다가 손은 까맣게 변하고 총체적 난국이다. 빼쪽한 것으로 칼날에 박혀 있는 연필심을 살살 빼면 툭하고 빠진다. 거기서 묘하게 연필심가즘을 느낀다. 연필심이 툭 빠져 있는 나뭇가지 같은 연필을 다시 깎는다. 그 당시에 나는 연필 깎기 상태가 좋으면 고르게 잘 깎이고 그러지 못한 날이면 한쪽은 잘 깎였는데 한쪽은 덜 깎여서 불편하게 만들었다. 덜 깎인 쪽도 깎인 쪽과 같이 고르게 깎겠다고 욕심내면 늘 부러졌다. 연필로 일기를 쓰고, 수학을 풀고, 국어 책에 나와 있는 질문에 답을 쓰고, 그림도 그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샤프를 썼다. 그래야만 언니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 나이 때 초딩이지만 초딩으로 불리기 싫고 누가 '으 초딩ㅋㅋㅋㅋ'하면 발끈하며 중학생인 척하고 싶어 하는 마음. 샤프는 혁명이기도 했다. 연필은 연필심 닳으면 글씨가 굵어져서 이상해 보였는데 샤프는 늘 항상 진하고 가늘게 쓸 수 있었다. 이때도 마이너스의 손은 발동했다. 샤프심 교체하면서 샤프가 우수수수 떨어져 부러지거나 줍는 와중에 샤프심이 쿠크다스를 깔 때처럼 바사사삭하고 부러졌다. 자주 교체하는 것이 귀찮아서 욕심을 내어 한번에 많이 넣다가 막혀가지고 안 나오면 수술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만큼은 종합병원에 높은 닥터이다. 일단 샤프 머리 부분을 열어서 빼쪽한 것으로 뚫는 작업을 한다. 한 번에 성공해야 깔끔하게 툭 떨어지기 때문에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집중을 해서 이쑤시개나 또 다른 샤프로 막힌 부분을 뚫어 내면 '아 샤프심가즘..'그러고 뭐든 과하면 안 되는구나 하는 교훈도 얻는다.
 샤프를 쓰다가 4색, 5색, 7색 볼펜 아니면 3색+샤프. 똑딱거리면 색을 바꿔가면서 쓰는 재미도 있었다.
 중학교 때는 미피 볼펜을 썼다. 검정, 파랑, 빨강. 문구점에 가서 다 똑같은 미피 볼펜이지만 조금이나마 똥이 덜 나오고 글씨가 안 끊기는 것을 고르기 위해 집중해서 고른다. 한 가득 골라서 쟁여 놓고 썼다. 잉크가 떨어질 것을 대비해 검은색은 쓰던 것, 새 것 늘 2개를 들고 다녔다. 잉크가 다 떨어질 때쯤이 되면 글씨가 뚝뚝 끊긴다. 그러다 볼펜 머리 뚜껑을 열어 보면 역시나 잉크를 다 썼다. 그리고 새것을 꺼낸다. 첫 개시는 일단 연습장에다가 몇 번 동그라미를 그린 다음에 다시 필기를 한다. 그럴 때마다 준비성 철저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헌 미피는 버리고 새 미피를 필통에 채워 넣었다.
 고등학교 때는 아마 SIGNO 0.35 잉크 볼펜을 썼다. 이 볼펜으로 고등학교 3년을 보냈다.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글을 쓸 때 글씨가 예뻐 보였고 다이어리를 쓰던 나에게 딱인 볼펜이었다. 종종 교과서에 필기하다가 잉크가 번지면 그것만큼 보기 싫은 것도 없긴 했다.
 키가 작아서 거의 앞자리에 앉았는데 선생님들께서 출석 부를 실 때 종종 나에게 볼펜을 빌리셨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SIGNO 볼펜을 빌려드렸다. 출석을 부르는 내내 모든 신경을 볼펜에 쏠려 있어 불편했다. 최악의 상황일 땐 볼펜을 못 받은 적도 있어서 그 이후론 선생님들께 빌려드리는 전용 볼펜도 넣어 다녔다. 잊어버려도 상관없는 볼펜.
 그러다 21살 때였나 친구가 볼펜 리필심을 사러 가야 한다고 문구점에 갔다. 친구가 '볼펜 리필심만 바꿔주면 오랫동안 쓸 수 있어. 그리고 필기감도 우리가 딱 좋아하는 거야.'라고 말했을 때 혁명이었다.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해서 볼펜을 빨리빨리 썼는데 버려지는 볼펜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잉크만 쓰는데 볼펜 몽통을 버려야 해서 환경오염에 크게 기여하는 듯한 느낌(환경오염에 기여하는 대표적인 건 아마 메모장, 노트 일 것이다)이었는데 이건 리필심만 바꿔주면 되니 여러모로 좋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5색으로 기본인 검정, 빨강, 파랑 그리고 보라색 초록색을 샀다. 집에 와서 볼펜 몸통에 리필심을 끼워서 다이어리에 바로 써봤는데 글씨가 깔끔하게 예쁘게 써졌다. 볼펜은 SIGNO 0.38 리필심 버전이다. 그 이후로 쭉 썼다. 그러다 23살에는 SIGNO와 연필을 병행하며 쓰다가 연필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21살이었나 22살이었나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일러스트 개인 레슨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준비물로 스케치북과 전문가용 4B연필을 사라고 하셨다. 선을 너무 못 긋고 긋는 것을 두려워해서 속도가 너무 느렸고 재미가 없었다. 조금 하다가 그만두다가 그 연필은 지금 필기용으로 야무지게 쓰이고 있다. 그 이후로 HB부터 2HB, B, 4B, 5B, 6B, 7B, 8B까지 다양하게 써봤다. 다 같은 흑심이지만 이렇게 다양할 줄은 몰랐고 필기감도 달랐다. 주로 많이 쓰는 것은 한 다스로 사뒀던 전문가용 4B이고 STAEDTLER 연필을 알게 돼서 STAEDTLER의 4B, 5B, 6B, 7B, 8B까지 사서 썼다. 주로 많이 쓰던 것은 4B, 5B이다. 그래도 6B까지는 필통에 넣어두고 다닌다. 7B, 8B는 연필의 느낌보다는 콩테 느낌이 난다. 완전 뻑뻑. 빼쪽하게 깎았을 때는 '어딜 한번 써봐. 시원하게 부러져 주겠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가끔씩 조심스레 쓴다.
 연필의 가장 큰 매력은 지울 수 있다는 것. 물론 볼펜도 수정테이프로 지울 수 있지만 너무 하얗게 지워지고 수정테이프 위에 글을 쓰면 누가 봐도 '잘못 썼음' 하는 느낌이 든다. 연필은 지우개로 야무지게 지우면 깨끗하게 다시 쓸 수 있다. 잘못 써도 틀려도 된다는 마음에 가볍게 시작하고 쓸 수 있다. 힘의 세기를 조절하면 다양한 분위기의 글씨가 되고 몽땅 연필이 될 때까지 쓰는 재미까지 있다.
 연필심이 닳으면 깎아줘야 하고 잘 부러지고 지우개와 필통 속을 더럽히긴 하지만 그래도 연필이 좋다.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고 지울 수 있는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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