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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픽처
by 김신지 Jul 09. 2018

여름맞이 본격 맥주 예찬

맥주는 내게 용기도 주고 낙관도 주고 친구도 주고 추억도 주었다



여름은 바야흐로 맥주의 계절이다. 해가 지는 한강에서도, 옥탑 평상에서도, 편의점 파라솔 아래서도 맥주가 있어야 비로소 여름의 풍경이 완성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면 ‘맥주 그 배만 부른 걸 무슨 맛으로 먹냐!’라는 반대에 늘 부딪치곤 했으므로 곰곰이 더 생각해보았다. 그 결과 맥주의 훌륭함에는 아래와 같은 일목요연한 근거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 맥주는 현재를 살게 해준다 

기분이 좋아서 마시는 맥주도 맛있지만, 스트레스를 받은 뒤에 마시는 맥주엔 특별한 기능이 있다. 바로 만성 스트레스로 인해 높아진 혈중 코르티솔 농도를 낮춰주는 것… 일 리 없는데 마치 그런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날 하루 무슨 일이 있었든 누구와 있든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의 내 상태는 한결같다. 


‘역시 오늘 걱정은 내일 해야 맛이지….’ 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해 지는 하늘은 예쁘고, 맥주는 시원하고, 이대로도 충분히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대책 없이 낙관적인 기분이 들게 하는 음료도 없는 것 같다.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나, 같은 술 과인 소주나 와인은 단박에 이런 기분이 들게 하진 않는다. 


때문에 평소 쓸데없는 걱정과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맥주가 주는 낙관의 힘이 필요하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지금 마시는 맥주는 지금만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방금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놓인 시원한 맥주 한잔 앞에서는 내일이 마감인데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나 엄마가 말도 없이 들어놓은 보험의 월 납입금이나 낮에 들은 마음 상하는 말 같은 건 역시 내일 생각해도 좋을 일이 된다. 이대로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 같기도 하고, 옆 테이블의 유쾌한 사람들로 둘러싸인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 같고, 낮 동안 아등바등했던 마음 같은 건 어쩐지 바보 같아진다. 


맥주가 내게 준 가르침은 실로 단순하다. 아등바등하면? 아등바등하는 인생을 살게 되겠지. 즐겁게 살면? 즐거운 인생을 살게 되겠지. 그러므로 이왕이면, 좋은 쪽을 택하는 것이 낫다. 단순하지만, 아등바등하는 낮 동안엔 결코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2. 맥주를 한잔 마신 상태의 내가 낫다 


어쩐지 점점 주정뱅이 같아지는 답변이지만… 십 년이 넘도록 관찰해본 결과 맥주를 한잔 마신 상태의 내가 안 마신 상태의 나보다 낫다. 좀 애석하지만 사실이다. 맨 정신에도 괜찮은 인간이면 좋겠으나, 태어나길 그렇지 못했나 보다. 


우리 집안은 태생적으로 내향성의 피가 흘러 명절이면 TV를 향해 온 친척이 데면데면하게 앉아 있곤 했는데 술잔이 한차례 돌고 나면 이상하게 다들 유쾌해지고 말았다. 평소라면 쑥스러워 묻지 못했을 속 깊은 안부도 묻고, 모두를 웃게 하는 농담도 하고, 낯선 사람이 찾아와도 환대하며 선선히 섞여 앉아 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탓에 서둘러(?) 술을 배웠고 대대로 이어져온 내향성을 뚫고 신나! 신나! 하는 성격에 이르게 되었다. 


맥주를 마시면 평소 조이고 살던 ‘맨 정신’이라는 나사를 한 바퀴 정도 느슨하게 풀어놓은 상태가 되는데, 실은 딱 그 정도의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도 남에게도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의 나는 낯가림은 줄고 농담은 늘고 누가 내 무릎에 술을 쏟아도 하하하하, 웃는 사람이니까.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해진 버전의 나라고 해야 할까. 맥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아무래도 지금보다 재미없고 지루한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물론 술은 적당히가 좋습니다. 나사를 아예 풀어버리면 곤란하니까요). 



3. 맥주가 가능하게 한 인생이 있다 


그러고 보면 맥주는 내 인생에 많은 것을 주었다. 낯가림을 지워 좋은 친구도 만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미 충분히 알고 지낸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깊은 대화도 나눌 수 있게 해주었다. 새로운 꿈을 꾸게 해주었고, 좋은 다짐들을 하게 해주었고, 오래 기억할 추억도 만들어 주었다. 적어도 내게는 맥주 때문에 가능했던 시간들이나 관계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맥주를 마시며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하면 너무한가. 거창하게 썼지만, 알고 있다. 맥주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사실 나는 현재를 살 줄 아는 나를,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해진 나를, 이제 삶에서 알 만한 건 다 알아버렸다는 태도로 문을 닫아걸지 않고 여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꿈을 꾸기도 하는 나를 좋아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나를 꺼낼 수 있어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맥주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것. 무엇이든, 자신을 평소의 자신보다 조금 더 좋아지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좋아하자. 아주 많이 좋아해버리자. 그럼 그 무언가가 모르는 사이 인생을 서서히 바꾸어놓기도 한다. 


그건 아마 좋은 나를 조금씩 연습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좋은 나를 만나고 알아가고 연습한 기분은 내 속에 남아 나를 차츰 그런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 없이도 좋은 내가 되겠지. 아직은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해, 이 글은 사실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썼다.



Illustrator 키미앤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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