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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om The Golden Age May 03. 2020

위대한 재탄생: 산토스 드 까르띠에 '까레'

 빈티지 시계에 관련한 블로그의 첫 글의 주제로 가장 어울리는 시계가 있다면 까르띠에의 산토스가 아닐까 합니다. 2018년 까르띠에의 신형 산토스가 발매되면서 신형 산토스와 함께 구형 산토스 모델들에 대한 인기와 관심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국내 커뮤니티에는 이에 대한 명확한 정보들이 없어서 늘 아쉬웠는데, 이참에 산토스에 대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까르띠에의 산토스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손목시계' 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있습니다. 산토스는 특유의 사각 프레임과 베젤과 브레이슬릿 위의 나사들로 대표되는 아이코닉한 디자인뿐만 아니라 이런 역사적 가치 덕분에 손목시계 시장이 계속되는 이상 영원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시계일 것입니다. 최초의 손목시계에 대한 논란은 많으나 최초로 '손목시계 전용' 으로 양산된 시계는 까르띠에의 산토스라고 말한다면 이견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합니다.


알베르토 산토스 듀몽과 까르띠에 산토스 듀몽


 까르띠에의 산토스는 1904년 당시 파일럿이자 얼리어답터였던 브라질 태생의 알베르토 산토스-듀몽(Alberto Santos-Dumont)이 그의 친구이자 유명 보석상이었던 루이 까르띠에에게 비행에 필요한 시계를 부탁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일부 여성들이 회중시계에 가죽을 덧대어 손목에 차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 당시 회중시계에 익숙했던 남성들에게는 시계를 손목에 찬다는 것이 다소 여성스러운, 혹은 남성성이 부족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듀몽은 비행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손목시계가 필요했던 상황이었죠. (여담이지만 최초의 손목시계에 대한 논란은 대부분 회중시계를 손목시계로 개조한 시계가 이미 있었다는 점에서 기인합니다.)


 듀몽의 비행 이후 까르띠에의 산토스는 손목에 착용할 수 있는 고급시계로 알음알음 부유층들에게 알려지게 되어 이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제작 판매하는 방식으로만 생산을 하다 1911년부터 예거의 무브를 납품받아 산토스라는 이름으로 까르띠에의 부티크에서 정식 판매되기 시작합니다. 듀몽의 유명세와 더불어 자체의 매력때문에 산토스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다만 아쉽게도 이러한 성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손목시계라는 물건은 매우 보편적으로 보급되었고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는 양산과 대량 보급이 가능한 원형, 스틸소재의 시계에 한정된 이야기였고 사각형에 금소재로 만든 최고급 시계였던 까르띠에의 산토스는 오히려 그 생산을 멈추게 됩니다. 세계대전은 까르띠에로부터 산토스를 뺐어갔지만 까르띠에는 세계대전에 쓰인 탱크로부터 영감을 받아 탱크라는 사각시계를 제작하게 되었고 이는 산토스가 자리를 비운 시계 제작사 까르띠에의 대표 모델이 됩니다.


까르띠에가 영감을 받은 탱크의 설계도와 빈티지 탱크

 산토스의 침묵은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었는데, 무려1978년이 되어서야 까르띠에는 산토스를 자신들의 판매목록에 추가합니다. 그 당시 까르띠에의 위치는 현재의 까르띠에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오히려 20세기 초반의 인식과 비슷했는데, 최고의 보석 세공 기술을 가진 까르띠에의 시계들은 기본적으로 금 혹은 백금 소재로 만들어져 일반적인 대중들은 접근하기 힘든 가격표가 매겨져 있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분류한다면 하이엔드급 시계 제조사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변화의 바람은 의외의 곳에서 불기 시작했는데, 최고급 시계 제작사인 '오데마 피게'가 스틸을 엄청난 세공력으로 다듬어 전설적인 '로얄오크' 라는 스포츠시계를, 당시에도 고급시계였던 롤렉스의 서브마리너의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에 발매해 대성공을 거두는 일이 벌어지며 시작됩니다. 로얄오크의 성공에 뒤이어 모든 시계 제작사의 정점이라 불리우는 '파텍필립'까지 '노틸러스'를 발매하며 최고급 스틸 스포츠워치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됩니다. 

오데마 피게의 로얄오크(좌) 와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우)

 이런 상황속에서 까르띠에의 마케팅 매니저 도미닉 페린 (Dominique Perrin) 은 스틸을 소재로 한 비교적 접근 가능한 가격대의 고급 스포츠 시계가 필요하다는 시의적절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까지 오직 (일부의 예외만 제외하면) 귀금속으로만 시계를 만들었던 까르띠에는 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스틸 소재 스포츠 워치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위해 전설적인 시계인 '산토스'의 재발매라는 카드를 쓰게 됩니다. 파텍필립이 노틸러스로 로얄오크에 대답했다면 까르띠에는 산토스로 로얄오크에 대답한 것입니다. 그렇게 산토스는 산토스 까레라는 이름을 가지고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됩니다.

산토스 드 까르띠에의 포스터.

 로얄오크와 관련된 산토스 까레의 출시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산토스 까레의 베젤을 강조한 디자인과 나사를 베젤 위에 그대로 노출시킨 디자인, 팔각은 아니지만 사각으로 각진 디자인은 로얄오크와 유사한 면이 있어보입니다. 그럼에도 산토스 까레를 단순히 로얄오크에게서 영향을 받은 미투 상품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까르띠에의 산토스 하면 연상되는 많은 부분, 사각형의 케이스와 다이얼,베젤이 강조된 디자인과 베젤 위 나사를 그대로 노출시킨 디자인등이 과거의 산토스에게서도 이미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파텍필립에게 노틸러스가 완전히 새로운 시계다면 산토스 까레는 시대적 필요로 인해 까르띠에 스스로의 유산을 재해석해 만들어낸 작품인 것입니다.


 산토스 까레는 일부분은 최초의 산토스로부터 일부분은 로얄오크에게서 영향을 일부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특유의 브레이슬릿과 브레이슬릿의 나사, 산토스에서만 쓰이는 용두의 각진 디자인은 1978년 발매된 '산토스 까레 (Santos Carree)' 모델을 통해 새롭게, 그리고 아마도 영구적으로 인식될 산토스만의 특징들입니다. 산토스 까레는 대부분 스틸 소재이지만 중요 부분을 금으로 제작한 콤비 (스틸과 금을 동시에 배치)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꽤 획기적인 방식이었으며, 이는 산토스의 성공 이후 많은 브랜드들이 따라하게 된 성공 방정식입니다. 


 29mm x 41mm의 크기는 언뜻 보면 너무 작은 게 아닐까 생각하실 수 있지만, 원형 시계들로 생각할 경우 34mm 정도의 크기감으로 까르띠에를 연상하면 생각나는 과하지 않은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크기입니다. 

산토스 드 까르띠에 '까레' (Santos de Cartier 'Carree')

 최초의 산토스, 탱크등 초기의 대부분의 까르띠에 모델들은 최고급 무브먼트 제작사인 예거 르쿨트르의 무브먼트들을 공급받아 사용하였지만 산토스는 비교적 보급형인 ETA사의 2671 무브먼트를 수정하여 만든 Calibre 076 (여성용), Calibre 077 (남성용)을 탑재하여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시계 제작사 까르띠에는, 비록 당시에 독자적인 무브먼트 제작 기술은 없었지만, 하이앤드 제작사 위치에서 점차 대중적으로 친숙한 고급시계 브랜드로 포지션을 바꾸게 됩니다. 이런 브랜드 위상의 변화가 제작사 입장에서 나쁘지만은 않은 것은 그만큼 인기 높은 대중적인 시계가 되었고 판매량과 수익이 늘어났다는 방증 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콤비 산토스 까레가 큰 성공을 거둔 뒤 산토스는 통금, 스틸 모델로도 발매되어 인기를 이어갑니다. 


 이러한 산토스의 시계 내적, 외적 특징들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산토스의 특징이 되는데 현대적 산토스의 방향은 이 까레 모델로부터 거의 모두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우 마이클 더글라스와 산토스 까레 금통 (1987년)
산토스 갈베 쿼츠 콤비 L (좌), 산토스 갈베 오토매틱 스틸 (우)

 아마 구형 산토스에 대해 아시는 분들은 '산토스 갈베 (Santos Galbee)' 라는 이름을 가장 먼저 들어보셨을 겁니다. 까르띠에는 1987년 산토스 까레의 뒤를 이어 새로운 버전의 산토스인 산토스 갈베를 발매합니다. 이 당시에는 이미 쿼츠파동이 일어난 뒤로서 까르띠에 역시 쿼츠 무브먼트를 일부 사용하기 시작한 뒤였습니다. 산토스 갈베 역시 산토스 까레의 특징을 대부분 물려받았으며 거의 동일한 사이즈로 출시되었으나 까레와는 다르게 갈베는 쿼츠 모델과 오토매틱 모델, 두 모델로 출시되었습니다. 까르띠에의 산토스 갈베는 까레가 가진 모델들보다 훨씬 다양한 다이얼 디자인을 가지고 생산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대략적으로라도 구분할 방안이 필요한데, 까르띠에 산토스 갈베의 라지사이즈는 오토매틱의 경우 '오토매틱' 서체와 함께 3시에 날짜창이, 쿼츠모델은 오토매틱이란 표시가 없이 6시에 날짜창이 있습니다. 까르띠에의 까레는 3시에 날짜창이 있으면서 오토매틱 표기가 없습니다. '날짜창이 6시에 있으면 산토스 갈베 쿼츠이고 날짜창이 3시에 있으면 산토스 오토매틱 모델이다. 오토매틱 모델 중 까레는 오토매틱 표기가 없고 갈베는 오토매틱 표기가 있다.' 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산토스 까레 브레이슬릿(좌) / 산토스 갈베 브레이슬릿(우)
산토스 까레 콤비L (하), 산토스 갈베 스틸 XL (상)
산토스 까레 콤비 L (좌), 산토스 갈베 스틸 XL (우)


 현재 국내 커뮤니티에는 까레 모델과 갈베 모델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사실 까레에 대한 자료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주로 국내에서는 산토스 까레를 산토스 구형 갈베로 지칭하곤 합니다. 하지만 산토스 까레 모델은 산토스의 새로운 현대적 시작점으로의 의미가 있고, 이 역사적인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2016년까지 생산된 갈베 모델들은 1978년부터 생산된 까레 모델과 연식의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둘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모델은 언뜻 보기에는 상당히 닮아있는데, 앞서 말씀드린 날짜창과 오토매틱 서체 유무 외에도 몇 가지 차이점이 더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1. 산토스 까레의 브레이슬릿은 뒷면이 아치형, 갈베의 브레이슬릿은 일자형에 가깝습니다.

 2. 산토스 까레의 버클은 까르띠에 로고가 있는 반면 갈베의 버클은 브레이슬릿의 연장에 가깝고 로고가 없습니다.

 3. 산토스 까레의 뒷백은 케이스와 일체형으로 볼록한 반면 산토스 갈베의 뒷백은 케이스와 분리형이며 평평한 편입니다.


산토스 갈베 XL 스틸모델 (좌) 산토스 까레 L 콤비모델 (우)


 산토스 발매 100주년이었던 2004년, 까르띠에는 100주년 기념모델을 발매하였고 1년 뒤 2005년, 까르띠에는 산토스 갈베의 XL 모델을 출시합니다. 이 XL 모델은 32mm x 45.5mm 로서 이 역시 착용하기에 적절한 사이즈인데, 이 사이즈는 빅사이즈 워치가 유행이던 시기에 발매된 산토스 100주년 기념모델의 M 사이즈와 비슷한 정도의 사이즈입니다. 이후 현재의 2018년 까르띠에 모델의 M 사이즈도 이와 비슷한 정도의 사이즈로 출시되며 산토스의 크기를 이전보다는 크게 가져가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5년은 오토매틱 시계 시장이 쿼츠 파동의 긴 침체에서 벗어나는 시점이었으므로 까르띠에는 산토스 갈베 XL 모델을 오토매틱 모델로만 생산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시계의 날짜창의 위치는 3시 혹은 6시 방향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산토스 갈베 XL는 과감하게 날짜창을 4시와 5시에 위치시켜 심미적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또한 심볼과도 같은 로만 인덱스 역시 조금 더 두꺼워져서 남성스러운 인상을 주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산토스 갈베 모델은 2016년부터 생산을 중단해 매니아들은 큰 아쉬움을 품었는데, 그 뒤 2018년 까레와 갈베의 디자인을 적절히 계승, 발전시킨 신형 산토스를 발매하게 됩니다.




2018년 발매된 신형 산토스 스틸 M 사이즈

 현재 시계 제작사로서의 까르띠에는 자신들의 3개의 축으로 산토스와 탱크, 발롱블루를 꼽습니다. 최초의 손목시계라는 명성은 대단한 것이지만 단지 유려한 디자인만으로도 까르띠에의 산토스는 한 번쯤 착용을 고려해볼 만한 시계라고 생각합니다. 산토스의 이러한 매력은 현대의 산토스가 과거의 명성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각형 프레임과 개성있는 나사들, 스틸 브레이슬릿은 산토스가 가진 찬란한 역사와는 별개로 매우 매력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대부분의 산토스의 방향성을 정립한 최초의 현대적인 산토스인 까레 모델은 현재 알려진 명성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가치가 있는 모델입니다. 모든 탄생은 놀라운 것이지만 성공적인 재탄생은 진정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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