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아공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미리부터 걱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남아공은 더욱 안심이 되지 않던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막상 여행을 시작해보니 생각보다 잘 갖춰진 도로에 놀랐고 무엇보다 마을과 마을을 이동하는 동안 물이나 음식을 구할 수 있는 휴게소가 종종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여행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음 케이프타운을 떠날 때만 해도 황무지를 상상하며 많은 양의 물과 식량을 비축했지만 어느덧 너무 많이 짊어진 식량은 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전거에 지니는 짐을 최소화하여 가볍게 다니고 빠르게 이동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그러던 우리에게 얼마 가지 않아 큰 고비가 찾아왔다. Vanrhysdrop에서 Nuwerus까지 약 70km를 이동한 날이었다. 장거리는 아니었지만 역풍이 굉장히 심한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마을과 마을 사이에 식량을 구할 적당한 장소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여 떨어진 물과 식량을 비축하지 않고 마을을 출발하였고 이는 궁극의 허기와 갈증을 맛보게 해 준 하루가 되었다. 극도로 배가 고프니 잠이 쏟아져 한 걸음 앞으로 나가기 조차 힘들 정도의 정신상태였다. 다행히도 가방 한 구석에 전전 마을에서 떠 놓은 밥 한 끼 해먹을 정도의 물이 남아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밥을 지었고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쌀이 익는 동안 갖고 있던 딸기잼을 수저로 몽땅 퍼먹었다. 겨우 밥이 된 쌀에 한국에서 가져온 맛다시를 비벼 허기를 채웠다. 물이 없어 입을 헹구지 못해 짜고 단 맛을 콧속 가득히 머금고 남은 20km를 향해 있는 힘것 페달을 밟았다. 두 번 다시 오늘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된 하루였다.
자전거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정말 충분히 먹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 차이일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자전거 여행을 하는 동안 급 허기짐에 많이 시달렸다. 고통스러웠던 70km의 라이딩 이후로 우리는 적당한 식량을 짊어지는 것에 더욱 신경 썼고 무엇이든 미래 지향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정리하자면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두고 적당한 양의 식량을 자전거에 짊어지자는 것이다.
남아공과 나미비아 국경에서 약 138km 떨어진 곳에 Springbok이라는 마을이 있다. 국경에서 가까운 제법 규모 있는 마을인데 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 정말 많은 업힐을 넘어야 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지만 내리막도 오르막에 비해 짧은 거리이거니와 불어오는 역풍에 밀려 신나게 내리막을 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벌 받는 기분으로 남아공을 여행한 것 같다.
나미비아 B1도로와 이어지는 N7도로는 대부분 잘 정비가 되어 있었다. 반면에 정비 중인 도로도 제법 있었지 길지 않은 거리였다. 남아공의 N7도로는 어쩌면 자전거 타기 가장 좋았던 도로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르막을 제외하면.
숙소에 대해 말한다면 거쳐가는 대부분의 마을에 캠핑이 가능한 카라반 파크(Caravan park)나 캠핑사이트가 있어 비교적 저렴하고 안전하게 캠핑할 수 있다. 적당한 곳에서 와일드 캠핑할 계획만 잔뜩 가지고 있었는데 굳이 길 한복판이나 주유소, 경찰서 같은 곳에서 캠핑할 필요 없었고 lodge 같은 곳에서도 구두로 텐트 사용을 허락받아 비용을 아낀 적도 상당히 많았다.
각 마을마다 시설 차이는 있지만 캠핑사이트 대부분은 따듯한 물까지 잘 나오는 샤워장을 구비하고 있다. 이곳에서 빨래할 수 있어 위생적인 여행을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남아공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사자, 치타, 레오파드와 같은 상위 포식자를 만나 볼 수 없었다. 괜히 아프리카 대륙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맹수들이기에 초반에는 야생동물의 위험에 비교적 안전한 남아공에서 조차 사주 경계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다.
국경마을에 가까워지니 낯설게도 끝없어 보이는 평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이 평지의 끝에는 지금까지 업힐을 올라온 수고를 보상이라도 해주는 듯 장거리 내리막이 시작된다. 이날은 역풍도 강하지 않았기에 페달을 굴리지 않고 꽤 많은 거리를 이동하게 됐다. 138km를 이동하면서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남아공에서의 마지막 라이딩을 즐겼다.
어느덧 나미비아로 넘어가기 전 남아공의 마지막 마을 Vioolsdrif까지 2km 남은 지점에 도착했다. 어쩐지 감격스럽다.
Durbanville에서 Vioolsdrif까지 오는 동안 모진 역풍과 오르막길 그리고 변덕스럽게 내리는 비로 인해 정대원과 나는 번갈아가며 몸이 아파 쉬어만 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남아공에서 665km를 여행하는 동안 혹독한 훈련과 여행에 대한 경험치를 쌓은데 부족함이 없었던 첫 무대였다.
역사적인 순간. 처음으로 두 발 자전거에 싣고 국경을 넘는다. 이제는 나미비아. 나미비아에서는 어떤 순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또다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