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먹고 찾아온 친구 여동생의 전남친과 나눈 대화들

'예수님'과 '부처님'과 '레테의 강'이 언급됐던 기이한 대화

by 강병진
2004년에 있었던 일에 대해 2009년에 정리했던 글이다. 2004년 당시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의 ‘낭만’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은데, 지금와서 다시보니 ‘낭만’은 큰일날 소리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 기이한 코미디와 허무로 끝났던 그런 사건.

친구 집에 있는 친구의 방에서 친구와 자고 있었다. 당연히 전날에는 술을 마셨다. 새벽 4시쯤에야 몸을 뉘였을 거다.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빨리 나와봐!”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친구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배를 긁으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눈이 부셔 이불을 덮어썼다. 그때 밖에서는 험한 말이 오고갔다.


“야, 이 개새끼야! 내려놔! 안놔? 씨발, 칼부터 내려놔!”


‘개새끼’란 말에 동요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칼’이었다. 칼을 내려놓으라니. 누가 칼을 들었을까. 그는 왜 칼을 들었을까. 이불을 걷어차고 뛰어나갔다. 친구의 여동생은 울고 있었다. 친구는 씩씩거리며 계속 욕을 해댔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있었다. 군복 바지를 입고 있던, 윗도리는 어디다 벗어놨는지 허연 맨살이 드러나 있던, 그리고 울고 있던 남자가 칼을 들고 있었다. 칼은 친구의 여동생을 향해 있지 않았다. 친구를 겨누고 있지도 않았다. 칼끝은 녀석의 배를 노리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 나를 죽이려는 상황은 아니니 무섭지는 않았다. 단지, 나는 아직 숙취에 잠들어 있었고, 얼굴에서 흘러나온 개기름도 그대로인데, 군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칼을 들고 죽겠다고 난리를 치니 짜증이 날 수 밖에.


그 순간, 전날 친구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동생이 결혼을 한다고 했다. 얼마 전 선을 봤고 그때 만난 남자가 적극적으로 대시했고, 동생은 결혼을 결심했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우리 이제 헤어지자. 나 결혼해. 그녀의 원래 남자친구는 군대에 있었다. 전날의 기억 덕분에 녀석의 정체가 확연해졌다. 군대에서 이별 통보를 받은 남자, 바닥에 떨어진 군복상의와 전투모는 예비군 마크를 달고 있었다. 말년휴가를 나왔나 보군. 그러니까 휴가를 나오자마자 여자친구 집의 담을 넘어 부엌에 가서 칼을 쥔 후, 자고 있던 여자를 깨운 거였다. 녀석은 나의 등장에 당황한 듯 보였다. 여자의 오빠정도는 있을 줄 알았지만, 이 새끼는 또 뭔가 했을 거다. 나도 욕이 나왔다. “씨발, 죽을려면 니 집가서 죽어! 병신새끼야!” 친구와 내가 합세해 윽박지르자 녀석은 주춤했다. 칼을 놓고 울기 시작했다. 친구의 여동생은 바쁘게 집을 나갔다.


군대에서 여자친구의 이별통보를 받은 녀석은 당연히 절망했다. 절망의 첫 행동은 탈영이었다. 멀리 가지 못하고 잡혔다. 영창까지는 가지 않았고, 군장뺑뺑이를 돌았다. 휴가날짜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휴가 날. 부대를 나오자마자 빈속에 소주 2병을 들이부었다.(원래 술을 거의 못 마시는 애란다.) 그리고 이 집에 오게 된 것이다. 녀석은 계속 오바이트를 해댔다. 먹은 건 소주뿐이니, 건더기는 나오지 않았다. 노란 신물만이 계속 흘러나왔다. 친구와 나는 신문지를 깔아주고, 얼굴을 닦아줬다. 그래도 녀석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횡설수설이 이어졌다.


“저 형 알아요.”
나한테 한 말이었다.


“형, 춘희(여동생 이름, 가명) 좋아하죠?”
미친놈.


녀석은 계속 이름을 부르짖었다. 간혹 이런 말도 했다. “전 어떻게 살아요. 어떻게 잊어요.” 뭐랄까. 이제 첫 드라마 배역을 따낸 신인탤런트의 어설픈 대사연기처럼 들렸다. “죽을때 까지 못 잊을 거예요. 형, 저 이제 어떻게 해요! 흑흑” 친구와 나는 웃었다. 쓰리게 웃은 게 아니라 정말 웃겨서 웃었다. 웃음소리자체가 경박스러웠다. 헤헤헤헤. 친구와 내가 했던 이야기는 대충 이런 거다. 형들도 겪어봤는데, 다 잊게 되더라. 너 지금 죽고 싶은 건 이해하는 데, 지금이니까 죽고 싶은 거야. 술 깨면 다 괜찮아. 물론 녀석은 형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어. 남자는 다 똑같아. 헤어지고 울고 자고 일어나면 또 찾아다녀. 어쩔 수 없어. 남자는 다 그래. ”


녀석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울기 시작했다. 형들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주먹으로 방바닥을 쳐대기 시작했다. 다시 엎드려 울었다. 또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 다시 입을 땠다.


“어떻게 사랑이 변해요”

임마. 그 대사는 우리가 아니라 여자한테 직접 해야지.


“형! 기독교인에게 결국 남는 건 하나님 밖에 없어요. 그리고 부처님 믿는 사람에게는 부처님 밖에 안 남아요. 그런데 !!!! 나한테는!!! 춘희(가명)밖에 안 남았어요!!!"


어이가 없었다. 뭐냐 이건. 진부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대사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한 말도 아닌데, 내가 쪽팔렸다. 녀석이 다음에 뱉은 말은 더 쪽팔렸다.


“그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죽음 밖에 없어요!! 죽음을 통해서 레테의 강(!)을 건너는 길만이!!! 춘희를 잊을 수 있는 길이에요!! 엉엉...“


순간 조금 슬퍼졌다. 녀석의 이 말은 아마도 준비된 대사였을 거다. 여자친구 앞에서 칼을 들고 죽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슬픈가. 무결한 사랑을 전하고자 준비했던 말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비웃기나 하는 2명의 술이 덜 깬 남자들 앞에서 하고 있으니. 우리는 또 욕을 해댔다. 그래 그냥 죽어라. 씨발, 여기 칼 줄 테니까 어디 한번 죽어봐라. 너한테 남은 길이 그것 밖에 없다는 데 어떻게 말리겠냐. 녀석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이렇게 많이 나올 수 있구나 싶었다. 다시 울고, 소리치고,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내뱉던 녀석은 결국 지쳐 쓰러졌다.


친구와 나는 녀석의 옷을 입혔다. 양쪽에서 부축해 택시를 잡아 녀석의 집까지 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녀석은 집 앞에서 다시 쓰러졌다. 우리는 담배를 물었다. 굳이 누가 올 때까지 지켜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잘 살아. 그리고 잘 잊어봐. 더 좋은 여자 만날 거야. 쓰러진 녀석은 말이 없었다. 녀석에게 미친놈, 개새끼, 병신새끼라고 욕했던 나와 친구는 어두워졌다. 한바탕 소동 덕분에 술은 깬 듯 했으나, 마음은 쓰라려 왔다. 해장을 할 겸, 중국집에 갔다. 짬뽕을 시켜먹다가, 소주를 주문했다. 가버린 여자를 붙잡고 죽겠다고 난리피고 싶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정말 많은데, 그걸 눈앞에서 보다니. 기독교인에게 남는 건 하나님밖에 없고, 불교신자에게 남는 건 부처님밖에 없다며 ‘레테의 강’을 운운할 정도면 도대체 어떤 감정이었던 걸까? 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어제 저녁, 춘희의 오빠와 술을 마시면서 떠오른 약 5년 전의 이야기다.


후일담/
1. 그동안 나는 이 이야기를 종종 해왔다. 친구가 없는 자리에서는 가공을 했다. 친구는 아침 일찍 담배를 사러 나갔고, 나 혼자 녀석을 맞이한 상황으로 연출했다. 이 자식이 칼 들고 죽겠다는 거야. 이게 뭔가 싶었지. 일단 옆에 있던 쓰레기통이며 화분이며, 모조리 던졌어. 녀석이 쓰러지더라고. 일단 칼부터 치우고, 열라 때렸지. 좀 있다 친구가 들어오더니 또 욕을 작살나게 해댔어. 진짜 식겁했다니까. 앞으로는 가공하지 않겠다.


2. 그 후 녀석은 다시 친구의 집을 찾아왔다. 친구는 돌려보내려 했으나, 친구의 어머니가 맞아주셨다. 앞으로 잘 살라고. 미안하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 후에도 녀석은 춘희와 함께 가던 장소들을 전전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애도 낳고 잘 살고 있는 중이다.


3. 어떤 지인이 '레테의 강'이 아니라, '요단강'이라고 했어도 이렇게 웃프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같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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