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라소라빵 Feb 16. 2023

해리포터를 즐기기 어려운 어른들에게

호그와트 레거시를 하면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때로는 지루하고, 어쩔 땐 숨 막히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렇기에 비일상과 일탈을 꿈꾼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세계는 그래서 항상 사람을 사로잡는다.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 롤링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 <해리포터>를 썼다고 고백한다. 결핍은 가장 강력한 자유를 향한 동기가 된다. 배고플 때의 첫술이 가장 맛있고, 백수일 때 노는 것보다 직장인의 여름휴가가 짜릿한 것처럼.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호그와트 대강당의 음식들이나 특급열차에서 파는 과자들도 조앤 롤링이 어려운 시절, <해리포터>를 쓰면서 그때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하나하나 기록해서 썼다나 뭐라나. 결핍된 시기에 자아낸 상상력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읽어도 짜릿했나 보다. 나 역시 그래서 <해리포터>의 세계에 푹 빠졌었다. 지루한 학교의 책상머리가 아니라 약초 재배실에서 맨드레이크를 뽑고, 호그와트를 모험하는 상상을 하며 책을 탐독했다. 


때문에  나중에 호그와트는 영국인의 입학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제법 실망했다. 하지만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에 일루미네이션이 수를 놓듯 장식되고, 연인들이 케이크를 한 손에 들고 행복하게 거리를 걷는 것만 보아도 나 또한 기분이 부웅 뜬다. 이처럼 머리가 조금 큰 다음에도 만나는 마법사들의 세계 역시 여전히 놀랄 말한 것들로 가득했고,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소설과 영화를 합쳐서 14편(국내판은 더 권수가 많다), 스핀오프 영화인 '신비한 동물사전'을 합치면 16편이나 되는 방대한 시리즈를 물 흐르듯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마법사의 세계가 현실의 머글들에게 선사해 주는 마법 같은(문자 그대로) 일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리포터와 론 위즐리, 헤르미온느가 어른이 되고, 나 역시 어른이 되었을 때쯤 <해리포터>는 어릴 때처럼 순수하게 즐기기 어려운 작품이 되었다.  여기에 그 이유로 조지오웰의 말을 덧붙이자면 '모든 텍스트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_조지 오웰


상상력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앞서 얘기한 현실의 결핍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력이겠지만, 나는 독자가 여백을 주무를 수 있는 허술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딱딱 맞는 플랜과 목표가 정해지고 나면 거기서부터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정답과 규칙이 짜인 학교는 그래서 재미가 없다. '아니면 말고' 딱딱하게 굳은 벽돌이 아니라 점토처럼 흐물흐물할 때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이리저리 만질 수 있어야 주무르는 맛이 있다. 결혼이나 성역할에 대해 잘 모르지만, 소꿉놀이로 부부를 흉내 내곤 하는 아이의 세계가 그렇다. 세상의 무서움과 규칙을 모르는 아이는 자기 마음대로 규칙을 만들고 허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아이의 세계는 아이가 모르는 만큼 허술하고, 자신이 개입하고 바꿀 수 있는 것들로 넘쳐나니까.


그러나 아이는 자랄수록 사회의 기대나 규칙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된다. 그 규칙을 어길 때 따라오는 결과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아이가 자라 '어른은 재미없어'하고 푸념할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어른이들이 주체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자신만의 규칙을 설명하기도 귀찮고(그리고 남들도 그렇게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자신을 정의 내리지 않으면 끊임없이 흔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기준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MBTI가 그래서 그렇게 인기가 많다) 자아를 찾는 여행은 때로는 필요하지만 매 순간 위태롭게 흔들려서야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다. 때문에 어른이 되고 나면 직업, 세대, 여기에 정치적인 라벨링을 몇 개 더 붙이자면 젠더나 인종 같은 것들이 붙는다. 이런 라벨링에 하나둘씩 알게 되고, 이 라벨링을 불편하게 의식하는 사람이 되고 나면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 롤링'의 사건사고가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백인우월주의, 트랜스 혐오. <해리포터> 팬들이 거쳐야 하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면 곧 <해리포터>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여주게 하는 것 같았던 빈틈은 결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 <해리포터> 팬에게는 주어진 선택지는 세 가지이다. 사회와 마주하는 우리가 그러하듯 그 비판과 문제점을 안고도 이 세계를 계속 사랑할 것인가,  모르는 척 이 세계를 즐길 것인가. 아니면 나랑 맞지 않는 이 세계를 떠날 것인가. 


작가인 조앤 롤링은 트랜스젠더 혐오와 인종차별 논란에 종종 휩싸이지만,  <해리포터>는 의외로 성소수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혹은 싫어도 따라야만 하는) 라벨링 놀이를 네 개의 기숙사를 통해 보여주지만, 그 라벨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배신하는 캐릭터들. 그리고 그 캐릭터가 보여주는 일탈과 해방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핀도르, 슬리데린, 레번클로, 후플푸프. 각 기숙사의 특징을 성별처럼 딱 정해놓는 호그와트의 세계에서 학생들은 그 법칙을 번번이 어긴다. 비겁한 그리핀도르가 있는가 하면, 용기 있고 정의로운 슬리데린도 존재한다. 사람의 성질이라는 것이 틀에 찍어내듯이 나오지 않는다. 사회는 사람들을 카테고리로 구분 짓고자 하지만 그 규율과 구분에 딱 맞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어리숙한 어린 시절의 해리포터 역시 처음엔 들리는 소문에만 의존해 사람을 카테고리로 나눈다. 오만하게 짝이 없는 슬리데린과 말포이, 그리고 용감한 우리의 그리핀도르. 그러나 해리포터는 결국 배우게 된다. 모든 슬리데린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볼드모트 조차 '사랑을 배우지 못한 불쌍한 사람'임을 이해하고, 세상은 라벨 안에 갇힌 사람만 있지 않다는 것을 친구들과의 모험에서 깨닫는다. 결국 그런 사람들이 모여, 기숙사의 구분도 무너트리고 마법세계의 히틀러 나치, 순혈 이외의 가치를 부정하고 혐오를 무기로 저주받은 마법을 휘두르는 '볼드모트'를 쓰러트린다. 


이런 경험과 성장을 마친 해리포터가 아들 알버스 세베루스 포터(그렇다 덤블도어와 스네이프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언제나 차별과 혐오와 마주해야 하는 성소수자들에게 감동을 줄법하다. 9와 4분의 3 승강장, 아버지의 어린 시절처럼 호그와트로 가는 급행열차를 기다리며 해리는 아들 세베루스 포터의 질문에 대답하는 해리의 모습은 나에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제가 슬리데린이 되면 어떡하죠?'


이에 해리는 답한다


"네 이름은 호그와트의 두 교장 선생님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야. 그중 한 분은 슬리데린이었는데, 그분은 아마 아빠가 알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일 거야."


그래도 알버스는 사회가 바라보는 편견이 무섭다.


"하지만 그냥 만약에..."


"... 그러면 슬리데린 기숙사가 훌륭한 학생을 얻게 된 거지. 안 그래? 우린 상관없어, 알. 하지만 그게 너한테 중요한 문제라면 슬리데린이 아닌 그리핀도르를 선택할 수 있을 거야. 기숙사 배정 모자는 너의 선택을 존중해 주거든."


사회의 편견에 상관없이, 당신이라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해리. 그렇다고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태생과 달리 사회의 편견에 순응하는 것 또한 비겁한 행위가 아니라 그의 욕구이자 선택이다. 그렇게 따스한 응원은 알버스가 주저 없이 슬리데린을 선택하게 한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를 변함없이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고, 자신의 선택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볼드모트와 닮은꼴인 사람을 뽑으라면 해리포터라 생각한다. 

 순혈과 머글의 이분법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마법사의 세계에서 해리 역시 머글인 더글리 부부의 학대로 인해 불우한 유년생활을 보냈고, 갑자기 찾아온 호그와트의 초대장으로 인해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그의 유년시절은 톰 리들의 유년 시절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언제든지 볼드모트의 쪽으로 건너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처음에 분류모자 역시 그를 '슬리데린 다운 사람'으로 평가하였고, 말 그대로 해리포터야 말로 호크룩스로써 볼드모트의 영혼의 파편이 아니었는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는 부모님이 남긴 사랑이라는 유산을 때때로 부모님의 선생님, 친구들로 부터 체감할 기회가 있었고, 편견을 깨줄 좋은 반면교사와 스승들이 근처에 많았다는 점이다. 볼드모트 역시 보육원 시절, 그에게 따스하게 손을 내밀어 준 머글 친구가 한 명 있었다면 전혀 다른 인물이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해리포터>라는 프랜차이즈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팬들, 심지어 분란을 만드는 조앤 롤링마저 사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의 편견과 상식을 깨줄 사람과 행운스런 사랑을 나누기 전까지는 해리나 볼드모트나 다를 바가 없음으로.  몇몇 이들이 <신비한 동물 사전> 시리즈에선 덤블도어가 원작에도 없는 동성애적 페르소나를 가지는 것, <해리포터> 시리즈 최초의 AAA급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호그와트 레거시>에 트랜스 젠더 캐릭터가 출연하는 것에 극심한 거부감을 표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설정이 누구에게는 '너는 슬리데린이라도 괜찮아.'라는 멋진 응원으로 다가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해리포터>를 작가의 실언에도 개의치 않고 이 세계를 사랑할 것을 권유하고 싶다.  작가가 어떠한 의도로 적어 내렸든 분명 <해리포터>에는 멋있고 감동적인 장면이 많고, 우리는 그것을 또 멋대로 채워 넣을 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무한 우주, 티끌 같은 다정함일지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