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지식경영법을 사용하여 정민이 재정리한 다산의 학문과 철학
요즘 정조와 정조시대의 지식인에 대한 관심이 크다. 현재의 문제에 대한 답을 과거의 지혜로부터 찾는 것은 예로부터 해오던 일이다. 역사는 반복되었고, 과거의 지식인들도 상황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고민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에 광주에서 태어나 1836년에 세상을 떠났다. 75년의 생을 사는 동안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정조의 선봉대였고, 백성들 삶의 부조리를 해결해주는 어진 관리였으며, 정권 싸움에서 밀려난 쇄락한 유배자였다. 그리고 492권의 저서를 남긴 저술가였고 당대의 학자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지식인이었다.
<논어고금주>등의 유교 경전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거부하고, 본질로 돌아가기를 촉구한 유학자였으며, 화성 축성의 설계와 기중가, 배다리, 유형거 등을 제작해낸 토목공학자이며, <아방강역고>를 펴낸 지리학자였고, <마괴회통>, <촌병 흑치>등을 펴낸 의학자였다. <목민심서>를 펴낸 행정가였으며, <흠흠신서>를 저술한 법률가였고, <아학편>을 펴낸 교육학자였다. 또한 남겨둔 두 아들을 걱정하며 편지를 통해 끊임없이 때로는 격려하며, 때로는 타일렀던 지엄한 아비였다. 많은 제자들을 키워낸 선생이었으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원을 가꾸며 자연을 즐겼던 시인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을 남기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감정이 지나고 나면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된다. 서양권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정약용이 있다고나 할까? 다산선생은 우리에게 그 정도로 자랑스러운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다산을 '지식경영인'이라 규정하며, 그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업적을 남길 수 있는가를 지식경영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제목에 불만이 있다. 이 책은 아래에서 지적하겠지만, 지식경영보다 더 많은 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정민 교수는 다산의 일생과 다산의 저작, 그리고 당시 학자들의 저작까지 아우르며 다산의 학문과 철학을 재창조해서 보여준다. 그는 다산의 지식경영방법을 사용해서 이 책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다산의 지식경영법을 사용하여 정민이 재정리한 다산의 학문과 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굳이 '재정리'를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정민 교수는 탁월하게 다산의 업적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다산이라면 200년 가까운 훗날, 학문의 후배가 나와 자신의 학문과 철학을 이렇게 명쾌하고 방대하게 정리했다고 하면 너무나 기뻐했을 것이다. (같은 성씨라는 것은 보너스다 ^^) 그 정도로 이 책은 다산의 학문과 철학을 다룬 책이지만, 이전에 정민 교수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책의 구성은 10강 50목 200 결로 되어 있다. 다산의 학문과 철학을 열 가지 주제로 크게 분류한 후 각 주제별로 다섯 개의 소주제를 정하고 이를 다시 네 가지의 작은 토막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다산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아서 나누고 분류하여 모았고(휘분류취), 목차를 세우고 체재를 선정해서(선정문목), 종합하고 분석하여 꼼꼼히 정리하였다(종핵파즐). 이를 위해 그는 다산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떠오르면 수시로 메모하였을 것이고(수사차록), 단계별로 차곡차곡 판단하고 분석하였을 것이다(층체판석). 또한 유용한 정보들을 비교하고 대조하였을 것이고(피차비대), 목표를 정해놓고 그대로 실천하며(정과실천), 생각을 끊임없이 조직하고 단련하여을 것이다(포름부절). 또한 아름다운 경관 속에 성품을 기르라는(득승양성) 부분에서는 그 자신 멋들어진 글로 정취를 더하였다.
이렇게 나는 책 속에 드러난 다산의 모습과, 다산의 글을 보며 오래전 선배의 모습을 탐구하던 정민 교수를 동시에 본다. 그 즐거움이 참으로 커서 두 분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그러면 이 책에 드러난 다산의 모습은 어떠한가? 책을 읽으며 흉내라도 내겠다 싶어 ^^;; 책의 내용을 새로이 모으고 나누어서 분류하였다(휘분류취).
1. 다산의 학문에 대한 자세
기초를 확립하고 바탕을 가져라(축기견초)는 권면 속에 다산은 기초를 강조하였다. "길을 두고 뫼로 가랴 지름길을 찾아가라(당구첩경)"며 지혜롭게 학문하기를 촉구하면서도 결국 순서를 밟아서 공부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나는 다산을 실학자로 생각하여, 유교 경전과는 거리가 멀고 실제 쓰이는 학문에만 신경을 쓴 학자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산의 492권의 저서 중 유교 경전에 대한 분석 및 편집이 232권이나 된다다. 다산은 세상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며, 경전과 같이 기초가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기초라 생각했다. "바탕을 다지는 일은 동서남북을 배우는 일이다. 현실에 적용하고 실제에 응용하는 것은 상하좌우의 분별과 관련된다. 상하좌우만 알아서는 방향을 잃었을 때 집을 찾아갈 수 없지만, 동서남북을 알면 길을 읽고 헤매지 않는다 (51쪽)."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아가 쓸모를 따지고 실용에 바탕하라(강구실용)고 요구하며, 실제에 적용하여 의미를 밝히라고(채적명리)한다. 그의 학문에 대한 자세는 기초를 깊이 있게 다지고 그위에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지식을 쌓는 것이다.
2. 다산의 지식 경영법
책 제목과 걸맞게 상당한 부분이 다산이 어떻게 지식을 장악하며 다루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민 교수가 이 책을 쓰면서 사용했을 것이라 앞에서 추측한 방법들을 포함하여 다산은 파 껍질을 벗겨내듯 문제를 드러내었으며(여박총피), 묶어서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였다(촉류방통). 부분을 들어서 전체를 장악하였고(거일반심), 좋은 것을 가려 뽑아 남김없이 검토하였다(변례창신). 자료를 참작하여 핵심을 뽑아내었고(참작득수), 좋은 것은 가리잖고 취해와서 배웠다(득당이취). 물고기를 잡은 그물에 기러기가 잡혔다고 버리지 않고, 동시에 몇 가지 작업을 병행하여 진행하였고(어망득홍), 단계별로 다듬어 최선을 이룩하였다(수정윤색).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되풀이해 검토하고 따져서 점검하며(반복참정), 그 안에 푹 빠져서 생각을 정돈하고 끊임없이 살펴보았다(잠심완색). 책을 지을 때는 조례를 먼저 정해 성격을 규정하고(조례최중), 목차를 세우고 체재를 선정하였다(선정문목).
3. 논객 다산의 모습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4강(토론하고 논쟁하라)과 5강(설득력을 강화하라)에 집중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산이 요즘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아마 대단한 논객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 같다. 18년의 귀양 기간 동안에는 평생 학문적 동지였던 둘째형 정약전과 토론하고 논쟁하였으며, 서울로 복귀한 후에는 당색을 가리지 않고 당대의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다산은 질문하고 대답하며 논의를 수렴하였고(질정수렴), 생각을 일깨워서 각성을 유도하였으며(제시경발), 근거에 바탕하여 논거를 확립하였다(무징불신). 선입견을 배제하고 주장을 펼쳤으며(공심공안), 갈래를 나눠서 논의를 전개하였다(속사비사).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유용한 정보들을 비교하고 대조하였고(피차비대), 다른 것에 비추어 시비를 판별하였다(대조변백). 선배 학자들의 결과물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는 당세 학자들에 비해 권위를 극복하여 주체를 확립하였고(불포견발), 논쟁이 시작되면 끝까지 논란하여 시비를 판별하였고(대부상송), 단호하고 굳세게 잘못을 지적하였다(절시마탁).
4. 실천적 지식인 다산
다산은 책방 안에 갇힌 고지식하기만 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는 화성 축성의 설계를 담당하며 기존 돌성과 달리 가운데가 움푹한 방식으로 성을 지어 견고함을 더했다. 이를 위해 좋은 것은 가리잖고 취해와서 배웠다(득당이취). 예를 들어 서양인 테렌츠가 중국 황실을 위해 쓴 <기기도설>의 여러 기중가를 참조하여 현실에 맞는 기중가를 만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기중가는 그가 참조했다는 어느 기중가와도 닮지 않았다. 기존 기중가의 원리를 파악하여 전례를 참조해서 새 것을 만든 것이다.(변례창신).
환곡의 폐해를 논하며 해결책을 제시하였고, 좀먹은 군기를 고발하였으며, 쓸모없는 학문을 비판하였다. 언제든지 실제에 적용하여 의미를 밝혔고(채적명리), 언제나 백성을 위하는 것이 근본이라 말하며 위국애민의 마음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비민보세). 언제나 그는 쓸모를 따지고 실용에 바탕하였고(강구실용), 사실을 추구하고 실용을 지향하였다(실사구시).
5. 매력적인 인간 다산
위와 같은 학문적인 성과에도 다산은 결코 삶의 정취를 잊지 않았다. 귀양 가서 머무는 곳에도 정원을 가꿀 정도로 나날의 일상 속에 운치를 깃들였다(일상득취). 자연이 준 가을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의무라 생각하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성품을 길렀다(득승양성).
또한 다산은 일상의 대화나 주고받는 글 속에서도 번쩍이는 깨달음이 드러나 있었다(담화시기). 그의 글에는 그 속에 뼈가 있었으며, 한마디 말로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모습이 있었다. 또한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속에 운치를 깃들이라고(속중득운) 말한다. 닭을 친다는 아들에게는 닭에 대한 책을 엮으라고 충고하며, <윤혜관을 위해 준 말>에는 생계를 위해 과일과 채소를 기르되, 종류별로 씨 뿌리고 모종을 하고 나서는 짧은 시 수십 편을 지어 옛사람의 풍취를 본뜨라고 할 정도로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을 하던지, 단순히 입과 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려는 마음가짐을 늘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537쪽).
끝으로 정민 교수는 다산이 좌절과 역경에도 근본을 잊지않고(간난불최), 그만이 할 수 있는 작업에 몰두하며(오득천조), '지금 여기'의 가치를 다른 것에 우선하는(조선중화) 멋진 지식인이었음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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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말한다. "무릇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한 사람을 목표로 정해 반드시 그와 나란해지기를 기약한 뒤에 그만두어야 하니, 이것이 용의 덕이 하는 바다" 목표를 정해 그와 꼭 같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워 몰두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했다(383쪽).
롤 모델이 아쉬운 세상이다. 한때는 정직함과 명석함으로 존경받던 사람들이 세월이 흐르며 변질되고 퇴보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 하나씩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여기 다산선생이 있다. 200년 전 강진 땅의 유배 생활 속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학문의 정열을 불태웠던 다산.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한, 그러면서도 가족과 제자들에 대한 정을 놓지 않았던 정말 멋진 사람. 그가 새로운 롤 모델로 다가왔다. 이런 위대한 스승을 오늘에 되살려 보여준 정민 교수에게 다시 한번 더불어 감사의 말을 전한다.
(2007.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