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오브 마이 라이프
준영은 도시의 고독한 산책자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려 하지만, 문제는 준영에게 어울리는 길이 무엇인지, 어떻게 찾아야 할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준영은 목적을 버리고 아파트 주변을 들고양이처럼 매일 어슬렁거리기만 했다. 마치 형체 없는 관념의 세계를 숭배하는 루소나 칸트처럼 무의식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듯 보였다. 물론 루소처럼 무서운 개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행히 이 주택가 산책길에는 흔한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길엔 온통 무위의 세계만이 가득했다.
‘대체 내가 뭐 하는 거지, 왜 이렇게 한심하게 산책이나 하고 있는 거야?’라고 하며 스스로를 나무랐다.
어쩌면 준영은 누군가의 관람 대상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집을 나서는 순간 칸트처럼 ‘아, 이제 막 정오가 되었구나’,라는 사실을 전달해 주는 그런 형식의 결정체인 것이다. 뭐 그래도 상관없었다. 백수인 준영으로서는 이 소박한 산책이 자신의 뇌세포 속에 긍정적인 의미를 각인시켜 줄 테니까.
차림새를 보니 스스로도 한심할 따름이다. 빛바랜 청색 아디다스 운동복에 힘 없이 축 늘어진 티셔츠, 그게 준영의 전부였다. 그 후줄근함이 준영이라는 존재를 그대로 드러냈다. 준영은 산책에 나설 때마다 이 복장을 집요하게 고집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은 다른 옷이 없는 게 진실이었다. 이 낡은 운동복은 준영을 대표하고 있었다. 주머니 구석엔 8번 꼬깃꼬깃 접힌 5만 원 권이 건방지게 드러누워 있었다. 그 종이 쪼가리엔 근엄한 표정의 여자가 마치 준영을 째려보는 것 같았다.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놓고 허벅지를 긁었다. 보잘것없는 인생에 5만 원이 더해지면 무엇이 되려나, 하고 준영은 생각했다.
준영은 배가 너무 고팠다. 며칠째 지독한 굶주림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늘은 빵 부스러기조차 먹지 못했다. 다만 준영에겐 5만 원이 있었다. 그런데 이 돈은 배고픔을 해결하는데 쓸 수 없었다. 이건 준영에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룰'이었다. 준영은 뭔가 문화적이고 세련된, 예술적인 가치에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니, 거참 이상한 고집이 아닌가. 준영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배고픔이 뱃살과 등짝 사이에서 요염하게 춤을 췄다. 아니, 몸부림의 댄스, 발악의 스텝이었다. 하지만 드뷔시의 '달빛' 같은 우아한 것은 거기에 없었다.
산책길에는 몇 채의 집들이 마치 빈 옥수수 알갱이처럼 듬성듬성 있었다. 아파트가 아닌, 흔히 주택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그 안에 누가 사는지는 알 길도 없고,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그저 성냥갑처럼 들쭉날쭉한 공간들, 누군가 자기 멋대로 살아갈 터전일 뿐이다. 무채색으로 물든 특징 없는 가옥들을 지나면 늘 빨간 벽돌로 단단하게 둘러싸인 집 한 채가 나타났다. 그건 산책이 거의 끝나간다는 신호였다. 오늘은 그 집 앞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자그마한 푯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파리스 레스토랑’
“파리스라니? 저 유명한 파리스가 여기에? 언제부터 이 빌어먹을 녀석이 여기에 있었던 거지? 본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
준영은 스마트폰을 켜고 지도앱을 실행했다. 그리고 ‘파리스 레스토랑’을 검색했다. 방문자 리뷰는 겨우 3개, 블로그 리뷰는 1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취급하는 메뉴 정보는… 없었다. 텅 빈 여백이 가게의 존재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방문자 리뷰도 블로그 리뷰도 모두 10년 전 기록뿐이다. 이곳이 정말 레스토랑이 맞기는 한 걸까? 점점 더 의심스러워졌다.
준영은 속으로 트로이를 멸망으로 이끈 파리스를 떠올렸다. 세 여신 앞에서 아프로디테를 선택하고, 그 대가로 헬레네를 데리고 도망쳐 트로이에 전쟁을 선물해 준 역사적 인물. 그 선택이 얼마나 많은 비극을 불러왔는지 파리스는 기억하고 있을까? 어리석은 파리스의 모습이 레스토랑과 겹쳐 보였다. 준영의 발걸음이 보도블록 위에 멈춰 섰다. 눈앞의 '파리스 레스토랑'이라는 금색으로 도장된 사각형, 그 안에 돋을새김 된 금빛 인장과 그것을 둘러싼 붉은 벽돌들을 바라보았다. 초록색 덩굴이 붉은 담장을 촘촘히 뒤덮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잊힌 이야기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신비한 거처처럼 보였다.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당했던 예술 작품의 진가를 갑자기 발견한 감상자처럼, 준영의 몸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사실 그곳은 레스토랑이기보다는 비밀 첩보원들이 드나드는 비밀 안가(安家)처럼 생겼다. 이런 재개발이 한창 진행되는 주택가라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음, 궁금증은 풀려야 한다. 게다가 산책 중에 맛볼 수 있는 재미는 이런 예측 불가능한 지점으로 휘말리는 것이 아닌가. 얼어붙은 두 다리를 독려하며 준영은 그 카페인지 안가인지 하는 곳으로 들어가 보기로 작정했다.
출입구 앞을 가로막은 철문은 주석빛으로 덧칠해져 있었다.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자 철에 얽힌 창살들이 서로 마찰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힘을 주어 밀어보니 문 너머의 냉기가 밀려들어와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이 철문은 마치 고대의 성문처럼, 비장함과 비밀을 품고 그 너머에 감춰진 음침한 세계를 은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밀어붙이자 문은 비명을 지르며, 마침내 거친 한숨을 내뱉고 스르르 열렸다. 철문 안쪽에는 비밀의 화원이 누군가 정성스레 돌보다 만 것처럼 존재했다. 바닥에는 방치된 잔디밭이 보였다. 마치 밟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처럼 누렇게 마른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너머로는 관목숲이, 아니 그냥 잡초들이 뒤엉킨 어수선한 덤불이 보였다. 덤불 사이를 지나 석기시대의 제단처럼 울퉁불퉁한 돌로 만들어진 계단 3개를 올라가자, 마침내 레스토랑 내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주택의 현관처럼 생긴 곳을 지나치자 아주 넓은 회색 홀이 준영을 삼킬 듯 덮쳐버렸다. 넓은 홀에 조명은 정중앙에 단 하나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인지 조명은 불안하게 흔들리며 준영에게 야유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가 촛불을 입에 물고 천장에 매달린 채, 증오의 눈초리로 준영을 노려보는 듯했다. 카운터 뒤에는 등을 돌린 남자가 흔들의자에 몸을 뉘인 채 한가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손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고양이처럼 어둠 속에 몸을 누인 남자는 마치 날이 선 칼날처럼 차갑고 무자비해 보였다. 그의 눈빛은 마치 무엇이든 꿰뚫어 볼 듯 예리한 나머지, 준영의 육감마저 마비시킬 정도였다. 등을 돌리고 있든 눈을 감고 있든, 그 남자에게선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얼어붙을 것 같았다.
안내조차 받지 못한 불쌍한 준영은 눈치를 보다, 적당한 자리를 하나 골라 앉았다. 마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무대에 홀로 앉아, 다루지도 못하는 악기와 씨름하며 시간이 제발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실력 없는 연주가가 된 것 같았다. 카운터에 앉은 남자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흔들의자에 앉아 있고 테이블들은 형식 없이 홀에 흩어져 있었다. 커다란 티브이에서는 프로야구를 중계하고 있지만 소리는 생략된 채, 아까부터 같은 장면만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준영은 자리에 앉아 재미없는 그림책을 낭독하는 아이처럼 메뉴판을 쓸어 넘겼다.
‘헬리오스의 빛' - 100,000원
'헤라클레스의 힘' - 150,000원
'페르세우스의 용기' - 92,000원
'아테네의 지혜' - 99,000원
‘파리스의 절망적인 사랑' - 49,000원
준영은 마치 전기의자에 묶인 사형수처럼 무력했다. 악마가 다가와 준영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끝장이 날 것 같은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등 뒤로는 얼음장 같은 서늘함이 파고들었고, 공포에 얼어붙은 땀방울이 천천히 등을 아래쪽으로 쓸어내렸다. 왜 이런 불길한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지만,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삶을 뒤흔드는 순간들이 있다.
나가고 싶은 마음은 불길처럼 차올랐지만, 몸은 마치 빙하에 갇힌 고대의 박테리아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뜨거운 욕망이 심장을 뛰게 만들고, 혈관을 타오르게 이끌었으나, 그의 다리는 단단한 뿌리에 붙들려 있었다. 손은 떨리고, 혼란스러운 생각이 찾아왔으며, 그의 정신과 육체가 마치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존재에게 지배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위아래 입술은 그만 굳게 닫혀버렸고, 그저 현실과 몽상 사이를 방황하는 고독한 산책자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준영에겐 희망이 있었다. 그의 주머니엔 8번 접힌 5만 원 권이 있었으니까.
음식을 시킬지 그냥 나갈지, 선택권은 준영에게 없다. 존재하지 않는 어떤 기운이 준영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저 가운데, 고양이처럼 생긴 녀석이 계속 감시 중이지 않은가.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놓곤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손 떼를 묻히며 문질 문질 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주문을 해야 하지? 저 고양이처럼 생긴 녀석은 준영에게 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레스토랑도 육중한 철문도, 무심한 불빛도, 담벼락의 초록색 담쟁이도, 심지어는 이해할 수 없는 메뉴판조차 준영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준영은 몹시 배가 고팠다. 몇 달은 굶은 사람처럼 테이블 위에 이대로 엎어지고 말 것만 같았다. 그래서 준영은 불길함을 느꼈다. ‘파리스의 절망적인 사랑’이 어떤 음식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불길함 그러니까 불안은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어떤 미래가 닥쳐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리스의 절망적인 사랑…?’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장난을 치듯 메뉴를 슬며시 읊어봤다. 애타게, 절실한 마음을 살짝 담아서. 하지만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공기는 변함없이 진공 속을 고요하게 흘렀다. 여전히 이곳엔 침묵의 사위만 가득했다.
준영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준영의 시야가 흐릿하게 멀어졌다. 그의 존재는 그림자처럼 존재감조차 옅어졌다. 피곤함이 온몸을 짓눌렀다. 살아 있는 감각 곳곳에 잠의 신인 휘프노스의 손길이 스몄다.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테이블 위에 이마를 부딪쳤지만, 결국 잠이 통증을 이겨버렸다.
갑작스럽게 울린 둔탁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준영은, 눈앞에 깔끔하게 세팅된 음식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고양이처럼 생긴 남자는 여전히 흔들의자에 몸을 뉘인 채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식당 안에는 오직 자신만 있는 듯 여전했다. 어둠은 더 깊어지고, 불안한 기운이 공간을 휘감았다.
순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접시 위엔 음식이 놓여 있었다. 반짝이는 황금빛 물결 위로 음식이 준영의 시선을 따라 흘렀다. 음식보다 더 호화로운 황금접시라니! 그런데 이 음식은 무엇일까. 준영은 그저 메뉴를 짧게 불러본 것이 전부였는데, 바로 주문까지 이어진 것이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준영은 여전히 배가 고팠기 때문에 굳이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진 않았다. 최소한 이 음식을 먹는다 해도 돈만 지불하고 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준영은 주머니 속의 5만 원을 다시 확인했다. 흠, 가만히 관찰해 보니 이만하면 나무랄 데 없는 비주얼이다. 맛은 영락없이 ‘파리스의 절망적인 사랑’처럼 달콤하면서도 쓰릴 것이다. 이곳에서 탈출하지 못할 운명이라면 배부르게 음식이나 해치우면 그만이다. 준영은 음식을 먹지도 않고 이미 소화하려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접시 위엔 인간을 저주하는 주술인형을 닮은 기묘한 모양의 바게트 빵, 올리브, 하바티 치즈, 이집트의 병아리 콩, 시나몬 향신료,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나 즐겼을 법한 비틀린 문어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오레가노, 미나리, 월계수 잎이 장식처럼 얹혀 있고, 와인 한 잔과 양고기 조각이 얌전히 준영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영은 먼저 주술인형에서 팔 한쪽을 거칠게 뜯어내듯 떼어냈다. 그리고 마치 저주를 끝내버리겠다는 듯한 태도로 입속에 밀어 넣었다. 빵은 그냥 빵 맛일 뿐이다. 빵이 소고기 등심 맛일 리는 없지 않은가. 접시 위의 모든 재료들은 서로 원수인 양 어우러지지 않았다. 잔치는 풍성했지만, 싸우기라도 하듯 재료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화합도, 보조도, 어우러짐도 전혀 없었다. 준영은 빵 몇 조각을 뜯어먹고, 문어 다리 하나를 맛보곤 포크를 그대로 내려놓았다. 시나몬 향이 나는 은은한 소스만이 유일하게 자기 역할을 해내고 있는 듯했다.
“이런 배신자 같은 놈! 딱 파리스스러운 맛이네! 이걸 음식이라고!”
하지만 준영은 파리스가 대체 무슨 맛인지 모른다. 그런 맛은 공짜로 줘도 먹지 않을 것 같았다. 음식을 그대로 남겨두고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무뚝뚝한 남자가 앉은 카운터로 다시 출구 쪽으로 태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준영은 음식값을 지불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이런 형편없는 음식에 돈을 내는 것은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카운터를 곧장 통과하는데 마치 플라톤의 동굴 속을 오래도록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등을 돌린 고양이처럼 생긴 남자가 등짝에 확성기라도 놓은 것처럼 소리를 꽥 질렀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