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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18. 2024

고독한 파리스 왕자 2/2

아웃 오브 마이 라이프

고독한 파리스 왕자 1/2


1편에 이어.


“돈은 내고 나가야지. 음식을 먹었으면… 엉?”


무시하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출입구 천장에서 스파르타 전사들이 쓰던 도리스 창들이 우르르 천둥소리를 내며 연거푸 쏟아졌다. 날카로운 창살이 굵은 빗줄기처럼 바닥을 사정없이 내리찍어버린 것이다. ‘헉, 하마터면 온몸에 총알(?) 구멍이 생길 뻔했어! 다행이야’라고 한숨을 내쉬기엔 뭔가 일이 단단히 꼬여가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고양이 남자와의 길고 긴 사투를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말이야. 음식에 손을 댔으면 계산은 해야지. 네안데르탈인도 아니고 말이야!”

“난 음식을 먹은 적이 없어요. 저걸 음식이라고 표현하면 신문지 조각도 라자냐가 되겠군요. 난 저 접시 위에 굴러다니는 그걸 문어라고 부를 수 없어요. 저걸 문어라고 하면 노란 고무줄도 해산물이라고 주장하겠어요."


그때, 드디어 남자가 서서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실크해트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는데, 남자의 험악한 표정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연상할 수 있었다. 아무튼 남자는 상당히 화가 났는지 헛기침을 크게 외치더니 휴지통을 들어 그 안에 가래침을 퉤 하고 뱉어냈다. 그리고 실크해트 옆에 불쑥 솟아난 귀를 가렵다는 듯이 손톱 끝으로 벅벅 문질러댔으나, 욕구가 충족이 되지 않아서인지 더욱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 남자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다. 아니, 남자는 실제 고양이상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 사람이 고양이야? 아니, 고양이가 사람인 거야?' 준영은 이 레스토랑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메뉴판에서 보았던 '파리스의 절망적인 사랑'만큼이나 황당한 광경에, 준영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순간준영은 남자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변화를 감지했다그의 목소리가 점점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는 마치 포우의 검은 고양이처럼 불길하게 울어댔다순간카운터  그림자에서 남자의 모습이  치워졌다어둠 속에서 공간을 이동하듯이 거대한 검은 고양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눈동자에는 붉고 뾰족한 원망이 담겼으며앞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사납게 돋아나 준영을 위협하며 다가섰다.


준영은 순식간에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그러나 검은 고양이 사나이는 천천히 그리고 위협적인 앞발톱으로 준영을 압박하며 전진해 왔다.  순간준영은 공포와 혼란 속에서도 식당 주인과  검은 고양이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공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공상할 때가 아니었다.


고양이의 사나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식당 전체가 불안한 기운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외부 세계와 단절된 듯한  공간에서준영은 점점  깊은 나락으로 추락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준영은 애써 침착한 척하면서…


“장난치고 앉아 있네. 아저씨 몰래카메라 촬영이라도 하는 거예요? 그 탈 쓰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어요. 그따위 가면을 쓰는 건 아저씨 자유니 뭐라 간섭은 하지 않겠는데요? 아무튼 돈은 절대 낼 수 없습니다. 아니,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요. 그런 형편없는 음식을 내놓고 손님에게…”


“그래, 돈을 못 내겠다는 거지? 레스토랑의 럭셔리한 서비스를 이용해 놓고 팁은커녕 한 푼도 못 내놓겠다?. 여기서 몸으로 때울 생각도 없을 테고, 그래… 알았어. 그렇다면… 너희 거지 같은 놈들에게 보여줄 게 있지…”


고양이 사나이는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마치 초고속카메라로 촬영하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실크해트를 뒤집어쓴 고양이 사나이는 가죽점퍼를 걸친 듯 온몸이 검은색 줄무늬로 도배되어 있다. 고양이 사나이는 수염을 왼손으로 지긋이 쓰다듬고 그 가느다란 수염을 보기 좋게 배치했다. 그리곤 그 절차가 모두 끝나자, 앞발을 크게 휙 쳐들었다. 


“내 레스토랑에서 돈을 내지 않고 나가는 놈은 절대 가만두지 않아. 파리스 레스토랑의 치욕이지. 너 같은 놈은 절대 가만두면 안 돼. 벌을 받아야지. 무서운 형벌을 말이야. 다시는 못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공짜로 밥을 먹고 도망치면 무슨 험한 꼴을 당하게 되는지 호된 맛을 봐야지. 그렇지 않아? 엉?”


고양이 사나이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고 했으나, 아무리 검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호랑이로 둔갑하진 못한다. 포우의 오래된 소설 속 세상에서나 두려운 존재인 것이다. 호랑이와 저 고양이 녀석의 공통점은 그저 무늬라는 점, 그리고 녀석이 걸친 가죽점퍼일 뿐이다. 앞 발톱이 아무리 뾰족하고 날카롭다 한들, 내 머리통을 날릴 만큼 강력하진 못하다. 하물며 돈을 내지 않았다고 체벌을 가할 권리가 고양이 따위에게 있진 않다.


고양이 사나이는 발톱을 내세우며 그것을 숫돌에 갈아대는 것처럼 모양새를 취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험 삼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휙! 휙! 공중에서 공기가 원자단위로 썰리는 듯했으나 그것은 오직 효과음뿐이었다. 준영은 좌우로 고양이 사나이의 공격을 피했다. 고양이 펀치야 고작해야 냥냥 펀치가 전부란 말이다. 준영이 아무리 바보라지만 그런 펀치 정도는 피할 재간이 있었다. 


고양이 사나이와 준영의 사투는 미드처럼 오래 진행되었다. 고양이 사나이는 카운터 앞 데스크를 쓰러뜨리더니 높은 곳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힘으로 준영을 제압하려 했고 결국 준영의 몸 위에 올라서더니, 앞발을 휘둘러댔다. 고양이 사나이는 발톱을 부들부들 떨며 최후의 일격을 준영에게 구사하려고 눈썹과 앞발을 동시에 부르르 떨었다. 


준영은 한 손을 제압당했지만 마지막 남은 손이 있었다. 게다가 준영도 손톱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녀석이 펀치를 날리면 준영도 그대로 돌려주면 된다. 날카로운 발톱만 피하면 그럭저럭 승산은 있었다. 준영의 한방 아니 한날이라면 녀석을 충분히 때려눕힐 수 있다고 믿었다. 일단 폭풍 같은 녀석의 발톱 세례를 막아선 후 녀석이 지칠 때를 기다렸다가 카운터 펀치를 날리자, 그렇게 하면 준영은 전세를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다고 예측했다.


녀석의 냥냥 펀치가 시작됐으나, 그것은 솜방망이질에 불과했다. 녀석의 펀치에 익숙해진 준영은 지루해진 나머지 그만 크게 하품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순간, 준영의 가슴속에 서서히 차가운 공포가 스며들었다. 갑작스레 몰려오는 감정의 압박은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붙잡고 비틀어 놓는 것 같았다. 육체는 멀쩡했지만, 마음은 고통으로 뒤틀렸다. 고양이 사나이는 준영의 내면 깊숙한 곳을 꿰뚫어 보듯, 무언가 불편한 것을 심어놓은 것이다. 준영의 눈앞에 과거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실수, 실패, 외로움—그 모든 부정적인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준영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다. 고양이 사나이의 저주는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준영의 마음을 짓눌러, 그의 의지와 자존감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꿈이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고양이 사나이의 동작이 멈췄다. 모든 게 꿈이었을까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꿈은 아니었다. 준영은 레스토랑 바닥에 누워있었고 고양이 사나이와의 사투 때문이었는지 테이블은 여기저기 쓰러져 나동그라졌고 음식물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후미진 구석엔 고양이 사나이가 바닥에 앉아서 허무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준영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그 차가운 절망감이 남아, 자신이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파리스 레스토랑은 파리스 왕자를 모시는 일종의 사당 같은 곳이야.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는 아프로디테에게 황금사과를 준 대가로 헬레네를 얻었고, 결국 그 사건이 트로이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지. 이곳은 그 파리스의 저주를 풀기 위해 만들어진 레스토랑이야. 네가 어떻게 여기를 들어왔는지 알 수 없지만, 들어온 이상 값은 치러야 해. 넌 공교롭게도 파리스 왕자가 즐겼다고 전해지는 음식을 주문한 거야. 우리는 보통 손님을 받지 않지만, 아주 가끔 우연히 이곳에 들어온 자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곤 해. 네가 메뉴를 골랐고, 우리는 매뉴얼대로 음식을 준비했을 뿐이야. 손님은 음식을 맛있게 먹고, 우리는 그 대가로 소중한 기억을 빼앗아. 가끔은 영혼도 빼앗지, 재수가 없으면 말이야. 그것이 이 레스토랑의 규칙이자, 파리스의 저주를 푸는 방식이야. 트로이가 불타오르던 그날처럼, 모든 것은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우린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이 저주를 풀기 위해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며 인간의 기억을 황금사과로 바꿔 제물로 바쳐왔어. 그 황금사과는 파리스가 여신들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상징으로,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믿었거든. 하지만 네가 그 흐름을 뒤틀어버렸어.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음식을 맛없게 먹은 적이 없었어. 저주를 조금이라도 풀려면 음식을 맛있게 먹어야 하는데, 네가 그 법을 어긴 거야.”


“너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인물이야. 그 사실이 우리를 당황시켰지. 그래서 나는 너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어. 하지만 동물이 인간에게 폭력을 쓴다는 거. 그것 또한 코스모스의 법칙에 위배된다는 사실이지. 우리에게 그럴 권한까지는 없었으니까. 하…” 고양이 사나이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제가 질서를 무너뜨린 셈이 됐군요. 하지만 저는 다만 음식이 맛이 없어서,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너무 형편없어서 뱉어버리고 싶었다니까요. 솔직한 것도 죄랍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고요. 썩어 문드러질 지경의 맛인데, 어떻게 맛있게 그걸 억지로 꾸역꾸역 처먹겠습니까? 저주이건 레스토랑의 역사적 비밀이건, 그따위는 전 관심 없고 저 철창이나 어서 없애주세요. 그리고 내 주머니에 꼬깃꼬깃 감춰둔 5만 원을 꺼내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시고요”


“흠…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우리 고양이 일족은 이집트에서 살았지. 기원전 31세기부터 우린 인간과 함께했고, 때로는 인간보다 더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어. 이집트의 신전에서 신비한 예언을 속삭이던 우리의 조상들은 파라오와 함께 하며, 인간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지. 하지만 이집트가 쇠락하고 멸망하면서 고양이의 역사는 잠시 끊기고 말았어. 그 혼란 속에서 우리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트로이로 가게 되었지. 그게 기원전 12세기의 일이야. 트로이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때 아킬레우스의 무리들이 쳐들어온 거야. 재수 없게도, 그 빌어먹을 목마 때문에 트로이도 결국 멸망하고 말았지. 우리는 그리스 군의 함정을 트로이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어. 하지만 아무도 고양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지. 그저 야옹거린다고만 생각했겠지. 그래서 트로이가 불타오를 때, 우리 대부분도 그 불 속에서 희생되고 말았어. 파리스 왕자가 원망스러웠지만,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고작 사랑과 질투 때문에 나라가 멸망해야 했던 걸까? 그 얄팍한 목마의 속임수로… 죄 없는 우리 고양이들도 함께 타들어 갔어. 구원은커녕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지.”




고양이 사나이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곤 계속 말했다. “그 이후로 우린 그리스를 대대로 원수로 생각하고 절망적인 사랑 때문에 나라를 망친 파리스 왕자를 돌봐주기로 했어. 모든 인간의 비웃음이 된 파리스를 내버려 둘 순 없잖아. 하지만 트로이라는 낙인이 찍힌 고양이들은 갈 데가 없었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는 이 지구상에도 몇 마리가 남지 않았어. 그리고 여기 재개발 구역에 남은 내가 그 마지막 혈족 중의 하나고…”


“아무튼 그건 그렇고 네가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유일하게 단 하나밖에 없지. 그것은 네가 주문했던 음식을 모두 머릿속에서 하나씩 복원해 내는 거야. 철저하게 재료와 소스 하나까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음식들은 모두 깨끗하게 치워졌지. 모두 음식물 쓰레기 분쇄기 속으로 사라졌어. 게다가 넌 머리도 좋지 않잖아? 으하하하. 향신료와 식재료와 음료까지 모두 빠짐없이 기억해 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곳에서 파리스 왕자의 저주와 함께 왕자님을 모시며 백골이 될 때까지 남아있어야 할 거야. 음, 하하하 핫 응 허허허허 호호호홍야 이야옹….”


“……”

“시나몬… 시나몬… 시나몬…”


준영은 미칠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시나몬 향만 가득했던 것이다. 시나몬, 시나몬, 시나몬 준영은 머리를 쥐어짜며 흔들어대며 기억을 짜내려 바닥에 머리를 찧어봤으나 떠오르는 단어라곤 오직 시나몬뿐이었다. 머리가 나쁜 준영은… 그래서… 계속…


“시나몬, 시나몬, 시나몬…”

“시나몬… 그리고 나머지는… 뭐… 시… 오레…”


파리스 레스토랑은 아파트 주변 산책로에 위치했다. 산책자라면 누구나 파리스 레스토랑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집이 레스토랑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 그리스 풍의 레스토랑은 재개발 아파트 주변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곳의 문은 아무도 두드리지 않을 것이다. 무료함에 빠진 고독한 산책자라면 또 모를까…


오늘은 왠지 파리스 레스토랑의 단단한 철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속삭임, 마치 멀리서 울려 퍼지는 저주의 목소리처럼, 골목을 타고 은밀하게 흘러나왔다.


“시나몬... 시나몬...”


골목을 지나던 몇몇 산책자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들었어? 무슨 소리 같지 않아?” “그래... 뭐 시나몬? 어쩌고 하던데...”


사람들은 서로 소곤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파리스 레스토랑의 철문 너머로 울려 퍼지던 준영의 저주 섞인 음성은 여전히 어둠 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골목 끝에서 멀어졌다가도 다시 가까워지는 듯, 희미하게 이어졌다. '시나몬... 시나몬...' 그 음산한 울림은 지나가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불길한 잔향을 남기고 있었다. 당신이 운이 좋다면 고양이 사나이로 변해버린 준영을, 아니 파리스 왕자를 모시게 된 준영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부디 그 레스토랑의 문을 두드리지 않기를...


음. 오늘은 왠지 시나몰 롤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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