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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20. 2024

친퀘 테레

아웃 오브 마이 라이프

새벽 2시, 느닷없이 친퀘 테레로 떠날 거라고 선언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나의 욕망은 지극히 우연한 계기에서 그리고 새벽에 시작되었다. 나는 내 방에 앉아 포우의 ‘어셔 가의 몰락’ 숨죽이며 읽는 중이었다. 그때, 말하자면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끌려들어 갔던 것이다. 이야기의 살아있는 저택처럼 이 집구석이 마치 공포와 살기로 춤을 추는 듯했다. 음산한 분위기와 섬뜩한 이미지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나머지, 벽을 바라보면 마치 검은 고양이가 현실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기묘한 그림자에 짓눌리며 고양이를 다시 벽 너머로 억지로 욱여넣는 환상에 빠졌다. 나는 현실과 상상을 분간하지 못했다. 그 순간, 라디오에서 구세주처럼 에피톤 프로젝트의 '친퀘 테레'가 흘러나왔다.


무겁게 심장을 내리누르던 포우의 단편을 덮어두고 '친퀘 테레'가 무엇인지 공상하기 시작했다. 멜로디나 리듬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친퀘 테레라는 공상적인 단어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친퀘 테레는 무엇일까. 사람 이름일까. 어떤 물건의 이름일까. 그 속에 숨은 뜻을 파헤치고 싶었다.


찾아보니 친퀘 테레는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 해안에 위치한 다섯 개의 작은 마을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다. 친퀘 테레는 각각 몬테로소 알 마레, 베르나차, 코르니글리아, 마나롤라, 리오마기오레라는 이름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마을들은 절벽 위에 자리 잡아 중세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숨겨진 보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절벽과 바다 사이의 가파른 풍경은 특히 아름답다. 포우의 단편에서 느꼈던 그 음산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을까. 친퀘 테레가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듯했다.


다만 문제는 나 혼자만의 결정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 여자는 벌써 몇 년째 내 집에서 허락도 없이 기숙하고 있다. 그 여자와 내가 부부지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오해다. 나는 그것을 강조하고 이야기를 계속해나간다. 나는 그 여자에게 큰 빚을 진 상태였고, 그 여자는 빚을 모조리 뽑아낼 때까지는 절대 집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내 집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 여자는 컨테이너 박스처럼 생긴 캐리어를 낑낑 끌며 ‘악으로! 깡으로!’라는 육성을 외치며 집에 찾아왔다. 맙소사! 캐리어 하나에 모든 살림이 들어갈 수 있다니! 그녀는 그 캐리어 안에 나에게서 받아내야 할 빚의 목록표를 담아 놓기라도 한 듯, 굳은 결의로 내 집에 자신의 본거지를 차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마치 아내인 양 행세를 하며 내 생활을 통제하려는 듯한 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여자와의 예기치 않은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여러분은 내가 심각한 약점이라도 잡힌 게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조하건대 하늘에 대고 맹세하지만, 나는 털끝만큼도 양심에 걸릴 만한 짓거리를 한 적이 없다. 그저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이런 기이한 동거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장편소설이 될 테니, 여기서 이야기를 갈음하고자 한다.


솔직하게 밝히자면, 그 여자와 내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우린 대학교에서 같은 과 선후배로 처음 만났고, 소설을 함께 쓰며 서로의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던 사이였다. 그때는 단순한 동료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게 은근히 정이란 게 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과거를 굳이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편의를 위해 우릴 일종의 연애 관계라고 설정해 두자. 그것이 훨씬 설득력을 가질 테니. 계약 형태는 띄지 못했지만, 어쨌든 내가 딱히 여자 친구를 가진 것도 아니고 밤을 혼자서 무료하게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언젠가 그 여자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르니, 우린 그런 희박한 가능성을 설정해 두고 동거란 걸 하기로 했다. 


“나 친퀘 테레에 가야겠어. 아니, 지금 생각난 건데, 무조건 가야 해. 오늘 당장!” 내가 그 여자에게 뜬금없이 말했다. 사실 그런 건 말하지 않고 내 맘대로 결정해도 되는 건데, 이상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런 즉흥적인 결정을 내릴 때마다 여자는 항상 어이없어했지만,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트를 깔아놓고 열심히 요가 동작을 취하던 그 여자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쭉 뻗으며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가늘게 감겨 있었고, 얼굴엔 집중 때문인지 미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물 흐르듯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춤을 췄지만 왠지 모르게 언짢아 보였다.


그러던 중 내가 말을 꺼내자 그녀는 "운동 방해하는 소리 좀 제발 하지 말아 줄래?"라고 짜증을 부렸다. 그녀가 눈을 찡그리고 한숨을 내쉬는 바람에 균형이 깨졌다. "정말, 지금 이런 얘기를 해야겠어?"라고 심등 그렁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으려 했지만 결국 자세가 망가지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운동에 심취 중일 때는 더욱더. 그런데 이곳은 내 집이 아닌가.


“층케 테?”

“층케 테가 아니고 친퀘 테레라고” 내가 멍청한 여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층케 테든 친퀘 테레든 지금 운동하는 사람한테 할 말이야? 그 여자가 짜증 내며 말했다.


대체 저 여자와 내가 무슨 사이인데? 저런 무덤 옆 잡초처럼 생긴 여자가,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을 얻었단 말인가.


“난 생각났을 때 말해야 직성이 풀려서…” 그 여자가 반갑건 그렇지 않건 관심 없다. 내가 친퀘 테레로 간다고 결정하면 그냥 가는 것이다. 여자의 생각이 궁금한 게 아니다. 따라오건 그렇지 않건 그건 상대방의 의중에 달려 있다.


아무튼 친퀘 테레로 가겠다고 통보했으니 그곳에 갈 방법만 모색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이다. 영하 20도의 한겨울에 보일러는 장식에 불과한 내 처지에 친퀘 테레라니, 어불성설 아닌가. 


나는 늘 궁핍한 생활을 유지해 왔다. 소설가라고! 아니, 소설가가 되려는 소망을 품은 사람이란 게 원래 다 그렇지 않은가. 소설가가 돈을 풍족하게 갖고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는가? 게다가 나는 자존심이 있어서 편의점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다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지'라고 자위하며 현실을 외면했다. 엄마에게 들러 푼돈을 뜯어내며 그걸로 한 달을 버티는, 그야말로 빈대 같은 인생이었다. 


내 자존심은 허황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직 펜대가 아니라면 그 어떤 직업도 마다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적인 낭만을 입에 달고 다니며, 그저 주위를 기생하며 살아가는, 그런 처지였다. 이렇다 할 직장도, 일거리도 없는 상태로 집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게 무척 좋았다. 그러나 먹고살기도 빠듯한 상태에서 그 여자에게 빚까지 진 상태였다. 그런 내가 어떻게 친퀘 테레에 갈 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 어딘가에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철없는 낙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낙관은 가끔 현실 감각을 잃게 만들었다. 나는 분수를 잊은 채 무모한 결정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슬쩍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요가 동작을 이어가며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녀에게 기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가 빈대라면, 그녀는 내 생존의 유일한 편안하고 안락한 에이X 침대였다. 물론 돈이 궁핍할 때만...


여자를 슬쩍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요가 동작을 이어가며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녀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뭔가 저 여자에겐 돈이 나올 구멍이 있을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부탁해야겠지...'라는 생각이 들며, 나는 속으로 최대한 비굴한 인간으로 변신하자고 생각했다.


"저기... 너도 알겠지만, 내 상황이 좀 그렇잖아. 이번 한 번만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내가 호구라서 이런 부탁하는 거 알지만, 이 전도 유망한 소설가 청년에게 투자해 볼 생각은 없어?"


여자는 한숨을 쉬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정말 끝도 없구나, 너." 그녀의 목소리에는 냉소와 함께 약간의 연민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 더 비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잖아, 내 옆에는 지금 너밖에 없잖아. 엄마한테 찾아가서 돈을 빌릴 수도 없고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우리 둘 다 어차피 비슷한 처지에 있으니 서로 도와야지, 안 그래?"


여자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요가 매트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들은 체 만 체하며 그냥 넘기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요가 동작을 이어가던 그녀의 얼굴에 잠시 망설임이 스쳐갔다. 한숨을 쉬며 자세를 마무리한 그녀는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정말, 너 같은 사람한테 돈을 또 빌려주는 건 내 인생 최대의 오점이 될지도 몰라."


그리고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게 미안했던지 나를 향해 다시 말했다. "좋아, 돈을 빌려주겠어. 하지만 조건이 있어. 너, 내가 하라는 대로 무조건 다 해야 돼. 그리고 만약 네가 약속을 어기면, 네 신체 일부를 가져갈 거야. 신체포기 각서라고 말하지. 어때? 알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친퀘 테레라는 이미지에 취한 나머지 훗날을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친퀘 테레로 갈 돈을 마련할 수 있다면, 내 비굴함이 무엇이 대수란 말인가.


곧바로 여자가 준 카드를 들고 현지의 정보를 뒤지기 시작했다. 비행기 스케줄을 확인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신장 따위 줄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 어차피 여차하면 그냥 결혼해 버리면 될 테니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 카드로 결제를 진행했다. 그리고 바로 내일 떠날 수 있는 일정으로 덜컥 예약해 버렸다.


“내일 떠날 거야. 네가 갈지 말지는 알아서 결정해. 일단 내 티켓만 예매했으니까.” 이렇게 말하자 여자는 잠시 멈칫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뭐? 너 지금 진심이야? 왜 내 티켓은 안 끊었어? 나더러 여기 혼자 있으라는 거야?"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네가 갈지 안 갈지 몰랐으니까 그냥 내 것만 먼저 예매한 거야. 게다가 갚아야 할 비용이 두 배가 되니까..."


여자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너는 왜 항상 이런 식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거야." 그녀는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더니, 덧붙였다. "카드 나한테 줘봐."


나는 마지못해 카드를 건넸고, 그녀는 티켓을 예약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속으로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니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같이 가니까 좋잖아. 그러니까 이제 돈 생각은 그만하고. 친퀘 테레만..."


그리고 나는 이곳 친퀘 테레에 도착했다. 새벽 5시, 골목길 여기저기를 난생처음 구경하는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에어비앤비에 예약해 둔 장소 바로 앞에 지금 서 있다.


그 여자는 물론 내 옆에 멍하게 서 있다. 해외여행은 처음이란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러더니 표정을 바로 바꿨다. 지금 이탈리아에 도착했다고 싱글벙글 야단이다. 난 적막한 곳에서 소설에 대한 몽상, 즉 사색이란 걸 길게 즐기고 싶었는데, 옆에 귀찮은 혹이 하나 생긴 것이다. 


그녀는 우리가 머물 숙소가 어디냐며 가이드라도 된 듯이 빨리 안내하라고 재촉했다. "뭐? 왜 내 티켓은 안 끊었어? 나더러 여기 혼자 있으라는 거야?"라고 하던 황당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갔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런 건 네가 좀 직접 찾아보면 안 되냐고, 이왕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숙소 1층에는 두 사람 정도가 앉을 만한 작은 스탠드 좌석과 테이블 두 개 정도가 놓여 있었다. 새벽의 친퀘 테레는 고요하고 서늘한 공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미 카페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는데, 어둠을 깨고 점차 살아나는 마을의 느낌이 들었다. 골목길에서는 희미한 안개가 서성였고, 아직 잠들지 않은 밤의 흔적이 서려 있었다. 카페에서 흐르는 커피 향과 함께 잔잔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그곳에 스며들었다.


새벽녘의 친퀘 테레는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적막했다. 나는 야외 테이블에 잠시 앉았다. 의자는 단 하나뿐이었다. 여자는 나를 쳐다보며 자신은 어디 앉냐고 짜증을 부렸다. 얼굴에는 피곤함 탓인지 예민함이 가득했다. 나는 속으로 그녀의 불평이 계속될 것임을 알았다. "카페 주인장한테 의자 하나라도 가져다 달라고 하든지"라고 나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주변은 너무나도 평화로운데, 우리의 대화는 분위기와 달리 살벌했다.


여자는 테이블 앞에 서서 갑자기 악을 써댔다. 그녀는 마치 저주를 퍼붓는 것처럼 포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배가 고프다는 건지, 다리가 아프다는 건지, 아니면 이 낯선 곳에서 운동을 못 한다고 투덜거리는 건지, 그 모든 불만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소리치더니 결국 지침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는 체념이 서려 있었다. '결국 이렇게 끝나겠지'라는 듯한 모습으로.


우린 3층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방이다. 침대가 두 개 있고 작은 테라스가 있다. 그리고 그런 방이 두 개 있다. 말끔한 욕실과 깨끗한 수건들. 모든 게 완벽하다. 불청객 같은 그 여자만 빼놓고.


그 여자는 아까부터 난리다. 배변 활동에 문제가 생겼다며, 이런 즉흥적인 여행 스케줄이 너무 달갑지 않다고… 그럴 거면 왜 따라왔을까. 혼자 서울에 있으면 그만이 아니었을까. 왜 이곳에까지 와서 자신의 배변 스케줄을 가지고 따지는 걸까. 그깟 똥이란 건 서울에서만 챙기면 됐지, 이곳 친퀘 테레까지 와서 챙겨야 할 일인가. 게다가 내 돈을 써놓곤...


그리곤 가방에서 주섬주섬 매트를 꺼냈다. 거실에 매트를 깔아 두곤 운동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아침마다 반복했던 그 지겨운 동작들이다. 이곳 친퀘 테레에서도 운동은 이어져야 한단다. 여기서까지 운동을 해야 하나.


결국 나는 참다 참다 폭발하고 말았다. 아니 폭발했지만 목소리는 비교적 침착한 방식으로. 바깥에서 듣기엔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것처럼 교묘하게 화를 냈다. 그 여자와 나는 서로의 말을 되받아치다가 어느새 옥신각신하게 됐다. 서로의 팔을 붙들고 어깨를 쥐고 흔들어대며 힘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 여자가 내 뺨을 내리친 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의도치 않게 일어났다. 나도 놀랐고 그 여자도 놀랐다. 폭력적인 수단을 나는 내 일생에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써본 적도 없고 당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그날 그 여자는 나에게 자신의 힘을 최대한 비열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구사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열이 더 오른 건지, 주먹을 꽉 쥐더니 근육에 숨겨진 힘을 그러모아, 내 가슴에 주먹을 꽝꽝 내려 찍기 시작했다. 나는 하릴없이 그 여자의 끔찍한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 도저히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 여자의 팔을 붙들고 제지하려 들었지만 지친 내 몸뚱이로는 불가능했다.


그 여자는 더 악독하게 그러니까 자신의 화를 주체 못 하는 사람으로 급발진했다. 성난 황소처럼 그 여자는 자신의 머리를 내 가슴에 박고 창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더니 물러설 듯이 뒤를 돌아, 한 쪽 벽에 붙어 씩씩거리며 진정하는가 싶더니. 바닥에 쿵쿵 찧어대며 내쪽을 사납게 째려봤다. 그리곤 발을 앞쪽으로 구르며 내가 서 있는 내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돌진해 와 머리로 가슴을 들이받은 것이다. 몇 번 그 여자는 그런 행동을 반복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여자의 가격에 나뒹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일격을 위해 여자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나에게 결정타를 날려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여자는 씩씩거리며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마치 나를 끝장낼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거친 호흡과 함께 달려들었다. 순간 그 여자의 머리에서 솟아난 두 개의 빨간 뿔이 보였다. 나는 순간 그 힘에 맞서는 것보다 슬쩍 피하는 것이 훨씬 슬기롭다고 생각했다. 정말이다. 그저 잠시 옆으로 스페인의 투우사처럼 나직하게 회피 기동을 하려는 게 전부였다. 옆으로 살짝 방향만 틀겠다고 힘을 잠시 빼려고 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것이 비극의 발단이 됐다. 


여자는 나에게 돌진하며 심장을 향해 쏜살같이, 말하자면 지옥의 나비처럼 파고들었지만 내가 살짝 옆으로 비켜 서자, 자신의 체중과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우회란 걸 하기에는 자신의 육중한 몸무게와 가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 모든 힘을 끌어안고서 나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못하고선 그만 테라스 바깥으로 속절없이 튕겨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 앞에 아름답게 서 있던, 중세시대의 예술가가 만든 것이 분명한 로마네스크식의 우아하고 얇은 유리창이 와장창 하고 절망하는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유리창뿐만 아니라 그 여자는 기세를 진정시키지 못한 채, 커다란 화분을 무너뜨렸다. 애석하게도 자신의 100킬로그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1층 야외 테이블 밑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오늘 내가 친퀘 테레에서 맞은 사건의 전말이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됐냐고? 글쎄 잘 모르겠다. 여긴 친퀘 테레니까.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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